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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15.04.01 독일제국 건설 비스마르크 출생

by 설렘심목 2012. 1. 14.

1815.04.01  독일제국 건설 비스마르크 출생

 

 

실각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3946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8101

 

 

 

 

‘식욕이 왕성한, 사랑을 위해 개종한 철혈재상’

 

1815년 오늘 태어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60년대 중반까지 40여개의 크고 작은 국가들로 나눠졌던 독일을 통일, 1871년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47세 때 프로이센 총리로 취임하면서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프로이센 융커(지주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왕성한 식욕,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성과 지성을 가졌다. 아헨시 사법관이던 25세 때 연애사건으로 사직했다. 그리스도교에 무관심한 이신론자(理神論者)였지만 경건파(루터파 교회의 한 종파) 신도인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했다.

 

프로이센의 보수적 정치가에서 출발해 러시아주재 대사, 프랑스주재 대사를 거치며 외교력을 발휘했다. 1864년,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해 독일 통일을 이뤘다. 통일을 위해 엄청난 피를 뿌렸지만, 통일 후 주변국과 협상, 동맹을 체결하며 평화 애호가로 변신했다. 1888년 즉위한 빌헬름 2세와 충돌하다 2년 뒤 사직했다.

 

 

/매일신문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

1815. 4. 1 프로이센 알트마르크 쇤하우젠~1898. 7. 30 함부르크 근처 프리드리히스루.

프로이센의 정치가, 독일 제국의 건설자, 초대 총리.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지주귀족(융커)이었고 어머니는 고급관료의 딸이었다. 당당한 체구, 국가에 대한 헌신, 왕성한 식욕을 지녔던 비스마르크는 외모와 스스로도 인정한 기호면에서는 순수한 융커였다. 그러나 정신·감정 면에서는 놀랄 만큼 섬세하고 날카로운 지성과 표현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를 독일 제일의 저술가로 꼽기도 한다.

 

비스마르크의 청년시대

비스마르크는 어머니과 함께 살며 베를린에 있는 김나지움(독일의 9년제 중등학교)에 다니면서 거의 찾아가본 적이 없는 비스마르크 가문의 땅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를 키웠다. 김나지움을 마친 뒤에는 괴팅겐대학교에서, 이어 베를린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모범생은 아니었으나 졸업시험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아헨 시 사법관이 되었다. 그러나 연애사건으로 25세 때 사직했다. 비스마르크는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 그러지 못한다면 연주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가업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비스마르크는 아버지를 도와 시골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경건파(루터파 교회의 한 종파) 신도 요하나 폰 푸트카머를 사랑하게 되었다. 청년 비스마르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는 무관심한 이신론자(理神論者)였지만 요하나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했다.

 

1848년 혁명과 비스마르크

1847년 비스마르크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철도건설을 위한 공채발행 승인을 얻기 위해 소집한 프로이센 연합의회 의원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절대주의와 반동의 선동적 대변자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으며 온건한 자유주의적 조치에 반대했다. 이듬해인 1848년 3월 독일에 혁명 바람이 불어닥쳐 국왕이 베를린 시민의 봉기에 굴복한 사실은 비스바르크에게는 몹시 못마땅한 일이었다. 자유주의가 우세한 동안 비스마르크는 불우했다. 프랑크푸르트의 국민의회에도, 베를린에서 열린 제1회 프로이센 의회에도 그는 선출되지 못했다. 혁명의 타파를 대망하며 과거와 같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사이의 신성동맹이 회복될 날을 기다렸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다시 열렸을 때 그가 프로이센 대표로 선정된 것은 분명 이와 같은 그의 견해 때문이었다. 1851년 5월 11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다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 생활은 이후 중단 없이 39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간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 방식에 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며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러나 2주도 채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결코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실제 국민의회의 '의장국'이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지도력을 과시하는 행위에 사사건건 저항했고 오스트리아 대표에게 계속 신랄한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 제국의회).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외무장관 만토이펠도 비방하게 되었는데 비스마르크는 그들이 보수세력의 연대라는 감상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프로이센의 위대성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성동맹은 붕괴했다. 그러므로 프로이센은 자기 중심의 현실적인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견해였다. 크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거나 러시아에 적대하는 유럽 열강 측에 가담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크림 전쟁이 오스트리아에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발칸 반도와 도나우 강 하류 지역은 프로이센의 국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확신했다. 이런 생각은 뒷날 그의 정책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공식 정책에 점점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1858년 빌헬름 4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동생인 빌헬름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로이센에는 짧은 기간이나마 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는 '새 시대'를 맞았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그 반동적 명성 때문에 국민의회의 프로이센 대표로는 부적당하다고 생각되어 1859년초 러시아 주재 대사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되었다. 1861년 1월 빌헬름 4세가 죽자 섭정 빌헬름이 빌헬름 1세(1861~88 재위)로 즉위했다. 훈련받은 직업군인이었던 빌헬름 1세는 상비군 병력을 증원하고 프로이센의 모든 보수주의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민병대를 폐지하려 했다. 의회 다수파를 이루었던 자유주의자들은 군비확장에 필요한 예산의 증액을 승인했으나 민병대제도는 유지하고 또 병역기간을 3년에서 2년으로 줄이려 했다.

