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3. 주일예배설교<욥 2:1-10. 천상조회(天上朝會)>
[어리석은 개미는 자신의 몸이 작아 사슴처럼 빨리 달릴 수 없음을 한탄하고 똑똑한 개미는 자신의 몸이 작아 사슴의 몸에 붙어 달릴 수 있음을 기뻐한다. 단점을 메시아대망으로 바꾼 지혜와 용기로 못난 히브리인들은 세계를 장악했다.]
욥은 성경인물 중 애매히 고난받는 자의 대명사가 된 유명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과 비슷한 족장시대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그를 본문 1:1절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어 본서는 그를 동방사람 중에 가장 큰 거부라고 소개하는데 그에게는 흠잡을만한 것이 안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 욥에게 상상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이 벌어집니다. 본서1:13-19절까지는 연이어 일어나는 재앙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소와 나귀를 스바사람들에게 약탈당하고 종은 모두 살해당하는 일로 시작하여 낙타를 약탈하고 종을 죽이는 갈대아 사람들의 만행, 태풍으로 집이 무너져 그 안의 사람들이 다 죽어 모든 사람과 짐승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이 적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욥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열 명의 아들 딸. 종들과 가축을 모두 잃어버림으로 저주받은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욥1:6-12절, 2:1-10절은 그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밝힘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의 자초지종과 그 대안과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한 자의 애매한 고난,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보통 고난은 자신의 부족과 사단의 계략으로 봅니다. 본문 욥2:1절을 봅니다.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1.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서 있는 사단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문의 시작인 “또 하루는”이란 극히 평범한 말로 하나님은 필요할 때 그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단을 불러 세우는 것이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나님의 천상모임에 천사들과 함께 늘 의례적으로 사단이 참석하여 발언권을 갖는다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문에 그들 가운데의 가운데 –바-는 몰래 끼어든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해 그 중에 끼어들었던 것이고 또 하나님은 이미 아셨지만 계획을 위해 묵인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어찌 들어왔던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중에 사단은 본문 1:6-12절에 이어 두 번째로 욥을 빙자하여 끼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욥에 대하여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단 한분의 유일하신 절대자시며 만유의 주관자십니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이 본래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시고 눈에 보이건 안보이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는 누구도 일단 존재에 대해서 논할 수 없습니다. 뭔가 존재한다는 것을 살펴보면 그 끝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혹 모든 존재의 마지막 뿌리를 규명할 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지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서, 그냥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살다가, 갈 곳도 어딘지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롬11:36절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함으로서 만물의 시작과 과정과 종착이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부단히 괴롭히는 악한 영들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과 능력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본문 욥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2. 땅을 두루 돌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사단입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묻는 말씀에 사단은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합니다. 벧전5:8절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쉬지 않고 삼킬 자를 찾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사단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중요한 소식을 전하며 주의 백성들을 돕지만 마귀는 자신의 영역 안에 한 영혼이라도 끌어들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훼방자요, 택한 백성들을 유혹하고 괴롭혀서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쉬지 않고 일합니다. 밧모섬에서 요한이 본 환상은 이 사탄의 무리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의 큰 전투가 하나님의 예정과 예언대로 교회와 성도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시록에는 성도와 교회가 받을 일정량의 고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우리에겐 어디에도 십자가의 도를 구원의 닻줄로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문에도 욥 자신은 전혀 알 수 없는 재앙가운데 하나님은 이미 욥을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복 받는 자의 표본을 삼기 위해 애매한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성도여러분. 기억하세요. 사탄은 우리 주변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사면에 덫을 놓아 그 앞에 달콤한 것들로 믿는 자를 유혹하며 기다립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그럴싸한 포장을 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욕심을 자극해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고통과 환난이 욕심에서 시작되지만 본문이 소개하는 욥의 고난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즉 욥과 같이 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재난은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고난은 어디서 출발합니까? 본서 욥1:8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러자 사탄이 뭐라고 합니까? 욥1:9절-10절까지는 욥의 하나님경외는 하나님이 워낙 풍성하게 베푸셔서 넉넉하게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어 11절에선 그러니 그 소유물을 무너뜨리면 대번에 하나님을 배신하여 욕 할 것이라는 사탄의 악한 고발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한번 네 생각대로 그의 소유물을 쳐봐라. 그러나 생명은 건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욥의 해석되지 않는 고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 자랑 앞에 시기질투로 인하여 욥을 악평함으로 하나님의 자랑을 무시하면서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고난의 뒤엔 많은 뜻이 있지만 또한 어김없이 사탄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모든 고난에는 사탄의 개입이 있습니다.
