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당한 '박정희총격' 김재규, 하루전 조카에게 한 말
1997/10/26 궁정동 총격==1980.05.18~27 광주폭동 / 1980.05.25 김재규외
최종수정 2017.05.25 07:26 기사입력 2017.05.24 15:57
"세상에 부끄러운 일 하지 않았다" …
10.26 원인은 충성경쟁이 아니라, 유신과 김영삼 박해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 주장
1979년 12월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정에서 피고인석으로 다가오는 가족에게 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김재규. '<격동의80년대>자료사진.
▶ 김재규의 시 '장부한'
1973년 2월 국회의원 김재규는 '장부한(丈夫恨, 남자의 슬픔)'이란 한시를 남겼다.
눈 아래 험한 산, 흰 눈 덮였네
천고의 신성함을 누가 침범하랴
남과 북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
나라 땅 통일 못 이룬 것이 한스럽다
眼下峻嶺覆白雪 (안하준령복백설)
千古神聖誰敢侵 (천고신성수감침)
南北境界何處在 (남북경계하처재)
國土統一不成恨 (국토통일불성한)
눈 덮인 높은 산에 올라가 호연지기를 읊은 시다. 백설이 덮인 준령에는 오랜 세월의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다. 모두 하얀 산이니 거기 남과 북의 경계가 있을리 없다. 이것이 이 땅과 이 민족의 형국이 아닌가. 이런데도 역사의 과오와 어리석은 정치로 통일을 못 이루고 있으니 한스럽기 이를데 없다. 시상(詩想)이 호방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울림이 있다.
1980년 5월24일 김재규 사형집행을 1면 톱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이 시를 쓴 김재규는 누구인가. 37년전 오늘(5월24일) 사형당한, 박정희 시해의 주인공이다. 김재규는 1979년 12월20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린 대통령시해사건 공판에서 강신옥 변호사에게 이 한시를 건네줬다. 어제인 23일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대통령이 법원에 출석해 첫 재판을 받았다. 역사는 기묘하게도 흐른다. 1979년 10.26 시해사건 이후, 김재규는 위험한 사고방식과 기이하고 변덕스런 행동방식을 지닌 희대의 살해범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이같은 평가는 박근혜 정권 때까지 정설로 유지되어 왔지만, 당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써 좀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김재규
▶ 1970년대 한국 기업의 중동 진출을 주도한 건설장관
그는 경북 구미 출신으로 해방전 농림학교를 나와 교직생활을 했다. 국군 창설 때 육사 전신인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해서 1946년 2기생으로 졸업한다.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거친 뒤 중장으로 예편했고 5.16 때는 호남비료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인이었다. 저 시를 짓던 때는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에 입문한 시절이다. 이후 그는 건설부 장관이 되어 한국기업의 중동진출을 주도한다. 중앙정보보장이 되는 건 1976년이었다. 1979년 YH무역 여공농성 사건, 김영삼 신민당총재 의원직 박탈, 부마(부산과 마산)항쟁을 겪으면서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과의 갈등이 깊어진다. 1979년 10월 26일 그는 역사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1979년 11월 30일 류택형 변호사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그를 만나 '육성진술'을 녹음해 공개했다. 그 녹음테이프에 따르면, 그는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리자 질투심에 사로잡혀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이후부터 그런 생각을 가져왔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이 그를 낙인찍은 '비열한 배신자' 프레임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시해를 결심한 것은, 김영삼 당시 총재에 대한 위해(危害) 지시 때문이었다고, 그의 동생인 김항규가 증언하고 있다. 김재규는 한국 민주화의 기둥이자 같은 김녕김씨인 사람(김영삼)을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고민했다고 한다. 이 얘기는 10.26 이후 1심 2회 공판의 발언에서도 나온다.
1979년 12월 육본 보통군법회의 대법정 재판 때 강신옥 변호사에게 건네준 김재규의 시 '장부한'.
▶ 김영삼을 구하려 10.26을?
"각하, 김영삼 총재는 이미 국회의원으로서 면직됐습니다.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그걸로써 본인을 처벌했다고 생각합니다."는 말씀을 드리고 곧이어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그러면서 바로 총알이 날아갔습니다.