 

비스마르크의 총리 취임과 군주회의

자유주의자들과 빌헬름 1세 사이의 갈등은 1862년 9월 군제개혁을 둘러싼 위기까지 치달았다. 빌헬름 1세는 문제해결을 위해 프랑스 주재 대사로 갓 부임한 비스마르크를 불러들여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와 왕의 제휴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빌헬름 1세는 자신의 독자적인 군사정책 유지만을 원했을 뿐 비스마르크가 제창하는 모험적 외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우선 자신을 국왕에게 필요불가결한 인물로 인식시킨 다음 국왕이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되는 외교정책으로 국왕을 끌어넣으려고 국내 분쟁을 조장했다. 그리고는 하원에서 "오늘날의 중대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철과 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고 한 총리 취임 첫 연설인 이른바 '철혈연설'을 했다.

 

1863년 8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독일 연방의 개혁과 통일을 토의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체 독일 군주회의를 소집했다. 만약 회의의 주제가 독일의 여러 군주를 회생시키는 것이었다면 비스마르크는 앞장서서 오스트리아와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목적은 독일 각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연방의 중앙권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연방회의의 대표로 이루어진 국민대표기관을 설립하는 데 있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이 개혁안에 반대했고 빌헬름 1세를 설득해 회의 참가를 포기하게 했다. 빌헬름 1세가 불참함으로써 군주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끝났다. 독일의 여러 군주들과 협조하는 오스트리아의 정책에 대응해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및 프랑스와의 우호를 강조했다. 1863년 가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다음 이 조약을 프로이센이 통제하는 독일 관세동맹에 강요했다. 이 협정에는 오스트리아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연방제가 존속하고 있었지만 독일의 경제적 분열은 끝났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비스마르크

1863년 11월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7세가 죽고 동시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가 재연되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작령은 덴마크와 독일을 잇는 지역에 위치했고 두 나라 모두 덴마크와 연합관계에 있었다.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일원이기도 했는데 슐레스비히 역시 그 남부 지역 주민의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 프레데리크 7세의 뒤를 이은 크리스티안 9세가 이 두 공국에 덴마크 헌법을 적용해 병합을 도모함으로써 독일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했다. 독일인은 두 공국에 대한 또 한 사람의 요구권자 아우구스텐부르크 공 프리드리히를 지원하여 크리스티안 9세에 대항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과 국경이 맞닿는 곳에 새삼스럽게 새로운 독일인 소국가를 창설한다는 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독일인의 민족감정에 호소해 자기를 앞지르는 것을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1864년 1월 자유주의자들을 싫어하던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은 비스마르크의 술책에 빠져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동맹조약에 조인했다. 이 전쟁은 두 공작령의 해방이 아니라 연합강화를 의도한 것이었다. 덴마크는 삽시간에 패했고 동맹군은 슐레스비히를 석권했다. 8월에 덴마크는 강화조약을 맺었고 두 공작령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공동관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오스트리아는 두 공작령에 대한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의 권리를 전면에 제시했다. 프로이센은 어전회의를 열어 오스트리아의 도전에 전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토의했다. 결국 1865년 8월 화해가 성립되어 가슈타인 협정을 체결해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각각 관리하도록 했다. 비스마르크는 다시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10월 비아리츠에 있는 나폴레옹 3세를 방문했다. 두 사람이 정한 합의는 "비스마르크는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령임을 인정하지 않고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이어 비스마르크는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방위하겠다고 이탈리아에 약속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1866년 4월에 이탈리아와 조인한 동맹의 기본조항이었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는 만약 3개월 이내에 대(對)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난다면 프로이센 측에 서서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6월 오스트리아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처리문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고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포기하자 프로이센군은 홀슈타인에 침입했다. 연방의회 대다수는 프로이센을 비난했으나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독일 연방의 종언 선언으로 회답했다. 이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드는 독일 여러 나라를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 7주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화해와 비스마르크

