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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2.02.13~04.10. 요20:1~10. 부활의 현장. 시리즈설교 1~5. 빈 무덤.

by 설렘심목 2022. 4. 10.

2022.02.13~04.10. 요20:1~10. 부활의 현장. 시리즈설교 1~5. 빈 무덤.(찬154장)

평생 부활의 현장에서 살기를 축복합니다. 몸은 비록 진흙판에서 상처투성이로 살아도 영혼은 구원받은 증표로 늘 맑고 신선하여 마귀가 감히 넘보지 않는 성도의 삶은 언제나 부활의 현장에 있습니다.

마귀가 왜 예수 피에 진저리를 치며 달아납니까? 그렇게 피흘려 죽기까지 우릴 사랑하신다는 증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는 분명 죽음의 증표요, 죽은 증거는 다시 사신 부활의 역력한 과정이라 누구라도 부활의 권세와 능력 앞에 어떤 핑계나 고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마귀에게 당하는 건 마귀의 모함과 참소 앞에 뚜렷한 구원의 증거를 들이대지 못하면서입니다.

“예수가 너와 무슨 상관이 있어?” “넌 네 착각 속에서 속고 있는 거야” “너같이 못난 죄인이 무슨?”

갖가지 술수에 넘어가 절망하게 되면 마귀는 더 큰 속임수로 우리를 절벽으로 떨어뜨립니다.

이때 절실한 게 뭡니까? 주변에 잘 아는 유력한 자나 돈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날 대신해서 죽어주실 만큼 날 아끼셔서 십자가에 오르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들이대야 합니다. 그게 너무 당당해서 마귀를 가소롭게 여겨 헛웃음이 나오는 자신감, 이걸 마귀는 무서워합니다. 즉 당당한 우리의 믿음을 마귀가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본문 1절서 10절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봅니다.

 

(요약) 안식 후 첫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걸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하되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어요”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나가서 무덤으로 둘이 달려갑니다. 젊은 요한이 뚱뚱한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도 봅니다. 죽어 누워있을 주님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모릅니다. 다 보고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지금까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예수 외에도 많습니다. 분명한 건 그들은 모두 피가 남김없이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로 심장이 멈춘 사망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과 다릅니다. 피와 물이 남김없이 빠져나와서 의학적으로 전혀 소생의 가능성이 없는 상태입니다.

심장에서 피가 완전히 다 빠지면 마지막에 연한 담갈색의 액체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생명은 다시 회복이 불가하다는 게 전문가의 결론입니다.

 

요19:35절에 로마군이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1서 5장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으면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며 ‘예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시되 ‘증언하는 이가 성령과 물과 피’인데 ‘성령은 진리’며 ‘성령과 물과 피는 합하여 하나’라고 증거합니다.

찬찬히 살피면 왜 예수보혈이 구원의 증거인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예수가 분명히 죽었다는 것이고 다음,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야 함을 역설하고 마지막 이 모든 사실을 증언하는 이가 성령 즉 예수 자신의 영이며 이는 물 곧 죄씻음과 피 곧 대속죄로 죽었다는 증거로 새생명의 근거가 되는 예수 피의 본질, 끝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이 셋이 하나라는 것은 곧 사랑은 죽음까지 결단하는 희생인 점을 십자가에서 증거한 걸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죄로 죽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기초적이고도 역사적 실제 사건부터 분명하게 믿을 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을 받아들이면 이제 부활신앙의 출발은 완성됩니다.

팁 하나를 드립니다. 이 놀라운 소식이 듣는 데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알고 믿어 내 것이 되어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분명하게 전하는 메시지가 돼야 합니다.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들려줘야 하는 생명의 메시지가 되면 여러분은 청중이 아니라 강사가 됩니다.