경기도 관주시 오포읍 능평리 삼성개발공원묘원에는 김재규 묘역이 있다. 남한산성에 묘지를 잡아준 것은 보안사령부였다고 한다. 동생 김항규는 남한산성에 올라가 느티나무가 있는 곳을 보고 "여기를 파주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김재규의 시신을 바꿔치기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동생은 목에 교수형 밧줄 자국이 있는 형의 시신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사형 당하기 하루전 동생 가족들은 김재규에게 면회를 갔다. 그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큰 아버지는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 그가 말한 최후 진술은 "나는 대통령의 참모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고급관리다.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자. 소의에 속한 것은 다 끊었다. 대의를 위해 내 목숨 하나 버린다."라는 요지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과 진실이 같은 것일지는 여전히 신중하고 엄중한 역사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돌아간 날, 한국 현대사의 물꼬를 돌려놓은 '총부리' 뒤에 서있었던 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발굴특종] 10·26 그날 … 김재규, 박정희 향해 "야, 너두 죽어봐"
[중앙일보] 입력 2015.08.26 01:18 수정 2015.08.26 11:16 | 종합 1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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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국회 국방위 소속 차지철 의원( 오른쪽)이 6사단을 방문, 김재규 사단장(준장)을 옆에 앉힌 채 상석에서 브리핑을 받고 있다. 포병 간부 출신인 차지철은 중령으로 예편했고, 육사 2기 김재규는 차 의원보다 여덟 살 많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안하무인 격 행동에 분격하곤 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9년 10월 26일 밤에서 27일 동트는 아침까지 나는 청와대에 있었다. 나는 1층에서 마주친 김계원 비서실장을 끌고 2층 그의 사무실에 올라갔다. “김 실장은 시종 옆에서 다 봤을 테니 자세한 얘기를 하나도 생략하지 말고 내게 다 해주시오. 언제 필요하면 그 정황을 남겨 놓고 나도 죽어야겠소.” 나도 모르게 비장한 말투로 그를 재촉했다. 그의 양복 윗도리는 대통령이 흘린 피가 배어 거무스름하면서 묽게 변색돼 있었다. 김 실장은 오후 8시쯤 궁정동 안가에서 절명 직전의 박 대통령을 승용차에 안아 눕혀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했다. 김계원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내가 병신 노릇을 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김계원의 상황설명 중엔 그 후 10·26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나오지 않은 내용도 있다. 나에게 한 얘기가 진실의 근사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얘기는 이랬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74> 10·26 그날 ③
옷에 피묻은 채 청와대에 온 김계원
‘궁정동 만찬장 진실’ JP에게 털어놔
“박 대통령은 험하게 돌아가실 운명” 5·16 거사 뒤 백운학 예언
김재규는 발작증 살인자 법정서 민주화 투사로 둔갑했다
이날 낮 충남 아산만 삽교천 방조제 행사를 마치고 기분 좋게 상경한 박 대통령은 저녁 6시 궁정동 만찬을 지시했다. 참석자는 박 대통령과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정보부장 네 명이었다. 미리 도착한 김계원 비서실장은 안가 마당 화단석에 김재규 정보부장과 둘이 앉아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폭동 진압하듯 무조건 누르면 부산 시민이 다 일어나 봉기한다. 공화당도 차지철이 무서워 대통령께 바른말을 못하고 있다. 이놈을 오늘 없애 버려야겠다”고 했다. 김계원은 “그 자식, 죽어도 싸다”고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김계원은 그러나 김재규의 말을 ‘한번 혼내줘야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 즈음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경질하려 했다. 김영삼과 신민당에 대한 정보부의 정치공작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재규도 그런 공기를 눈치챘다. 부마사태를 잘 처리해 공기를 한번 바꿔보려 했는데, 차지철이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저녁 6시5분. 대통령과 차지철이 한 차를 타고 궁정동에 도착했다. 궁정동 안가는 정보부 인력이 관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안가에 들어서면 경호 임무는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로 넘어간다. 차지철은 궁정동에 들어올 때부터 권총을 차지 않았다. 직사각형 식탁은 발을 뻗을 수 있게 밑바닥이 파였다. 안쪽 가운데 대통령이 자리를 잡았고, 그 정면 맞은편에 김재규, 오른쪽과 왼쪽에 김계원과 차지철이 각각 앉았다. 박 대통령은 9살 아래 고향 후배이고 오랫동안 키워줬던 김재규를 그날따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박 대통령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얘기했다. “어이, 재규. 넌 시간이 지날수록 참 실망스런 인물이야. 뭐야. 너 뭐한다구 맨날 돈타령만 하고···. 정보부 예산 무한정 쓰면서 (부마사태를)수습하고 진압한다고 했잖아.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더니 제대로 한 게 뭐야. 왜 그 모양이야. 그러고도 무슨 변명할 거리가 있어?”
