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5.주일예배<전7:13-14. 기뻐할 때와 돌아볼 때>
사람이 권력이나 재물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그것 외에 딴 걸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볍게 대하거나 무시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물론 잘못된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갈 때 비로소 모든 식견이 정상적인 기능을 갖게 됩니다. 생명이 자기존재의 근원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받는 본문 잠언 7장은 지혜자의 말을 들으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여전히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전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바로 살아가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혜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의 귀한 믿음으로 지혜의 왕이 돼 하나님이 주신 큰 복을 받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와 권세가운데 능력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에게 그들도 자신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살아갈 것을 간곡히 권유하며 본 전도서와 잠언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1.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2.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섞어서 주심으로 인생을 인생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3. 맑은 날엔 기뻐하되 그 기쁨의 뿌리를 찾고 흐린 날엔 되돌아보라는 겁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최고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종종 듣는 이 말씀은 모든 죄인에게 놀랍게도 평강을 보장하시는 권세입니다.
본문 13절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곧게 하겠느냐?” 주님이 구부리면 펼 자가 없고 펴면 구부릴 자가 없다는 건데 사22:22절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막을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자유자는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원문에는 “나는 네가 말하는 바로 그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누군가 불러주기 위해 있는데 하나님은 불러줄 아무도 없는 무 상태에서 혼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사랑이셔서 사랑하실 대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어떤 높은 존재도 없고 영광도 없습니다. 가장 귀한 분이시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하신 분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그분의 절대 막강의 주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주권으로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 줄 믿으십니까? 예배가운데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소리마다 주님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있기 축복합니다.
2.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14절 하단에는 “형통과 곤고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중국 고사에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은 어느 노인의 아들과 그 집의 애마를 통해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교차를 보며 인생만사를 단편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조언합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신 건 하나님께서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면 이야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은 실제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을 염려하고 불행의 실체보다 오지도 않을 불행을 두려워하는 일에 너무 많은 힘을 뺀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없는 걱정거리 만들어하는 인생들인데 미래를 안다면 오죽하겠습니까? 온전할 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면 내가 보여서 내 밝은 앞날의 확신도 갖게 됩니다. 그 앎이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주술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미래는 우리가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신실하신 주님이 늘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영원불변한 사실입니다. 그거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롬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분의 인도는 우리의 부족까지도 다른 일들과 합하여 선한 결과에 이르는 줄 우리가 경험했고 믿습니다.
3. 곤고의 유익은 겸손히 살피게 합니다.
본문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고 합니다. 형통은 일이 잘 풀리는 걸 말합니다. 형통할 때 성경은 기뻐하라고 합니다. 기쁨을 느끼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 기뻐하면 돈이 사라질 때 기쁨도 사라집니다. 건강으로 기뻐하면 건강이 사라질 때 기쁨이 사라집니다. 명예로 기뻐하면 명예가 사라질 때 기쁨도 사라집니다. 기쁨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는 저와 여러분이 매우 신중하게 받아야 할 환경을 이기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건강 주시고 명예 주시고 물질 주신 분이 누구냐는 겁니다. 본문은 그 기쁨과 행복의 원천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행복이 믿음 깊은 곳에서 시작돼 확정됨으로 언제 뭘 만나도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걸 열어주시고 허락하신 우리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거 언젠간 다 내 곁을 떠나겠지만 그것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로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축복합니다.
이렇듯 형통한 날에 기쁨의 근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찾는 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깊이 되돌아봄으로 낙심을 피할 수 있습니다. 곤경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이 불행한 일에서 하나님은 지금 내게 뭘 원하시는 걸까? 이 곤경으로 얻게 될 삶의 귀한 교훈은 무엇인가? 어떻게 기도해야 이 곤고한 날이 속히 지날 것인가? 그래서 제가 본문을 다시 바꿔서 전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형통하게 하신 주님을 기뻐하고 힘들 때는 이 곤경을 통해 주실 만가지 복이 무엇일까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시는 복의 근원 주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3:1절 말씀처럼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인 예수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떨리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겁니다.
고후4: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증거합니다. 즉 순간의 환난을 씨로 심어 영원한 생명을 거두는 것이며 가벼운 걸 심어 영광의 중차대한 것을 얻어내는 게 곤고와 환난의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여기서 선과 악은 믿음의 있고 없음의 문제를 번역한 겁니다.
천로역정을 써서 깊은 감명을 준 존번연은 가난한 용접공의 아들로 태어나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12년간이나 옥살이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보초를 서다가 볼일이 있어서 친구에게 보초근무를 대신 맡기고 마을을 다녀왔는데 와보니 친구가 적의 총을 맞고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 대신 죽은 친구를 보고 번연은 심한 고통 중에 이 상처가 훗날 12년 세월, 감옥 안에서 천로역정을 쓰게 된 동기가 됩니다. 그는 많은 영적 번민과 방황을 했고 그것은 작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성경책 한 권을 들고 처자를 떠나 멀리 가는 주인공은 멸망의 거리, 죽음의 계곡, 의심의 성, 허영의 도시, 실망의 수렁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소망의 강을 건너 하늘의 도시에 다다릅니다. 이 불후의 명작을 통해 실로 많은 영혼이 각성하고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주께서 많이 사랑하시는 여러분. 고난은 받기에 따라 매우 유익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반면 돌아오지 않는 손실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든 형통이든 하나님께 연결하지 않고는 어떤 답도 구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열거하는 모든 믿음의 선지들은 한결같이 연약하여 실수하고 수치를 당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승리를 일구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우리에겐 승리할 권세가 없습니다. 승리하신 주님만 계실 뿐입니다. 순종하는 우릴 기뻐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고 저와 여러분을 통해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만큼 승리하고 믿음만큼 약속은 이뤄질 겁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귀하고 복된 일이 일어납니다. 아멘. 아멘대로 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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