청중은 졸아도 강사는 졸지 않습니다. 강사가 청중보다 피곤하지 않고 힘찬 인생을 가게 됩니다.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자신과 마귀가 갖가지 힘든 환경과 악한 마음을 주며 참소할 때 주님의 빈 무덤을 당당하게 소리쳐 증언하며 승리하게 하소서. 보잘것없은 히브리의 능력과 권세는 우릴 위해 죽으신 주님의 이름인 것을 인하여 생명이라도 드려 감사하나이다. 아멘.

 

2022.02.20.요20:11~23. 부활의 현장. 2/5. 닫힌 문들을 지나 오심.(찬154장)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부활의 현장은 매우 흥미롭고 신비로운 5개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굿하고 점보고 푸닥거리할 때 무당이 호통을 칩니다. “정성이 부족하야” 우리 성도가 우상을 믿는 사람들만큼만 정성을 들인다면 놀라운 것, 스데반처럼 하늘 문이 열리는 걸 보게 될 겁니다.

1, 12절에 나타난 두 천사의 모습입니다.

2, 17절에 “날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3, 문이 겹겹이 닫혔는데 그 문들을 통과해 제자들에게 오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4, 누가복음 24장 41~43절에 구운 생선을 청해 드시는 장면이고 다섯 번째는 눅24:19절에서 주를 알아보지 못하던 두 제자가 30~31절에서 떡을 떼어 축사하신 후에 주님인 줄 알았는데 주님은 사라져 보이질 않는 장면입니다.

5, 22~23절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과 죄사함의 권세를 주시는 장면인데 여기서 죄를 용서할 수도, 또 그대로 놔둘 수도 있다고 하시는 특별한 내용입니다.

 

1. 주께서 누우셨던 머리와 발끝에 두 천사가 보입니다. 천사는 하늘에서 보낸 일꾼으로 인간을 돕고 마귀를 물리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사람이나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흰 옷 입은 두 천사는 우리처럼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행1:10절에도 주님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갈 때 자세히 하늘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흰옷입은 두 천사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몸으로 어떻게 와서 어떻게 어디로 갔을까?

성경에서도 현실에서도 끝내 풀리지 않는 많은 현상이 버젓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람들이 좀 궁금해하다간 이내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럴 시간이 없는 겁니다. 육체가 무거워 육체의 본질과 본향과 목적지에 무관심하다면 이보다 가여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교회와 목자를 세우시고 끝날까지 구원해 가십니다. 흰옷입은 두 천사는 흰색 옷에서 정결과 의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천사를 의미하고 둘은 증인이란 점에서 그 숫자를 봅니다. 그리고 매우 궁금한 출몰은 끝내 비밀입니다. 비밀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알지 못하는 걸 신비라고 합니다. 신의 비밀이란 건데 여기서 끝까지 파고들어 알려는 건 선악과로 기우는 불행을 자초합니다. 몰라야 할 건 몰라야 합니다. 이걸 파고들다 대부분 이단이 됩니다. 다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비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또 무한한 능력과 권세의 확고한 증거라는 사실을 믿고 안다면 그거로 족합니다.

경찰공무원 하나만 알아도 든든합니다. 시청공무원이 친척에 있으면 모든 행정절차가 간단합니다. 땅에서 잠시 불편해도 우리에겐 하나님이라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뭐든 일사천리로 도우시는 창조주께서 친히 ”내가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뿐 아니라 여기 땅에서도 그 후광과 권세의 힘과 평강을 충분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천사도 보내시고 친히 십자가에 오르시고 지금 우리 안에 늘 계신 하나님, 우리가 알아드리고 믿어 기뻐 맞으면 함께 하시는 주님, 뭐든 우리가 간절할 때 채우시는 주님, 신비로 남겨있는 건 신비 그대로, 놀라운 감동으로, 개봉하지 않은 귀한 선물로 간직합시다. 그게 주님을 편히 모시는 일입니다. 다음 주엔 17절에 “날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로 합니다. 기도합니다.

 

2022.03.06. 요20:17-23. 부활의 현장 3/5.