대통령이 질책을 거듭하는 사이사이에 차지철이 “정보부가 판단 미숙으로 방관하는 바람에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고 끼어들었다. 김재규의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갔다. 침울하고 참담한 표정이었다.
잠시 TV 7시뉴스를 틀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서 연설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차지철이 ‘도라지타령’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박 대통령의 좌우엔 젊은 여성 둘이 시중을 들었다. 대통령은 김재규를 한참 어린 여성들 앞에서 어린아이 혼내듯 마구 나무랐다. 김재규의 발작증이 폭발할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는 간경화로 술을 못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다. 술잔이 비면 스스로 따라 연거푸 마셨다.
궁정동 하늘에 메마른 총성이 울리기 직전의 대화는 이랬다. 오후 7시40분쯤이었다.
▶박 대통령=“김영삼을 구속했어야 했는데 유혁인(정무수석비서관)이 말려서 취소했더니 혼란만 커졌어.”
▶김재규=“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된 것만으로도 처벌했다고 국민들은 봅니다.”
▶박 대통령=“중앙정보부가 좀 매서워야지. 야당 의원 비행(非行) 사실만 움켜쥐고 있으면 뭐해.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아냐.”
1979년 추석 이틀 뒤인 10월 6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이 경북 구미에서 성묘를 한 뒤 생가를 방문해 막걸리를 들고 있다. 왼쪽부터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이 대화가 있기에 앞서 김재규는 잠시 식당을 빠져나가 마당 가로질러 있는 정보부장 집무실에서 작은 호신용 권총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들어왔다. 32구경의 독일제 월터PPK 권총이었다. 김재규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정치는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 구실을 주고 나오라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당시 신민당 의원들은 김영삼 제명에 항의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집단으로 제출했다. 이 순간 차지철이 염장을 질렀다.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 한 명도 없습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뛰쳐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
차지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재규가 “썅~” 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오른손에 권총이 쥐여 있었다. “이 새끼, 버러지 같은 놈. 너 죽어 새끼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탕” 소리가 났다. 차지철은 오른쪽 팔꿈치를 맞고 실내 화장실로 도망했다. 극도로 흥분한 김재규는 맞은편 박 대통령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너두 죽어봐.” 대통령에게 몹쓸 욕설도 뱉었다. 그리고 또 “탕” 소리. 김재규는 극단적인 발작 상태였다. 두 발의 총탄이 날아간 뒤 권총은 작동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살인망동 한 달여 뒤 재판정에서 자기가 무슨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인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스스로 속아 꾸민 얘기일 뿐이다. 그의 말대로 미리 준비된 거사였다면 자기 권총에 탄환이 몇 발 들어있는지, 총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일을 감행한 것이니 말이 안 된다. 김재규는 방아쇠를 당겼지만 실탄이 나가지 않았다. 식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부하의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빼앗아 다시 들어왔다. 화장실에 숨었다 문갑을 들고나오며 방어하는 차지철의 가슴에 또 한 발을 발사했다. 김재규는 엽기적이고 실성한 표정이었다. 이번엔 직사각형 식탁을 빙 돌아 대통령 옆으로 갔다. 대통령의 가슴에서 피가 콸콸 솟구쳤다. 눈을 감고 비스듬히 의자에 누운 대통령의 오른쪽 이마 뒷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 또 한 발 “탕”. 그날 김재규가 쏜 총탄은 네 발이었다.
종신 대통령 만들기로 조직의 기본임무가 바뀌었다는 중앙정보부의 가장 내밀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처음부터 총도 안 찬 경호실장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다 횡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기습을 받고 방어할 틈도 없이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1970년 6월 10일 김계원 5대 중정부장(오른쪽)이 중정 창설 9주년을 맞아 전임 부장 초청행사를 열었다. 왼쪽부터 김종필 초대·김형욱 4대 정보부장.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던 정보부와 경호실이 대통령을 죽이는 존재로 뒤바뀌었다. 이런 역설은 권력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대통령의 안전은 외부의 철통 방어가 아니라 굳건하다고 믿었던 내부에 금이 가면서 무너졌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내게 “엎드려 방을 나가 복도로 피했다”고 실토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다 광기와 살의로 뒤범벅된 김재규의 기운에 질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은 건졌으되 대통령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빠져나온 것을 부끄러워했다. 김 실장은 대한민국의 사단장과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친 별 넷, 육군대장 출신이다. 육군대장이 총이 두려워 대통령의 죽음을 막지 못한 건 비통하고 서글픈 일이다. 그는 얼마 있다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가 쓰러진 대통령을 병원으로 모셨다. 나는 김 실장의 얘기를 들으며 긴장과 침통함, 충격과 분노가 얽힌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심호흡을 계속했다.