1866년 7월 3일 프로이센군은 쾨니히그레츠 근처의 자도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국왕 빌헬름 1세는 평소에 오스트리아야말로 침략자라고 주장했으므로 오스트리아령의 일부 병합을 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분할을 반대하는 태도를 굳혔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비스마르크는 마인 강을 경계로 하여 독일을 프로이센권과 오스트리아권으로 나누자고 제의했는데 니콜스부르크 평화협정(1866. 7. 26)에서는 이 방식을 취하지 않고 오스트리아를 독일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자도바 전투 당일 프로이센에서는 총선거가 있었다. 급진자유주의자의 진보당은 현저히 쇠퇴했고 마침내 당이 분열되었다. 다수파는 새로이 국가자유당을 결성했고 국내 문제에서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내는 대신 비스마르크를 지지하기로 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 측에 서서 참전한 나라들은 작센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또 그밖의 나라들은 프로이센이 제어하는 연방, 곧 북독일 연방에 가맹해야 했다. 프로이센 왕은 연방의 우두머리와 총사령관직을 겸했고 비스마르크는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연방의회를 열었다. 군사 예산은 1871년 12월을 기한으로 승인되었는데 비스마르크는 군사비 지출을 항구적인 승인사항으로 해서 헌법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국민자유당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1874년에야 7년분을 일괄 인정하는 '7년제 군사 예산방식'에 동의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프로이센을 맹주로 한 신생 독일의 출현은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안전에 위협을 미쳤고 프랑스는 그 대가를 요구했다. 프랑스의 요구는 동맹조약의 체결과 라인 강 왼쪽 독일령의 할양이었지만 비스마르크는 이를 교묘히 회피했다. 마지막으로 선택된 해결책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었다. 프로이센군이 주둔해 있던 룩셈부르크는 옛 독일연방의 일원으로서 네덜란드 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한 룩셈부르크 매수 교섭은 실패로 끝났고 런던에서 열강회의가 열려 프로이센군의 철수와 룩셈부르크의 영세중립화가 의제로 제기되었다. 이 룩셈부르크 위기로 프랑스-프로이센 동맹이 성립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기는 하나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고의로 행동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1869년 그는 남부 독일의 여러 나라를 연방에 가입시킨다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벨기에를 획득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했을 정도이다.

 

그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의 위신을 증대시킴으로써 독일 통일을 추진할 결의를 굳혔다. 1870년 그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레오폴트 왕자를 간접적으로 설득해 비어 있던 스페인 왕위의 후보자로 나서게 했다. 프랑스는 이에 위협을 느껴 레오폴트의 사퇴를 요구했다. 레오폴트는 당초부터 이 일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빌헬름 1세의 압력을 받고 입후보를 사퇴했다. 프랑스의 요구를 거절해서 위신을 세우려던 비스마르크는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와 프랑스 대사의 회견 내용을 전하는 이른바 ' 엠스 전보'의 앞뒤 내용을 잘라 발표해, 독일국민에게는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왕에게 무례한 짓을 범하고 프랑스 국민에게는 프랑스 대사가 모욕당한 인상을 주도록 했다. 이로부터 1주일 뒤인 7월 1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벌어졌다. 효과적인 군사조직과 병력의 우위는 프로이센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프랑크푸르트 조약(1871)으로 프로이센은 알자스-로렌 지방을 병합했고 프랑스에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요구했다.

 

남부 독일 여러 나라는 모두 대(對)프랑스 전쟁에 참가했지만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제국의 가맹에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비스마르크는 몇 가지 정치적 양보와 더불어 거액의 돈을 바이에른 왕에게 주어 그들의 가맹을 실현시켰다.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자신이 독일 황제라고 선언했고 이로써 비스마르크의 숙원이던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 독일제국).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된 비스마르크는 후작작위와 함께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1871~78년에 걸쳐 그는 제국의회에서 다수파를 옹호하고 여당격인 국민자유당을 통해 통화의 통일, 중앙은행의 창립, 통일 민법과 상법의 제정, 라이프치히 고등재판소의 설립 등 근본 개혁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복잡하게 얽힌 중세적 유제(遺制)는 10년도 되지 않아 일소되었다.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

1871년 비스마르크 반대자들이 널리 지지하던 가톨릭 중앙당이 의회에서 58석을 획득했다. 이들은 국가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비난한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을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면서 중앙집권정책에 반대했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가 국민자유당의 협조를 얻어 교회의 교육기관 관리 제도 폐지, 성직자의 정치적 설교 금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이른바 '문화투쟁'(Kulturkampf)이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비스마르크는 국가가 성직자를 훈련하고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교회와 국가). 중앙당이 로마 교황청의 후원을 받아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사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 로마 가톨릭교).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과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873년 비스마르크는 보수적인 연대였던 과거의 신성동맹을 삼제동맹의 형태로 새로이 부활시켰다. 이 동맹은 3개의 제국 곧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각자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동맹은 서로의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 동안에만 그 결합을 유지했을 뿐이다. 1875년에 분쟁이 일어났고 곧이어 위기가 발생해 동방문제가 재연되었다.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구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에 돌입한 러시아가 1878년 3월 투르크에 논쟁의 과녁이 된 산스테파노 조약을 강요한 것이다 (→ 러시아-투르크 전쟁). 영국은 전쟁으로 해결하려 했고 오스트리아도 평화를 약속하지 않았다. 파국을 두려워한 비스마르크는 '공정한 중개인'으로서 조정에 나섰다. 같은 해 6월 베를린에서 열강회의를 열어 베를린 조약을 성립시킴으로써 러시아와 영국을 화해로 이끌었다. 1875~78년의 동방위기는 황제간의 연대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신념을 무너뜨렸다 (→ 베를린 회의). 그는 러시아를 신뢰할 수 없는 동맹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 빌헬름의 반대를 묵살하고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를 방위할 결의를 굳혔다. 이 정책은 합스부르크 왕국을 유지하려 한 1866년 당시의 그의 결의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불완전한 독일-오스트리아 동맹(1879)은 오스트리아의 정책, 특히 발칸 반도에서의 모험적 정책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오스트리아를 유지하려 한 것이었다. 즉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붕괴하면 러시아가 유럽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리라 우려했던 것이다.

