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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2.05.22. 주일예배 <히브리서 12:1-2. 예수를 향한 경주.>

by 설렘심목 2022. 5. 26.

2022.05.22. 주일예배 <히브리서 12:1-2. 예수를 향한 경주.>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에 의하면 역사는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새롭게 써져 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된 소수, 순종하는 소수에 의해 복음운동은 계속되고 복음은 교회를 세워가며 교회는 세계역사를 주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수의 헌신된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하여 세계사는 새롭게 기록되어 갈 겁니다. 그런데도 인류의 역사가 피와 굶주림과 전쟁으로 얼룩지는 건 여기가 결코 천국이 아니라 아직도 구원이 진행 중인 심판받을 세상, 오직 예수만이 소망인 그런 악한 세상이라는 증거입니다. 세상의 온갖 혼탁과 오류는 오히려 세상으로서는 정상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8:19)” 어그러진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세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겁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예수를 향한 경주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께 집중하여 달리자. 또는 예수만 소망하며 나아가자 그런 말입니다. 왜 예수가 세상의 마지막 소망이며 어떻게 그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인가? 먼저 왜 주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가를 살피는 중 함께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1.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우리 인생을 경주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경주란 항상 경쟁자가 있고 여럿이 하되 등수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석차에 따라 상급과 대우가 다릅니다. 우리들의 경주는 목표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왜 목표가 예수여야 하는가? 우리가 다 온전(穩全)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고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온전치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갚아주신 예수 앞에 나아가는 것만이 죄로 무너진 온전함이 회복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회복돼야 하는 온전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1)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6:3절을 봅니다.“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에덴에서 아담을 쫓아내신 후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인간들에게 그래도 하나님은 종종 나타나셔서 제사를 받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번창해가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불신 결혼하며 패역한 자손을 퍼뜨려가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사람 곁을 떠나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라져버린 것은 첫째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아가페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이 곤란하고 힘든 일을 당해도 그것이 사랑하는 이를 위한 것이라면 그 고통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에게는 부모에게서 엿볼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뭣보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끝없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오기 전 에덴의 모습입니다.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며 진정한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면 이런 삶을 우리가 받게 됩니다. 거듭남, 곧 중생의 체험은 이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2)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찾지도 않습니다. 죄인의 신분으로는 만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4:12)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드려 인류의 모든 죄를 청산하신 예수를 믿고 그를 통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예수께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돼 주신 겁니다.

 

교통, 서로 통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통하면 모든 것과 통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 이뤄진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온전케 되는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한 경주가운데 성취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경주입니다.

1절을 함께 읽습니다.“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본문은 보다 양질의 경주를 하기 위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1) 승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2:15절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승리하신 메시아, 우리 주님을 믿되 생명을 걸고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생명 건 믿음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믿음 외에도 이 믿음이 아니고는 차라리 죽음이 좋겠다는 결단까지 말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믿음이 승리의 주님을 믿고 우리도 주를 따라 세상을 이긴다는 굳센 믿음을 이루게 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 바랍니다.

 

2)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본문 1절에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권유합니다.

첫째, 달리는 자에게 무거운 체중은 치명적입니다. 올림픽 육상경기에선 신발끈조차 없는 신을 신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뛰는데 짐이 된다면 떼어냅니다. 예수님을 향해 달려갈 때 방해가 되는 게 우리에겐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은 달콤하게 속삭이며 교회가는 길을 자꾸 막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 아담 이후 그렇게 하나님을 훼방하고 교회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갖가지 술책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방해가 아무리 심하고 못된 악당이라고 해도 내가 쳐다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죽기로 작정하고 결단한 사람을 못 당합니다. 예수 위해서 죽기로 하면 필경 그는 주님이 함께 하셔서 놀라운 결론과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본문에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무거운 것에 이어 다음 두 번째는 얽매이기 쉬운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먼저 내가 지은 죄는 말 그대로 내가 다 승인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무지하면 벌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지혜로우면 죄를 두려워합니다. 인간이 정작 두려워할 대상을 바꿨습니다. 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죄를 두려워하는 성숙이 말씀 듣는 가운데 이뤄지기 바랍니다. 이는 다 Coram deo-神前思想, 24시간 단 일분일초도 주께서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139:8절입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밤이나 낮이나 죽으나 사나 주님은 늘 변함없이 우리 곁에 계시는 줄 우리가 믿고 압니다. 안 믿거나 모르는 사람은 우리 중에 없습니다. 단지 잊고 사는 겁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죄는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표가 크게 나는 죄에는 우리가 잘 빠져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죄에 그만 쉽게 빠집니다. 그런데 그 작게 보이는 죄와 유혹이 나를 망치게 합니다. 이건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생물 바이러스가 온몸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또 매우 절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뿌리치기 힘든 것들로 접근합니다. 딱 한 번이 전 인생을 흔들게 됩니다. “다들 하는 건데, 이번 딱 한잔만, 이번 딱 한번만, ”이 딱 한방이 자신을 날려 버리는 줄 사람들은 공중분해가 된 뒤에 알게 됩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번 딱 한 번만 하고끝내자는 유혹입니다.

 

고대 태국 샴나라에서는 코끼리를 신성시해서 섬겼는데 그 중에도 흰 코끼리에겐 특별한 예우를 했습니다. 그런데 왕에게 밉보여서 파멸시키기로 작정한 가문에는 흰 코끼리를 선물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처음엔 황송하고 감사하지만 남도 못 주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이 코끼리를 양육 관리하는데 모든 재산이 다 들어가 결국 그 집은 망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탄이 개인이나 가정을 무너뜨리려고 이렇게 사람 눈에 보기 좋고 달콤한 것을 선물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좋아 그것 외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허송 세월을 보냅니다. 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게 예수를 향해 달음질하는 선한 경주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본문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제시하며 밝힙니다. 다시말해 오직 믿음으로 승리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흰옷입은 순교자들이 천국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너희도 증인들처럼 무거운 것과 죄와 싸워 반드시 이기라는 겁니다.

 

3) 인내해야 합니다.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의 삶에 있어서 모든 표준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돼야 합니다. 그것은 최고의 선입니다. 사랑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희생과 섬김을 바탕으로 한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면 주님처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인내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혹독한 고난을 참고 이기실 때 분명한 목적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고난 후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그 영광과 비교할 수없다고 롬8:18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롬5:3-4절에서 증거합니다. 곧 인내는 뭔가 분명한 소망이 제시될 때 어렵잖게 이뤄집니다. 주님에겐 영생의 부활과 그를 통한 죄인구원이 인내와 희생의 근거였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늘 듣던 말씀이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였습니다. 그래서아이들이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미덕인 줄 알고 어지간히 아픈 건 말하지 않고 참았습니다. 뱃속에 회충을 키우고 입안에는 충치를 키우며 살았습니다. 참지 말아야 할 걸 참는 건 악을 방치하고 키우는 겁니다. 성도의 인내는 거룩을 이뤄갑니다. 예수이름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난이 종종 천국을 이루어 가지만 분연히 일어설 때는 생명을 걸고 불의와 싸워야 주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참을 때 참고 나설 때 나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에 첫째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18:20)”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 헌법에 나오는 대,소요리문답 첫 질문입니다. “사람의 첫째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사람은 바라보는 대로 바뀝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향해 달려가다가 예수닮은 인생됩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삶을 사세요. 하나님의 형상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예배때 들어오는 하나님음성 가슴에 담으셔서 그대로 행하셔서 전인격적 고백과 믿음이, 그래서 모든 삶이 주님께 칭찬을, 이웃에게는 존경받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