부활시리즈 세 번째 시간입니다. 누군가 엄청난 현장을 보고 놀라 이웃에게 전했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며 믿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면 참 답답해서 힘들고 외롭기까지 해 아마 가장 가까운 이에게 너만은 믿을 거라며 하소연하게 될 겁니다. 전 어려서 가마솥 뚜껑이 그 솥 안에 들어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걸 가까운 어른이 보고 휘둥그레 제가 전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초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인 사건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 저나 여러분이나 놀라운 부활의 현장으로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확인해 이걸 몰라 어둠을 헤매는 이들에게 전할 때 가마솥 안에 들어간 솥뚜껑을 본 사람처럼 답답하고 외로워 속이 타고 어쩔 줄 몰라 주일 하루만은 예배로 이 놀라운 사건을 감동하자는 겁니다.

확연히 보고 믿고 들어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한다는 이 사실을 다짐하고 고백하는 날이길 축복합니다.

 

부활설교 첫날, 예수께서 분명히 심장에서 피와 물이 다 빠져나와 죽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죄사함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한1서 5장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으면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며 ‘예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시되 ‘증언하는 이가 성령과 물과 피’인데 ‘성령은 진리’며 ‘성령과 물과 피는 합하여 하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활설교 둘째 날은 주님 죽어 누웠던 곳에 나타난 두 흰옷입은 천사의 출몰입니다. 여기서 비밀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걸 신의 비밀 신비라고 하는데 여기서 끝까지 파고들어 선악과로 기울지 말고 몰라야 할 건 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덮어놓고 믿어야 합니다. 내 머리를 덮어두고 믿을 때 열리는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는 내가 본 이상으로 또렷하게 열리는 확실한 증거의 하늘나라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11:1절 말씀은 참 감동입니다.

(시간관계로 중략)

 

2022.03.13. 요20:19-31. 부활의 현장 4/5

오늘은 17절,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곧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을 살핍니다. 몸의 위치, 곧 아들 성자의 위치에서 하시는 말씀인데 왜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까? 최존의 예우로 엎드려 발을 두 손으로 감아쥐려는 제자를 말리신 점은 해석이 어려운 난해 구절입니다.

아마 부활주님의 몸이 우리와는 다른 뭔가 있어 그 부분이 세간에 전해질 때 유익하지 못한 점이 퍼져나갈 것을 염려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은 가능합니다. 이 부분도 거기까지여야 합니다.

그리고 붙잡지 못하게 한 그 몸이 19절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닫힌 문들을 통과해 두려워 떠는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는 장면은 그야말로 우리의 소망이고 기쁨입니다.

 

19절 눈으로 읽어보세요. 닫힌 문들과 상관없이 들어오셔서 첫마디가 뭡니까? 샬롬입니다.

샬롬이라는 평화는 두려움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인가? 우리도 곧 잡혀 잔인한 방법으로 가족과 함께 처형될 거라는 공포입니다. 메시아라고 믿고 따라다녔는데 시시각각 다가오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는 아무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절망입니다.

 

복음은 뭘까? 복음은 가장 절실한 것이 해결된다는 소식입니다. 자녀가 대입시험을 치르고 발표날에 듣는 복음은 합격소식이고 대선결과 발표날 듣는 복음은 자신이 응원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제가 1978년 8월 운전면허시험보고 당일 발표인데 합격이란 현장통보 확성기 소리가 복음이었습니다. 언젠간 반드시 죽는다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사는 살아있는 인생들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되 행복이 보장된다는 소식은 그 이상 없는 복음입니다. 세상을 죄와 악에서 구한다는 구원주, 메시아의 소식이 복음이란 겁니다. 이 복음의 주체가 복음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실체를 눈으로 보게 하시며 하시는 첫 마디가 편안하라는 겁니다. 두려워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몸이 어떤 몸입니까? 닫힌 여러 개의 문을 그냥 통과해 오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과 본질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건 뭘까? 대부분 유체이탈식 해법인데 아닙니다. 눅24:39절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몸으로 생선도 드셨습니다. 신비한 현장에서 제자들은 너무 놀랍고 기뻤습니다.