 

자유주의와의 결별한 비스마르크

1877년까지 비스마르크는 일관되게 국민자유당과 제휴했지만 그뒤에는 주로 간접세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자유당과 대립하게 되었다. 기존 세입으로는 군사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부족분을 연방 산하 각 지역에서 내는 분담금으로 충당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런 의존을 벗고자 했다. 직접세를 도입하면 의회의 권한이 증대되지만 간접세가 무기한 승인되면 군사비 지출을 의회가 거의 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민자유당은 이 위험성을 깨닫고 헌법의 보장이 없는 한 간접세 증가에는 반대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1877년 12월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의 당수 베니히센에게 프로이센의 총리로서 사실상 자신의 대리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베니히센은 새로이 2명의 국민자유당원을 각료로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베니히센의 의도는 비스마르크를 의원내각제에서 명목상의 우두머리로 만들려는 책략이었다. 비스마르크는 교섭을 거부했고 이로써 국민자유당과의 균열은 더욱 깊어졌다.

 

1878년 6월 빌헬름 1세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났다. 비스마르크는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반사회주의운동을 벌였다. 국민자유당원들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강령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암살자를 지지하는 정당이라는 낙인을 받아들여야 하는 2가지 선택에 몰렸다. 다음해 7월 총선 결과 국민자유당은 의석 30개를 잃었고 비스마르크의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 결국은 비스마르크가 제출한 사회주의자 진압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정치세력으로서의 국민자유당을 단호히 해체할 결심이었다. 1879년 3월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중앙당 당수 빈트호르스트와 화해하고 곧이어 가톨릭교도에 대한 조치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사회주의자가 가톨릭교도들이 받았던 수난을 대신 받게 되었다. 가톨릭 중앙당은 그 기반을 서부 독일 농민에 두었고, 농민은 자유무역이나 자유주의에 모두 반대했다. 중앙당과의 제휴는 보호무역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의 보호정책은 개인의 자유보다도 산업의 자유방임에 관심을 가져온 국민자유당과의 결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책략은 그가 다수파인 국민자유당을 배제했고 또 가톨릭 중앙당을 표결에 참가하는 정도로만 있게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자신이 의지할 정당이 없었으므로 비스마르크는 가끔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었다. '경종'이란 그가 가상의 공포를 만들어 그에 대한 대처 필요성을 앞장서 주장함으로써 선거민의 압도적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878년의 경종은 '사회위기'였다. 그러나 1881년에는 '경종'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기 때문에 1884년 식민지 분쟁이, 1887년에는 외교문제가 생겼다.

 

비스마르크의 사회정책과 외교정책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에 관한 포괄적인 계획을 고안한 유럽 최초의 정치가였다. 그는 노동자를 위한 재해보험법·질병보험법·노령연금법을 제정했다. 비스마르크적인 '사회주의'는 나중에 다른 유럽 여러 나라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혁명적인 사회민주당을 견제하는 무기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국가의 온정주의적 기능을 보여주기도 했다. 1884년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식민지 분쟁에 나서 1년 만에 카메룬, 남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뉴기니아 일부를 획득했다. 비스마르크가 식민지 분쟁에 나선 동기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함부르크의 대무역회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그들을 영국 및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멀리 떨어지게 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1884년의 선거를 대비한 예의 '경종'이 필요했으며 영국과의 적대는 이에 다시 없는 재료라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을 형성하는 데는 식민지에 대한 야심도 한몫 했다. 그는 알자스-로렌을 반환하지 않고 프랑스와 화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비스마르크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프랑스와 이해를 같이한다는 점을 납득시키려고 영국과 분쟁을 일으켰다. 이 정책은 식민지 확장의 주창자인 줄 페리가 프랑스의 총리를 지내는 동안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페리는 1885년 실각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분쟁을 중지하고 곧 식민지에 대한 모든 관심을 포기했다.

