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7. 부활 시리즈설교 요점총정리.
2022.02.13.요20:1~10. 부활의 현장.1/5. 빈 무덤.(찬154장)
마귀가 왜 예수 피에 진저리를 치며 달아나는가? 그렇게 피흘려 죽기까지 우릴 사랑하신다는 증거고 그 피는 분명 죽음의 증표요, 이 증거는 부활의 역력한 과정이라 누구라도 부활의 권세와 능력 앞에 어떤 핑계나 협박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마귀에게 당하는 건 마귀의 협박 앞에 뚜렷한 구원의 증거를 대지 못해서입니다. 예컨대 둘이 싸우다하나가 고성능 무기로 협박하는데 그 무기를 단번에 멈추게 하는 리모콘을 누가 손에 쥐어준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예수 외에도 많은데 우리 주님은 그들과 달리 피와 물이 남김없이 빠져나와서 의학적으로 전혀 소생의 가능성이 없는 상태입니다.
요19:34절에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로마군이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1서 5장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으면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며 “예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시되 증언하는 이가 성령과 물과 피”인데 ‘성령은 진리’며 ‘성령과 물과 피는 합하여 하나’라고 증거합니다. 이 구절로 왜 예수보혈이 구원의 증거인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예수가 분명히 죽었다는 것이고 다음,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야 함을 역설하고 마지막 이 모든 사실을 증언하는 이가 성령 즉 예수 자신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죄로 죽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희생제사의 양으로 죽었다는(제사->예배 / 율법->은혜) 기초적이고도 역사적 실제 사건부터 분명하게 믿을 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을 받아들이면 이제 부활신앙의 출발은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믿고 내 것이 되어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분명하게 전하는 메시지가 돼야 합니다.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들려줘야 하는 생명의 메시지가 되면 여러분은 청중이 아니라 강사가 됩니다. 청중은 졸아도 강사는 졸지 않습니다. 강사가 청중보다 피곤하지 않고 힘찬 인생을 가게 됩니다.
2022.02.20.요20:11~23. 부활의 현장. 2/5. 닫힌 문들을 지나 오심.(찬154장)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부활의 현장은 매우 흥미롭고 신비로운 5개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1. 12절에 나타난 두 천사의 모습입니다.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2. 17절에 “날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노라”고 하십니다.
3. 문이 겹겹이 닫혔는데 그 문들을 통과해 제자들에게 오시는 놀라운 2개의 장면입니다.
(1) 부활 후 첫날 저녁때
20:19~20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 여드레가 지나서의 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4. 누가복음 24장 41~43절에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구운 생선을 청해 드시는 장면에 이어 다섯 번째는 눅24:19절에서 주를 알아보지 못하던 두 제자가 30~31절에서 떡을 떼어 축사하신 후에 주님인 줄 알았는데 주님은 사라져 보이질 않는 장면입니다.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5. 요20:22~23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과 죄사함의 권세를 주시는 장면인데 여기서 죄를 용서할 수도, 또 그대로 놔둘 수도 있다고 하시는 특별한 내용입니다. 대단한 구절입니다.
경찰공무원 하나만 알아도 든든합니다. 시청공무원이 친척에 있으면 모든 행정절차가 간단합니다. 땅에서 잠시 불편해도 우리에겐 하나님이라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뭐든 일사천리로 도우시는 창조주께서 친히 ”내가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뿐 아니라 여기 땅에서도 그 후광과 권세의 힘과 평강을 충분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천사도 보내시고 친히 십자가에 오르시고 지금 우리 안에 늘 계신 하나님, 우리가 알아드리고 믿어 기뻐 맞으면 함께 하시는 주님, 뭐든 우리가 간절할 때 채우시는 주님, 우리의 아빠, 아버지십니다.
2022.03.06. 요20:17-23. 부활의 현장 3/5.
부활시리즈 세 번째 시간입니다. 누군가 엄청난 현장을 보고 놀라 이웃에게 전했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며 믿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면 참 답답해서 힘들고 외롭기까지 해 아마 가장 가까운 이에게 너만은 믿을 거라며 하소연하게 될 겁니다. 전 어려서 가마솥 뚜껑이 그 솥 안에 들어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걸 가까운 어른이 보고 휘둥그레 제가 전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초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인 사건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놀라운 부활의 현장에 와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확인해 이걸 몰라 어둠을 헤매는 이들에게 전할 때 가마솥 안에 들어간 솥뚜껑을 본 사람처럼 답답하고 외로워 속이 타고 어쩔 줄 몰라 주일 하루만은 예배로 이 놀라운 사건을 감동하자는 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11:1절 말씀은 참 감동입니다.
(시간관계로 중략)
2022.03.13. 요20:19-31. 부활의 현장 4/5
오늘은 17절,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곧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을 살핍니다. 몸의 위치, 곧 아들 성자의 위치에서 하시는 말씀인데 왜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까? 최존의 예우로 엎드려 발을 두 손으로 감싸고 엎드리려는 제자를 말리신 점은 해석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아마 부활주님의 몸이 우리와는 다른 뭔가 있어 그 부분이 세간에 전해질 때 유익하지 못한 점이 퍼져나갈 것을 염려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은 가능합니다. 이 부분도 거기까지여야 합니다.
그리고 붙잡지 못하게 한 그 몸이 19절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닫힌 문들을 통과해 두려워 떠는 제자들 가운데에 떡하니 서시는 장면은 그야말로 감동이며 우리의 소망입니다.