욥을 극진히 사랑하신 하나님, 그래서 사탄에게 묻습니다. “그리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또 있더냐?” 그러나 사탄은 시기질투의 영이요, 인생을 망가뜨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악한 영입니다. 즉 욥의 애매한 고난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랑을 들은 사탄의 간악한 시기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게 멀쩡한 욥은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 잿더미에 앉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불행에 간혹 그 원인을 몰라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변과 환경을 원망합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욕심과 부족에서 오는 것이지만 본문처럼 전혀 해명되지 않는 것도 있고 또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인생의 힘든 여정에서 욥을 통하여 큰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큰 고통의 시작이지만 결국 상상도 못할 큰 축복의 출발입니다.
4. 선악 간 하나님만 믿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드디어 사탄이 의도한 대로 몸 외에 모두 잃게 돕니다. 종들 아들딸 모두 죽고 가축을 몽땅 뺏기고 집들은 다 무너지고 망연자실 하나님 앞에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립니다. 본문 1:20절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여기서 우리는 남과는 다른 욥의 신앙인격에 감동하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현장에서 욥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께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요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주님을 진정 믿고 우리의 온 생애를 그분에게 맡기고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을 결단했다면 어떠한 일이든 주님은 복되게 하실 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대신 죽어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으로 큰 꿈을 갖고 모든 면에 탁월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이민목회의 길에 나선 목사님의 실화입니다. 뜻과는 달리 몇 년을 헤매고 낙심하여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주님은 번번이 막으셨습니다. 아내에게 “이혼하면 당신은 능력많아 잘 살테니 날 떠나 다른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목사님에게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 바보처럼 울기만 했습니다. 아들에게는 “내가 가장으로서 무능하고 앞으로도 정말 희망없는 아빠니 용서해 달라.”고 고백한 뒤 아들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후에 아들은 변하기 시작해서 중간하던 실력이 무섭게 뛰어올라 미국 고등학교전체석차 1%안에 들게 되어 지역신문에까지 났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작은 교회는 구경 차 나온 성도들로 붐비기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직접 당한 좌절과 낙심, 자살시도와 비참했던 경험들을 살려 상처받은 많은 영혼들에게 호소력있는 설교와 치유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3학년이 되자마자 유명대학에서 벌써 프러포즈가 들어왔습니다. 학비전액장학생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학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공부를 잘해 전국 1%안에 들게 되었냐는 질문에 “아빠 믿었다간 굶어죽기 십상”이란 불안감에 어쩔 수 없이 파고 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조용히 또 말합니다. “당시 아빠가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고 그 기억으로 졸린 것도 참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긴 시간 목사님의 무능과 실패, 절망은 한 가족을 결국 야무진 참사랑의 공동체로서 새 출발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장차 풍성한 영혼구원과 치유사역의 또 다른 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당시에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고난이 욥의 고난만 하겠습니까? 열 자녀들이 한 번에 죽고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집도 무너졌는데 이제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의 시험으로 온몸에 종기가 나서 기왓장조각으로 여기저기 긁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내는 조롱하고 화를 내며 떠납니다. “그래도 당신은 당신의 그 알량한 믿음을 보존하겠는가?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확 죽어버려.”
본문 2:10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하는 것처럼 영광의 부활은 고난의 십자가를 전제로 시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습니다. 불후의 명작 실낙원을 써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죤 밀턴은 44세에 눈을 잃는 불행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육안을 잃으면서 더 깊은 영안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했고 육안은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를 못 보는 영적 소경들에게 많은 도전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맹인이 된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맹인된 것을 참지 못하고 불평하는 게 진정 불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진실로 의뢰하며 따르는 자는 그분이 반드시 어떠한 불행과 재난 앞에서도 능히 구해주신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타박하며 자신의 곁을 떠나는 아내에게 어리석은 여자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고통 앞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한 욥, 그러나 극심한 고통 속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이라고 했던 작은 원망조차 회개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둬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천개의 아픔 속에 한 개의 신음조차 회개하는 욥, 그는 후에 더 큰 복을 받아 일곱 아들과 세 명의 예쁜 딸을 두고 딸들에게도 기업을 주는 거부가 마침내 되었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아직도 우리에게 신비로운 수수께끼로 항상 우리들 곁에 언제 찾아들지 모르는 불청객으로 서있습니다. 이 수수께끼는 하나님만이 그 답을 명쾌히 풀어 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몫은 그 하나님을 바르고 충실하게 신뢰하는 일, 곧 믿음을 추스르는 일 뿐, 험악한 세월을 오늘도 우리가 겁 없이 가는 것은 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들 믿음에 실망을 안겨주시지 않습니다. 다 밝혀지지 않은 욥과 같은 고난에도 하나님은 우리 모르게 개입하셔서 더 큰 하나님의 자랑이 되도록 하십니다. 오늘 욥기를 우리에게 주시고 성경으로 온 인류에게 주신 것은 끝내 복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서도록 함으로 하나님의 풍성을 몸을 통해 선포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는 것 잊지 않기 축복합니다. 비록 힘들고 싫어도 그 현장에서 주님을 찬송하십시다. 찬송은 찬송할 일을 부르고 감사는 감사할 일을 부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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