 

군사예산으로 의회와 분쟁한 비스마르크

베를린 회의 뒤에 계속된 평화는 1886년에 무너졌고 근동에서는 새로운 위기가 조성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조르주 불랑제 장군이 지도하는 애국운동이 독일에 대한 복수를 선동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위기를 이용해 의회에서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1880년에 통과한 7년제 군사예산도 어느덧 갱신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보당을 포함한 의회의 여러 정당들은 새로 상정된 상비군 확대안에 동의할 용의가 있었지만 3년 기한을 그 조건으로 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에게 분쟁의 구실을 주었고 비스마르크는 고의로 의회와 분쟁을 일으켰다. 1886년 11월 의회는 3년 기한으로 군사예산을 승인했지만 곧바로 해산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보수당·자유보수당·국민자유당을 설득해 '선거 카르텔'을 결성하게 했다. 이 전술은 성공적이었다. 가톨릭 중앙당은 후퇴하지 않았지만 진보당은 의석의 태반을 잃었다. 군사예산은 7년 기한으로 정식 가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스마르크는 의회가 자기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오스트리아-러시아 간 분쟁과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의 진정한 불안은 쉽게 격파할 수 있는 프랑스의 공격이 아니라 발칸 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오스트리아 양국 간의 분쟁이었다 (→ 3국동맹). 1887년 그는 매우 복잡한 술책과 비밀교섭을 통해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양국의 어느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 상대방은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었으나, 독일이 프랑스를,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나중에 이 조약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했으나 조약 갱신에 실패(1890)함으로써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부당한 과장이었다. 러시아는 조약체결 후에도 독일의 정책을 거의 믿지 않았으며 또 1887년에 동맹을 탈퇴한 것은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스마르크의 경제정책 자체가 자신의 외교정책을 망치는 데 한몫을 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곡물에 대한 관세를 높임으로써 러시아의 대토지소유자들에게서 원성을 샀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러시아 공채(公債)를 독일 시장에서 축출했다. 러시아는 이같은 비스마르크의 정책 때문에 프랑스로 접근해갔다.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실각

1888년 3월 비스마르크가 두려워한 파국이 찾아왔다. 빌헬름 1세가 서거한 것이었다.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3세는 선왕이 죽기 전부터 병상에 있다가 겨우 99일로 재위를 마감했다.

 

새로 독일의 황제가 된 사람은 빌헬름 2세(1888~1918 재위)였으나 비스마르크는 그를 조정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아무것도 해두지 않았다. 여전히 비스마르크의 지위는 튼튼해 보였다. 정적으로 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1886년에는 외교문제의 재량권을 얻고자 아들 헤르베르트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헤르베르트는 아버지에게서 격렬한 성격만을 물려받아 비스마르크를 최악의 방향으로 몰아갔다. 그뒤 비스마르크는 마치 1862년에 빌헬름 1세를 그렇게 했듯이 빌헬름 2세를 자기가 조정하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빌헬름 1세보다 뛰어난 정치가였고 비스마르크 이상으로 신생 독일을 이해했다. 빌헬름 2세는 국내문제에서는 공장법(工場法)이나 노동조합의 승인을 포함한 사회개혁정책을 제창했다. 외교면에서는, 러시아와의 우호를 유지하며 오스트리아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는 비스마르크의 신중한 정책을 부인했다. 그 대신 영국과 동맹을 맺고 싶어했으며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고 싶어했다. 또 근동에서 독일경제에 이익이 되는 사업을 대규모로 추진하기를 원했다.

 

비스마르크가 만난 최후의 위기는 그의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1890년 의회가 사회주의자 진압법안을 부결하자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의회 해산에 이은 총선거에서 비스마르크 측의 여러 정당들은 패배했고 반면 진보당,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의 총의석이 과반수를 웃돌았다. 비스마르크는 쿠데타 실행을 제안했다. 제국을 만든 여러 군주가 제국 해체를 선언하고, 보통선거를 폐지하며 의회 권한의 삭감을 포함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그 제안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비스마르크는 황제를 고립시키려고 내각 총사퇴를 호소했지만 그를 지지한 것은 아들 헤르베르트뿐이었다. 1890년 3월 18일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비스마르크의 만년

프리드리히스루에 칩거한 비스마르크는 집념어린 적대자가 되었다. 그는 결코 모욕을 잊지 않았다. 물러날 때 황제가 수여한 라우엔부르크 공작이라는 칭호 사용을 거부했다. 황제는 몇 번이나 화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만년을 황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데 힘썼다. 한편으로 〈사상과 회상 Reflections and Reminiscences〉의 저술에 힘을 쏟았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는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한 사람의 위대한 문학적 천재의 작품이다. 1898년 7월 30일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스루에서 사망했다. 그는 빌헬름 2세와의 싸움을 무덤까지 가져갔다. 그 자신이 지은 묘비명은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었다.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가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천재였으나 건설적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1가지 기본자질, 즉 미래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 1848년의 혁명을 겪은 그는 낡은 질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 확신은 나중에 그의 모든 정책의 틀을 형성했다. 비스마르크는 연장자인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등 근대적 정치세력과도 협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들로부터 위험한 가시를 뽑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위대성은 외교정책에서 가장 잘 발휘되었다. 그는 외교에서 '가능성의 예술'을 이해했다. 비스마르크는 결코 유럽에서 지배를 바라지 않았고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만으로 만족했다. 또 전쟁을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외교에 의지해 풀기를 원했다. 전쟁은 외교에 필요할 때만, 그것도 한정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동맹체제는 유럽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는 비할 데 없이 교묘하게 열강을 서로 반목시키고 거기서 이익을 끌어냈다.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 이후 유럽에 30년간 평화로운 시대를 가져온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A. J. P. Taylor 글 | 郭海銑 참조집필