19절 눈으로 봅니다.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닫힌 문들을 통과해 들어오셔서 첫마디가 샬롬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가능한 샬롬이라는 평화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인가? 우리도 곧 잡혀 잔인한 방법으로 가족과 함께 처형될 거란 공포입니다. 메시아라고 믿고 따라다녔는데 시시각각 다가오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는 아무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절망입니다.
복음은 뭘까? 복음은 가장 절실한 것이 해결된다는 소식입니다. 언젠간 반드시 죽는다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사는 인간들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는 소식은 그 이상 없는 복음입니다. 세상을 죄와 악에서 구한다는 구원주, 메시아의 소식이 복음이란 겁니다. 이 복음의 주체가 복음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실체를 눈으로 보게 하시며 하시는 첫 마디가 샬롬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몸이 어떤 몸입니까? 닫힌 여러 개의 문을 그냥 통과해 오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과 본질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건 뭘까? 대부분 유체이탈식 해법인데 아닙니다. 눅24:39절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몸으로 생선도 드셨습니다. 신비한 현장에서 제자들은 너무 놀랍고 기뻤습니다.
닫힌 문을 통과한 몸이 말해주는 진리의 핵심은 그런 초과학적 현실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제대로 믿는 성도에게 부활은 죽어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도 닫혀 있는 답답한 문들이 부활 주님과 동행하면 넉넉하게 통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린 죽으려고 늙어가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 늙고 병들어 떠나는 겁니다. 늙는 걸 서글퍼 마세요. 아쉬운 게 있습니까?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놀라운 게 기다리고 무엇보다 억울하고 슬펐던 일 주님이 다 보상하십니다. 자신을 자꾸 타이르세요. 그렇게 세상과는 다르게 갑시다.
2022.03.20. 요20:17-23. 부활의 현장. 5/5
씨가 땅에 묻혀 햇볕을 받으면 생명 시간표를 따라 씨는 뿌리를 뻗어 덮고 있는 흙을 헤치고 나옵니다. 이 힘은 큰 바위도, 건물도 쪼개는 힘으로 올라옵니다.(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바위) 그리고 줄기와 잎과 가지를 펴고 봉오리를 맺어 꽃을 피웁니다. 이걸 설명할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이 일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가능한지 아무도 모릅니다. 부활뿐 아니라 만사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이렇듯 신비한 만사를 우리는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아주 태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이 된 신비 속에 살아갑니다. 이게 신비입니다. 놀랄 일에 놀라지 않고 태연한 거, 참 신비한 일입니다.
저속촬영은 이 모든 눈속임의 신비를 한마디로 설명합니다. 며칠 걸리는 발아와 줄기, 잎의 성장을 10초 미만에 보여줍니다. 즉 시간이 개입하면 일상이고 시간을 빼면 기적이라고 보는 착각입니다.
시간과 공간, 시공에서 자유로운 분은 안보이는 하나님 뿐입니다. 예수님이 문들을 통과해 오신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행하신 권능입니다. 언제나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 가능합니다. 영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잠시 입으셨던 주께서 시공을 초월해 제자들에게 닫힌 문들과 무관하게 나타나신 일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일러드렸듯이 제자란 뒤따라가는 아우들입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아우가 형을 따라 그대로 할 때 그것을 제자라고 합니다. 주께서 그런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그와 같은 몸으로 다시 살아 영원히 산다는 사실, 이건 너무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닫힌 문을 통과한 주님은 부활 후의 주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부활 전에 주님은 여러 기적을 보이셨지만 닫힌 문을 통과해 오시진 않았습니다.
2022.04.10. 주일설교 (행7:55~56. 스테반집사가 본 하늘보좌.)
주께서 자신을 보이신 시점이 스테반 순교직전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했다고 적혀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이 스데반에게 가득했다는 겁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전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하늘나라로 가기 직전에 본 주님의 모습을 56절에 “하늘이 열리고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합니다.
첫째 스데반의 눈에 분명히 열린 하늘이 보였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인데 이는 아무에게나 흔히 보이는 장면이 아닙니다. 매우 특별한 경우 특별한 이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있는 그대로 죽음조차 두려워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전하는 이에게 열렸습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전하기에 용감한 사람, 하늘 문을 열어 남이 못 보는 걸 보게 된다는 게 본문 교훈입니다.
실존하는 천국보좌를 본 스데반의 전도설교와 순교,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에겐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하늘에서 우릴 지켜보고 계신 주께서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그리고 하늘문은 언제나 믿는 이에게 열려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 그것은 죽어야만 시작되는 위대한 사건이다. 일곱살 어린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힘껏 부활에 집념하던 말러의 악보에 적혀있던 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전, “이제 떠납시다. 난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다는 유대격언은 언제나 마사다를 떠올립니다. 죽음과 관련된 어떤 말보다 스데반의 마지막 말은 매우 직설적 증언이라 주목할 만합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기도합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열린 문을 찾기가 어려운 험한 인생길, 주님만이 길이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바라봐도 보이지 않고 열리지 않는 하늘문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탓인 것도 이제 압니다. 오늘 닫힌 인생의 문과 하늘의 신비한 문은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 다시 부활함으로 가능하단 것을 알게 하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인생이 어려운 게 아니라 자신을 이기지 못해 어려운 길을 가는 우리에게 주여, 자비한 손을 더하셔서 주님 살아계셔서 우릴 불쌍히 여기시는 증거를 늘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아침을 여셔서 호흡이 찬미가 되게 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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