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한의 어르신들이 주로 하는 말은 "일제시대에도 이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대놓고 이런 말을 하면 보위부에 끌려가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친지나 주변 사람들에게만 터놓고 이런 사실들을 이야기한다.
지금 북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과거와 유일하게 대비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일제(日帝)시대다. 한때 한국영화 '장군의 아들'이 북한내부에서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김좌진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아들 김두한이 종로바닥에서 활개 치며 다녔다는 사실이다. 항일투쟁은 김일성 혼자서 다 한 것으로 돼 있는 북한에서 김좌진 장군을 소개할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그의 아들인 김두한 은 더 알 수가 없다.
만약 일본군대를 몰살시킨 장군이 아들이었다면 당연히 삼족을 멸해 수용소에 끌어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일제 강점기에도 장사는 마음대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제외한 일반 주민들의 거주 이전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여행 또한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생활수준도 비교 대상이 된다. 일제 말기때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를 벗겨 송기를 먹었다는 증언들이 있는데 아무리 일제시대라고 해도 진흙을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북한에서 주변 소나무는 이미 다 벗겨먹어 사라진지 오래됐고, 풀뿌리와 벼뿌리까지 갈아서 먹는 것도 모자라 니탄이라는 부드러운 진흙까지 먹게 된 것이다.
굶어서 300만이 죽었다는 사실은 일제시대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 사람들이 가장 치를 떠는 것은 보위부 감옥에서의 사람 잡는 고문이다.
그야말로 사람을 잡는다고 할 정도로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손끝에 바늘을 찌르고, 죽어야 할 정치범은 손과 발의 힘줄을 끊는다고 한다. 고문의 기술도 너무 다양해서 일제시대의 고문기술을 더 확대 발전시켰다는 농담까지 있다. 그래서 보위부 감방에서 3개월을 넘긴다는 것은 거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김정일 정권은 남한을 비방할때 안기부 남산지하실에서는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빼고 다한다고 선전하지만 이제 북한인민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보위부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너무 험악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혁명전사라해도 보위부 감옥에서 절개란 있을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불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끔 그런 고문에도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켜 혼자서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죽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다. 친구들에게는 영웅이지만 당국이 알면 함께 역적이 될 수 있다.
로버트 박이 감히 이런 보위부의 벽을 뚫고 북한인민에게 자유를 전하려고 북한에 들어갔다. 그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때려도 북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에 10분의 1도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북한으로 들어가기 전 로버트 박 선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교자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은 현 시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북한 정권의 한 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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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당당하던 로버트 박 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해체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하야를 촉구하는 편지를 품고 당당하게 북한에 들어갔던 로버트 박(28·한국명 박동훈)이 북한에 억류된 지 43일 만에 풀려나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로버트 박은 탈북자들과 북한 인권을 위해 기도할 때 항상 격앙돼 있었고 김정일의 만행에 치를 떨었었다. 그랬던 그가 북한에서 나올 때에는 전혀 딴 사람처럼 풀이 죽은 모습이 돼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로 기자들의 질문에 한 마디도 답변하지 않았던 그는 미국에서 부모를 만난 뒤에야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토록 변했으며 북한 주장대로 로버트 박은 북한 당국에 사과했을까.
로이터·연합뉴스 한 고위탈북자는 "북한에서 벌어지는 소위 '기자회견'의 99%는 고문과 회유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했다. 대남(對南)사건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은 국가안전보위부가 조사를 벌인다.
보위부의 심리전 부서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고도의 폭력적 고문에 의한 공포와 회유를 반복하면서 굴복할 때까지 잠도 안재우며, 끝장을 볼 때까지 지속하는 수법을 쓴다고 한다.
그는 로버트 박이 일반 북한 주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공포를 받았지만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에 북한에서 아무리 약한 축에 드는 고문도 자유세계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일제 고등계 형사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북한 국가보위부의 고문실과 취조실은 한번만 경험해도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 안에는 천하의 강심장을 가졌다고 평가받은 이들도 포함된다.
북한 주민들은 '보위부 지하감방'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고 한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행들이 그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보위부가 조사를 끝내면 그 다음에는 3호청사(대남부서)에 이관된다.
이미 보위부에서 넋이 나간 상태여서 만들어진 각본대로 읽거나 그대로 연출하기만 하면 된다. 조선중앙TV기자 출신인 장해성씨는 예전 평양에서 근무할 때 납북어부들의 날조된 기자회견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기자회견장에는 대남부서 요원들이 꽉 차있었고 철저하게 각본대로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일부 납북어부가 써준 것도 제대로 읽지 못해 엉뚱한 말을 하자 바로 요원들이 난리를 쳤다고 한다.
1987년 1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납북된 동진호의 귀환 문제가 남측과의 첨예한 신경전으로 번졌다. 북한은 이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선원들 대부분이 남조선 귀환을 거부하고 있다"는 어부들의 인터뷰를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했던 어로장 최종석씨는 북한의 강요로 TV에 출연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었다. 이 모두 고문과 회유에 의해 강제로 자행된 것이었다.
2000년 6월 북한에 있는 부인과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자진월북했다가 국가보위부에 체포돼 처형설에 휘말렸던 유태준씨의 2001년 6월 평양 기자회견도 날조와 조작 그 자체였다.
북한에서 보위부에 체포된 유씨는 최악이라는 청진 수성교화소에 수감됐었지만 인권단체들은 그가 처형된 것으로 믿고 진상규명을 북한에 요구했다. 이것이 국제 이슈가 되자 유씨가 중앙방송에 출연해 기자회견을 하게 됐다.
당시 유씨는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해 '안모 년'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썼고 외삼촌과 동생을 '놈'으로 표현했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을 하나같이 '인간쓰레기'라고 욕하며 열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씨가 기적처럼 다시 재탈북에 성공하면서 그가 형언할 수 없는 고문과 공포 속에서 당국이 써준 각본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지금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강철환 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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