 

 

닫힌 문을 통과한 몸이 말해주는 진리의 핵심은 그런 초과학적 현실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부활의 실체입니다. 부활은 죽어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도 닫혀 있는 답답한 문들이 무관한 부활이 주님과 만나 주의 영 우리와 동행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린 죽으려고 늙어가는 게 아닙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 늙고 병들어 떠나는 겁니다. 늙는 걸 서글퍼 마세요. 아쉬운 게 있습니까?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놀라운 게 기다기고 무엇보다 억울하고 슬펐던 일 주님이 다 보상하십니다. 자신을 자꾸 타이르세요. 그래야 성경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닫힌 문을 통과한 예수님 모습은 큰 은혜의 장면이라 다음 주 또 나누게 됩니다. 한 주간 충분히 묵상하기 바랍니다. 묵상한 만큼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실 줄 믿고 축복합니다.

 

2022.03.20. 요20:17-23. 부활의 현장. 5/5

씨가 땅에 묻혀 햇볕을 받으면 입력된 시간표를 따라 씨는 뿌리를 뻗어 덮고 있는 흙을 헤치고 나옵니다. 이 힘은 큰 건물도 쪼개는 힘으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줄기와 잎과 가지를 펴고 봉오리를 맺어 꽃을 피웁니다. 이걸 설명할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이 일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가능한지 아무도 모릅니다. 부활뿐 아니라 만사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이렇듯 신비한 만사를 우리는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아주 태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이 된 신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문들이 닫힌 가운데 나타난 주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놀라며 또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을까? 이런 경향은 부활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데 방해가 됩니다. 여긴 시간의 개입이 발견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된 많은 신비는 시간이 걸려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니 모르는 사이 그러려니 하고 태연하고 무감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닭서리를 할 때 아주 느린 속도로 닭에게 다가가면 닭은 놀라지 않고 살며시 잡힙니다. 그러나 재빨리 잡으면 닭들이 놀라 소리를 쳐댑니다. 만일 오늘 애기를 가져서 1시간 후에 다 자란 태아를 출산하면 모두 놀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출산이 본래 정상이라면 그것도 놀라지 않습니다.

 

저속촬영은 이 모든 눈속임의 신비를 한마디로 설명합니다. 며칠 걸리는 발아와 줄기, 잎의 성장을 10초 미만에 보여줍니다. 즉 시간이 개입하면 일상이고 시간을 빼면 기적이라고 보는 착각입니다.

시간과 공간, 시공에서 자유로운 분은 안보이는 하나님 뿐입니다. 예수님이 문들을 통과해 오신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행하신 권능입니다. 언제나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 가능합니다. 영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잠시 입으셨던 주님, 주님이 시공을 초월해 제자들에게 문들과 무관하게 나타나신 일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쁜 소식을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일러드렸듯이 제자란 뒤따라가는 아우들입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아우가 형을 따라 그대로 할 때 그것을 제자라고 합니다. 아우된 자라는 뜻이지요. 주께서 그런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그와 같은 몸으로 다시 살아 영원히 산다는 사실, 이건 너무 분명한 사실입니다.

 

2번 나타나고 2번 보이신 창자국과 못자국

신비현상보다 중요한 주요주제는 부활한다는 엄위한 사실.

 

무엇보다 닫힌 문을 통과한 주님은 부활 후의 주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부활 전에 주님은 여러 기적을 보이셨지만 닫힌 문을 통과해 오시진 않았습니다.

 

부활, 그것은 죽어야만 시작되는 위대한 사건이다. 사랑하는 어린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써 부활을 강조하던 마알러의 악보에 적혀있던 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전, “이제 떠납시다. 난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다.”는 유대격언은 언제나 마사다를(masada, never again!) 떠올립니다. 부활을 향한 여정에 어떤 어려운 일조차 감사하는 모두 되시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