 

/네이트 백과사전

 

 

“…프로이센은 이미 몇 번이나 놓쳐 버린 기회를 잡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하며, 계속해서 버텨야 합니다. 빈 조약에 따른 프로이센의 국경선은 국가가 건전하게 생존하기에는 부적절합니다. 이 시대의 큰 문제들은 말로 해결할 수 없고, 다수결로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철과 피로만 해결이 가능합니다.” 1862년 9월 30일, 프로이센 의회 예산심의위원회에서 이 연설을 한 사람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이었다. 이로써 “철혈재상”이라고 불리게 될 그의 연설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비스마르크 자신을 포함해서.

 

 

하나된 독일을 위하여!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19세기가 되어서도 중세적인 공국과 백작령 등이 난립한 채로 하나의 국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계몽주의 이념과 산업혁명의 영향은 독일 땅에도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직접적으로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유린하고 그 여파로 1806년에 이름만 남아 있던 신성로마제국이 공식적으로 소멸했으며, 다시 1813년에 프랑스로부터 독일을 해방하려는 전쟁이 벌어지면서 독일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고조되었다. 분열과 봉건의 굴레를 벗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게르만족끼리 ‘통일 독일’을 이룩하며 왕과 귀족이 아닌 국민이 주권을 갖는 국민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식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국제질서를 정리한 1815년의 빈 회의의 결과, 독일 땅에는 35개의 공국과 4개의 자유시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이 탄생했으나 이는 중앙정부도 없고 각 공국의 주권도 그대로 유지되는 이름뿐인 연방이었다.


 

 

 

 

 

젊은 시절의 비스마르크. <출처: Wikipedia>


다만 프랑크프루트에 ‘연방의회’가 설치되었으나, 선거와는 무관하게 각 공국의 군주가 지명한 대표들로 의석이 채워졌다. 게다가 의장은 동맹 내 최대 세력인 오스트리아가 고정적으로 맡음으로써 프로이센 등은 불만이 많았다. 이런 독일연방은 신성로마제국과 별 차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독일계 주민이 우세한 지역에 따라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벨기에와 덴마크의 일부가 연방에 포함된 반면 오스트리아의 절반 이상(헝가리와 세르비아 등), 프로이센의 동부 등은 제외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통일성 면에서는 옛 제국만도 못했다.

 

그리하여 독일을 진정한 하나의 나라로 통일해야 한다, 그리고 낡은 기득권을 없애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체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의 움직임이 1840년대부터 활발하다가, 1848년에는 베를린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 민주개혁적 성과는 곧 퇴색되었으나, 독일 통일의 의지는 권력층에서도 열심히 추구됐다. 그래서 앞서 1834년에 관세동맹을 주도한 이래 북독일 중심으로 통일을 추진하려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와 가장 큰 세력에다 신성로마제국의 후광을 내세우며 자국 중심으로 전 독일이 하나로 뭉치자는 오스트리아의 ‘대독일주의’가 통일의 방식과 주도권을 두고 팽팽히 맞서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 정치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였다.

 

 

 

 

 

쇤하우젠에서 온 사고뭉치


비스마르크는 1815년 4월 1일에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융커, 즉 정식 귀족 작위는 없으나 지방에서 대대로 영지를 세습해온 토호 출신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관료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는 군대 취향과 보수적 성향을, 어머니에게서는 냉정한 합리주의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젊은 그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시를 좋아했다. 그러나 난폭한 면도 있어서,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싸움을 벌여 종종 물의를 빚었다. 괴팅겐대와 베를린대에서 법학을 배우고 법률회사에 취직했으나, 여성들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몇 달 동안 무단결근을 한 끝에 해고되었다고도 한다.

 

법률회사를 그만둔 그는 정치에 뛰어들었고, 거기서 자신의 천분을 찾았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설치한 연합의회 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1847년) 정계에 입문한 그는 보수적인 왕당파의 일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특히 1848년의 3월 혁명 때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라고 왕에게 건의했으며, 왕이 혁명파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히자 “이런 나약한 왕은 필요 없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퇴위하라!”고 극언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왕당파이면서도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특히 오스트리아에 우호적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맞서 소독일주의를 역설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한동안 프로이센 왕실의 미움을 받았다. 그래도 보수파 정치인들의 지원으로 몰락하지는 않았으나, 1859년부터 1862년까지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로 돌며 중앙정치에서 떨어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비스마르크는 국제적 안목을 갖추고, 장차 ‘외교의 달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1861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죽자 동생인 빌헬름 1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도 처음에는 비스마르크를 신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의회에 질린 나머지 보수파의 우두머리 격이던 비스마르크에게 수상 겸 외무부장관을 맡긴다. “철과 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연설은 그가 수상에 취임한 후 일주일 만에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적으로는 협상이 아니라 힘으로 독일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국가적으로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해서 프로이센의 영토를 넓히고 국익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며,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와 자유화의 요구에 맞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를 강화하고, 국민을 전쟁으로 몰고 감으로써 보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뜻이었다.