불현듯 18년간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누구한테도 꺼내지 못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1961년 5·16 혁명 뒤 서울 다동 한 음식점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모시고 백운학을 만났을 때 얘기다. 유명한 관상가인 그는 거사 전 우연히 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혁명, 성공합니다”라고 외쳐 놀라게 했다. 백운학은 박 의장에게 “각하, (정권이) 20년쯤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고 했다. 박 의장은 빙그레 웃었다. 백운학은 식사를 마치고 마루 끝에 앉아 신발끈을 매던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이랬다. “차마 본인한테 직접 말씀드릴 수 없었는데…. 각하께서 마지막은 퍽 험하게 돌아가실 명운입니다.” ‘험하게’라는 게 총에 맞는다는 뜻이었다. 백운학의 말이 맞아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얘기하지 못했고, 안 맞으면 싱거운 사람이 되겠기에 얘기하지 못했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18년 뒤 참혹한 현실로 찾아왔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소사전 궁정동 안가(宮井洞 安家)=궁정동은 서울 북악산 아래 종로구 산하 행정단위다. 조선시대 임금 중 정비(正妃) 소생이 아닌 왕의 모친 7명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이 있다. 칠궁 안의 우물(한자로는 정, 井)이란 뜻으로 궁정이란 이름이 지어졌다. 안가는 안전가옥의 줄임말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청와대 주변 궁정동·청운동·삼청동·구기동에 10여 채 산재했던 대통령의 은밀한 활동공간을 말한다. 박 대통령이 시해됐던 궁정동 안가의 식당 건물은 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직후 철거됐다. 나머지 안가들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철거되거나 기관장 공관으로 전환됐다.
[출처: 중앙일보] [발굴특종] 10·26 그날 … 김재규, 박정희 향해 "야, 너두 죽어봐"
김재규의 고향은 경상북도 구미입니다. 1950년 이전에 아버지는 정미소를 했기 때문에 집안은 대체로 부유했다고 평가받고 있지요. 선생님 생활을 잠시 하다가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때 박정희를 만나게 됩니다. 같은 고향이고 잠시 교편을 잡은 이력도 있어서 친분이 이때부터 있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관계가 좋더라도 능력이 없다면 같이 있기 힘들 수 있습니다.
권력이 생긴 이후로 여러 중역을 맡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최측근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절대 2인자를 두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료 관련 사업을 시키기도 했는데 능력과 수완이 좋아 잘 해냈습니다.
추후 건설장관도 역임했는데 평가가 좋습니다. 프로필 사진을 보면 경력이 다채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인자를 두지 않는 박통의 정책은 곧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그래서 차지철과 권력경쟁을 하게 방치했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충성경쟁이라고도 하지요.
실제 그의 여동생과 가족들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 두뇌 다툼이 치열하고 고달프다. " 당시에 경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그 부분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차지철과의 과도한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
상식에 벗어나는 행위와 술수로 회의감이 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자는 거기에 휘둘렸기 때문에 상관에 대한 실망이 한 요인이 되기도 했겠지요.
둘째, 부마 항쟁 진압에 대한 동의할 수 없는 명령
발포 명령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위를 하는데 강압 진압에 대한 반발과 회의감이 있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상도에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데, 독재의 길로 간다는 판단을 내렸을 겁니다.
이 부분에 어떻게 보면 내란이었는지 의사였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될지도 모릅니다.
셋째, 박근혜 최태민 관계에 대한 보고서 묵살
김재규는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불신하였고, 심지어 최태민을 평가했을 때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직접 이 둘을 조사하였고 나름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보고서를 올렸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겁니다.