독일 통일의 세 주역. 왼쪽부터 비스마르크, 론, 몰트케. <출처: Wikipedia>

 

 

 

 

거울의 방에 울리는 “독일 황제 만세!”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의회 다수파의 견제에 시달리는 가운데 군비를 증강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센의 군사력만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으며, 독일을 둘러싼 여러 나라들과의 외교를, 그리고 독일의 민족주의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에는 발칸반도에서 슬라브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오스트리아를 견제할 필요성을,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공략할 필요성을 설득했다. 영국에는 “유럽 대륙에 나폴레옹 제국과 같은 강대국이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 당신들의 관심사가 아니냐? 그렇다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이 강해지는 편이 좋고, 그 중에서도 세력이 더 약한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이 낫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오스트리아와의 대결에서 중립을 지켜 주는 대가로 독일연방 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밀약을 맺었다.

 

이렇게 암암리에 오스트리아를 포위하는 국제구도를 짜는 한편, 오스트리아를 자극하여 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수를 썼다. 1864년의 덴마크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와 협력해서 덴마크를 물리치고 슐레스비히 공국은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차지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의장을 맡고 있는 독일연방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독일헌법을 제정한다는 개혁안을 제출하는 한편, 오스트리아 측의 협정 위반을 이유로 홀슈타인을 프로이센군으로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도록 했다. 예전부터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준비해 왔으면서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를 유도한 것은 “독일 통일을 방해하고 동족을 위협하는 세력은 오스트리아다”라는 인식을 민족주의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으며, 1866년 8월의 프라하조약으로 독일연방은 해체되고,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그리고 하노버가 프로이센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이듬해에 ‘북독일연방’을 조직, 22개의 공국들이 프로이센의 주도권 아래 연합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통일의 남은 걸림돌은 프랑스였다. 바로 이웃에 강력한 통일 독일이 태어나는 것은 프랑스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고, 비스마르크가 밀약을 이행하여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넘기지도 않았으므로 나폴레옹 3세는 남부 독일에 은밀히 힘을 행사해 북독일연방에 추가 가입하는 일을 방해하려 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이를 역이용하여 “독일민족의 염원이던 통일을 프랑스가 방해하고 있다”며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마침내 1870년 7월에 ‘엠스 전보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혁명으로 왕위가 비어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왕족인 레오폴트 공을 국왕 후보로 내세웠다. 이에 프랑스가 강력히 반발하고, 엠스에서 휴양하고 있던 빌헬름 1세에게 베네데티 대사를 보내 이를 철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재발 방지 약속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빌헬름 1세는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전보로 받은 비스마르크는 내용을 적당히 자르고 빼서, 프랑스 대사의 치욕적인 요구에 빌헬름 1세가 분노했다는 뉘앙스를 주도록 바꿔서 언론에 내보냈다. 젊은 시절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에 심취했던 문학청년의 실력이 여기서 발휘되었달까? 이는 비스마르크의 예상대로 독일 여론의 격분을 가져왔으며, 비스마르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세당에서 항복한 나폴레옹 3세와 대화하는 비스마르크. <출처: Wikipedia>

 

 

 

이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작가 중 한 사람인 알퐁스 도데는 [베를린 포위]에서 당시 파리 시민은 하나같이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거뜬히 이길 것으로 믿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몰트케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한 달 내내 프랑스군을 격파했으며, 9월에는 세당 숲에서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한다. 파리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넉 달 동안이나 농성전을 벌였으나 결국 함락되었다. 도데는 프랑스군의 승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노인이 안쓰러워 “파리가 포위당했다”를 “베를린을 포위했다”로 바꿔 말해준 탓에, 그 노인은 프로이센군이 파리에 입성하던 날 프랑스군이 개선하는 줄 알고 환영하러 나갔다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전 유럽이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 오랫동안 수십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었고 근대화에서도 뒤떨어져 있었던 독일이 민주주의, 자유주의, 국민국가의 고향이며 많은 유럽 지식인들의 마음의 조국이었던 프랑스를 그토록 일방적으로 때려 부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근대’의 진면목은 자유와 해방만이 아니라, 관료제 국가의 파괴력과 기계문명의 무자비함이라는 사실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비로소 확실해졌다.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파리 공략을 하는 동안 루이 14세의 영광이 깃든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렀고, 1871년 1월 18일에 북독일연방과 남부 독일 공국들을 합친 ‘독일 제국’ 탄생과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즉위식이 거울의 방에서 열렸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통일이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그 과정의 주역 중의 주역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제국 재상이 되었다. 프로이센 수상에 취임하여 “철과 피에 의한 해결”을 외친 지 8년여 만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열린 독일 황제 즉위식. <출처: Wikipedia>