(편집자 주 : 박통의 지시로 최태민은 전방부대에 6개월 간 연금상태에 두기도 했음)
아마도, 순박한 딸이 외로울 때 그래도 같이 어울리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위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넷째, 악감정과 권력욕이 있다는 견해
만약 암살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행적과 정치 활동과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무덤까지 가져가겠다 각서나 맹세를 하고 떠났으면 남은 여생 편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건을 예로 들어 입을 닫고 있으면 가능했을 겁니다. 그러나 잠수를 탄 것이 아니라 그는 암살을 했습니다.
그 직후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면 권력욕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사형을 예상하고 계획한 것이라면 진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암살을 한 것이겠지요.
그 이후 권력 승계의 자리를 확보한 것은 전두환이었습니다.
신군부 세력이라 하며, 사형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들은 억압받고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재규의 부하들도 지금에서야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이렇게 낙서를 했다고 합니다.
"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 "
한편 김재규의 부인은 사건 직후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암살자의 불명예 딱지를 붙였고 재산도 없고 여러모로 힘들어서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외동 딸도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김재규와 내연녀 사이에 있던 아들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후에 어느 병원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의 후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역사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정치란 무섭습니다.
권력 다툼에서 밀리거나 잘못되면 자녀들과 자손들은 무한 고통을 받습니다.
여동생과 매제와 일부 단체들이 명예를 회복하려는 운동을 하고 있으나,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행위는 반역이었을까요, 열사였을까요.
블로그지기 설렘시목의 붙임글]
하늘아래 땅을 딛고 사는 인간 중에 부족함이 없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훌륭한 구국의 고 박정희대통령도 좌,우의정격인 차지철과 김재규를 다스림에는 빈틈이 보인다.
청렴결백의 대명사 김재규도, 충성의 대명사 차지철도 자신을 다스리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결과론이 아니라 어디에도 적용되는 편향된 정치구조의 패착이며 예상된 결말이었다.
10.26사태의 원인을 굳이 살피자면,
차지철의 과한 충성심과 정치철학의 부재로 인한 강력대응기조, 그것은
김재규의 깊고도 애민의식이 기반된 자유민주 및 인권감각과 상충되는 점이다.
8세 연상, 하늘같은 선배 김재규에게 차지철이 오만방자하게 된 데는 박통의 책임이 분명한 것, 누구도 부인치 못한다.
이 사건의 원인과 아쉬운 점을 짧게 살펴보면,
첫째, 박통의 균형 깨진 정치감각과 인사관리.
둘째, 차지철의 오만방자함과 정치철학의 부재.
셋째, 김재규는 깊은 고노와 계획이 없이 경솔하게 방아쇠를 당겼다는 점이다.
김재규는 박통처럼 사유재산에 집착이 없어 가난하게 살았고 차지철에겐 새벽기도하는 노모가 계셨다.
당시 청와대에 비교적 사욕(私慾)이 없었다는 부분은 일부 과(過)와는 별개로 모든 정치인의 귀감이다.
문제는 언제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차지철이 감히 쳐다도 보기 힘든 김재규부장에게 함부로 한 것은 그가 얼마나 박통의 신임과 보호를 받아 경거망동하며
교만하여 모든 남자의 세계에서 공분할 만한 아래위턱 없는 짓인 동시 나라를 망친 도화선인지 국민은 다 알고 있다.
더욱이 권력의 쟁투와 충성의 경쟁심을 버리지 못한 채 강경일변도의 차지철은 책임이 박통 다음으로 꼽히며,
정치신념이 비교적 순수한 김재규는 온건한 정치이념을 갖고 오랜동안 고심한 부분이 드러난다해도 나라를 수렁에 빠뜨린 범죄를 저질렀다.
우리는 그가 권총을 준비했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어떤 이유에서도 그것은 대실수고 범죄였다.
민족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만델라처럼 끝까지 투쟁하여 국민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을 설득해야 했다.
물론 당시 자신의 역량이 못 미친다해도 대통령시해라는 극단의 선택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대실수다.
김재규가 보다 진지했다면 인내를 갖고 꾸준히 직언하며 역경을 헤지고 조국의 밝은 미래의 초석을 놓았을 것이다.
인내의 한계가 와 참기 어려웠다면 차지철만 쏴야 했다. 그러나 인간 만사가 그러하듯
과유불급의 잣대를 능히 걸머질 인재가 아직도 보이지 않아 가여운 민초들,
어디 믿고 의지할 만한 의인, 훌륭한 지도가가 없나 목이 빠져 모두 기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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