 

 

 

황제의 충직한 신하, 그의 쓸쓸한 퇴장

독일 통일은 민족주의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조금 앞서 이루어진 이탈리아 통일과는 달리 독일을 포함한 서구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은 이를 그리 열렬히 환영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근대 시민 혁명의 본산인 프랑스를 유린하며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3월 혁명의 주동자들이 꿈꿨던 것 같은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이 아닌,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정복이었기 때문이다. 군사, 외교를 비롯한 많은 권력이 황제의 손에 있었고, 재국재상 이하 내각은 황제에게만 복종했다. 제국의회 중 하원은 시민의 선거로 구성되었으나, 이전의 공국들의 대표자들이며 귀족들이 대부분인 참의원의 힘이 더 막강했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독일 제국의 황금독수리 문장을 바라보며 군국주의와 보수 우익이 판치는 세상을 예상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후에는 예상과는 달리 평화지향적인 외교와 내치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범한 외교적 능력으로 통일의 터전을 일군 그는 이번에는 독일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솜씨를 발휘했다. 사실 서쪽에는 프랑스, 남쪽에는 오스트리아, 동쪽에는 러시아를 두고 있으며 국력을 키우려면 영국과도 경쟁해야 하는 독일로서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1879년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1881년에는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던 이탈리아도 끌어들여 3국 동맹을 맺었다. 한편 발칸 문제를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취지에서 1873년에는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3제 협상을 맺었는데, 이를 1881년에 3제 동맹으로 보강했다. 여기에 1887년에는 영국까지 끌어들여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의 3국 협정을 주선하고 같은 해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의 지중해 협정을 수립했다. 이처럼 그물망처럼 얽힌 동맹관계에서 일부 국가들(가령 영국과 러시아)은 서로 불편한 입장이기도 했으나 어떻게든 독일은 안전을 확보하고, 프랑스는 소외되는 식으로 국제질서가 짜였다. 이런 틀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약 40년 동안 독일은, 그리고 유럽은 전에 없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 해임의 풍자화(왼쪽), 만년의 비스마르크(오른쪽). <출처: Wikipedia>

 

 

 

 

내치면에서 비스마르크는 1872년부터 ‘문화투쟁’을 벌여 교육과 정치계에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을 몰아내고 국가 중심의 국민교육체계가 정립되도록 했다. 또한 중앙은행을 창립하고 통일 민법과 상법을 마련했으며, 라이프치히 고등재판소를 설치해서 통일 후 10년도 되지 않아 제국이 하나의 국가로 정비될 수 있도록 했다. 또 보호무역주의 정책과 간접세 위주의 세제로 독일의 산업자본을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한편 그는 세계 최초로 사회보장제도도 실시했다. 사회주의자들을 벌레처럼 여긴 그로서는 의외의 조치였으나, 그것은 수익자부담 원칙을 강조하고 국가는 최소한의 보조만 해주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에 못 이겨 빨리 소모되는 것을 막기 위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프로이센 수상이던 시절에는 자유를 요구하는 민의를 가차없이 묵살하는 융커 출신 보수정객으로 인기가 최악이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국민적 영웅으로 널리 존경 받았다. 정치인으로서는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얻은 정치인이 아닌 봉건제국의 재상과 같은 그였으므로, 빌헬름 1세가 1888년에 죽고 야심만만한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본래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가 2대 황제로 즉위했으나, 99일 만에 숨지고 그의 아들인 빌헬름이 이어받았다) 그의 정치인생은 인기와는 상관없이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에 해당되던 빌헬름 2세는 영국에 우호적이었던 반면 러시아에는 적대적이었고,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의 동맹을 갱신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세심하게 짜놓은 외교의 그물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동유럽에서 중동을 잇는 영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적극적인 팽창에 나서려 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1890년에 사임해야 했으며, 말년은 회고록을 집필하며 조용히 보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여기 빌헬름 1세의 충직한 신하가 묻혀 있다”라고 새겨달라고 했는데, 자신을 버린 젊은 황제에게는 충직한 신하이고 싶지 않음을 표현한 것일까. 이 ‘충직한 신하’의 걱정대로 빌헬름 2세의 정책은 숙적 프랑스와 러시아가 접근하여 양쪽에서 독일을 압박하는 구도를 초래했다. 그리고 복잡한 동맹관계의 매듭이 묘하게 뒤얽히며, 독일 제국은 세계대전을 거쳐 4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안고 있었던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철과 피”에 의존하는 제국은 합리적인 틀에 언제까지고 묶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 추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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