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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고지전투의 아픈 기억, 연천 유엔군 화장터

by 설렘심목 2014. 7. 12.

6·25 고지전투의 아픈 기억, 연천 유엔군 화장터

이기환 사회에디터 lkh@kyunghyang.com (경향, 2014.6.19)

 

이역만리 한반도서 그들의 혼백은 편히 쉬고 있을까


‘저 우뚝 솟은 굴뚝은 뭐야. 벽난로라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1993년 어느 날 경기 연천 미산면 동이리를 답사 중이던 향토사학자 이우형씨의 눈에 희한한 구조물이 밟혔다.

40년 이상은 족히 자랐을 활엽수 사이에 건물의 지붕과 벽체의 대부분이 무너져버린 건축물…. 그 사이에 온전한 굴뚝이 마치 벽난로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토박이인 김태완옹(작고)이 굴뚝의 아픈 사연을 증언해주었다.

“유엔군 화장터야. 6·25 때 대단했지, 고지전투에서 죽은 유엔군이 매일 화장장에 밀려들어 왔어요. 지금도 생생하네. 화장에 앞서 간단한 장례를 펼치던 모습이….”
그랬다. 저 굴뚝을 통해 이역만리 한국땅에서 산화한 유엔군 장병들의 혼(魂)과 백(魄)을 살라버린 것이다.

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우뚝 솟아있는 유엔군 화장터. 한국전쟁 때 스러져간 유엔군 병사들의 혼과 백이 한 줌의 재로 흩어진 곳이다. 연천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피의 의미

한국전쟁은 국제전쟁이었다.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과 중국, 소련 그리고 유엔군의 16개국 등 20개국이 직접 참전했다.

차마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를 수 없었던 동서양 진영이 한반도에서 ‘제3차 대전의 대체전’을 치른 것이다. 전쟁의 양상은 특이했다. 1년여의 혈전 끝에 교착상태에 빠졌다(1951년 6월). 전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 공산 측은 1951년 두 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소련이 약속한 60개 사단분의 전투장비와 보급품도 도착하지 않았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외의 반전 여론과 동맹국들의 휴전 압력이 컸고, 중국군의 강력한 전쟁수행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한반도에 힘을 집중함에 따라, 전선이 확대될 경우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럽이 소련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따라서 확전은 피아간 불가능해졌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양측의 지루한 줄다리기는 2년 이상 이어졌다. 그동안 전쟁은 고지쟁탈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1127일의 전쟁기간 중 764일, 즉 3분의 2 이상 동안 종심 20㎞ 내외 전선의 고지에서 치르는 희한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북한이었다, 우리 측 전사에 따르면 한국군 31만명, 북한군 60만~80만명의 인명피해가 났으니까….
그러나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18개국 젊은이가 뿌린 피를 상기해보자. 이역만리 머나먼 한반도에서 숨졌거나 부상을 당한 젊은이는 유엔군 16만명, 중국군 97만명에 이른다. 이들이 뿌린 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포로가 없었던 파병군

아프리카에서 온 에티오피아군 1200명은 누구였을까.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보위하는 근위대에서 뽑힌 충성스러운 장병들이었다.
아디스아바바 인근 한국 지형과 닮은 곳에서 훈련을 마친 이들은 가그뉴(Kagnew·강적을 궤멸시킨다는 뜻)라는 부대 이름으로 파병됐다. 특이한 점은 참전기간 중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포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황제의 충성스러운 군대에서 포로란 있을 수 없었기에 포로수가 0이었다는 것이다.

필리핀군은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의 참전으로 유명하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라모스 소대장(중위)이 에리고지(연천 역곡천 인근의 작은 고지) 제3벙커 4m까지 다가섰다. 그러나 갑자기 중국군이 소총을 마구 쏘며 뛰쳐나왔다. 놀란 라모스 중위가 카빈총을 난사했고 중국군 3명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한국전쟁사> 제11권 ‘유엔군 참전’)

라모스뿐 아니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남편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도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필리핀군의 참전 때는 무려 6만명의 필리핀 국민들이 파병군을 배웅했다고 한다.

여단급(5000명)을 파병한 터키군의 경우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실탄 훈련도 하지 못한 채 파병됐고, 언어소통 문제로 한국군과 북한군을 제대로 구별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음식도 맞지 않았다. 1950년 11월 군우리 전투에서 여단의 전력이 사실상 와해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1951년 1월 금량장 전투에서 포로되기를 거부, 착검한 채로 돌격하는 용맹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 “희생 없인 승리도 없습니다”

태국군은 ‘리틀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으며 연천 역곡천 인근의 ‘포크찹 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사는 “태국군이 1952년 11월부터 세 번에 걸친 중국군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대급을 파견한 프랑스는 몽클라르 대대장(중령)의 일화가 유명하다. 몽클라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 장군으로 종군한 뒤 종전하자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정부가 대대급으로 파견부대를 보내자 계급을 낮춰 중령으로 복귀, 대대장이 되었다.

벨기에의 경우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이던 모레안 드 멜론이 소령으로 출전, 연락장교를 맡기도 했다.

남북한을 제외하고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쪽은 미국과 중국이었다. 연인원 180만명을 파병한 미국은 14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존 육군 소령)을 비롯해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다. 이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아들(지미 공군 중위)도 폭격기를 조종하며 출격했다가 실종됐다. 참모들은 수색작전을 펼쳐 사령관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아버지 밴플리트는 이렇게 말했단다. “다른 작전이 내 아들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또 어떤가. 중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순망치한(脣亡齒寒) 호파당위(戶破堂危)’, 즉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고 현관문이 깨지면 안채가 위험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참전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마오안잉·毛岸英)도 자원 참전했다가 유엔군의 소이탄 공격에 전사했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슬픔을 감춘 채 말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한반도에 묻어둡시다.”

■ “제인 러셀 고지 아시나요”

지루한 고지전 속에서 전투의 성격이나 특징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고지의 이름이 쏟아졌다.

티본스테이크처럼 생겼다고 ‘티본고지(T-bone·연천)’, 살이 붙은 돼지 갈비뼈를 닮았다는 ‘포크찹 고지(Porkchop·연천)’,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는 ‘제인 러셀 고지(Jane Russell·김화 오성산 기슭)’….

‘백마고지(White Horse hill)’란 이름을 보자. 십자포화로 벗겨진 고지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철원)’,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고지(Old Baldy·연천)’, 저격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Sniper Ridge·김화)’, 그리고 처절한 전투로 피바다가 됐다는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양구 북방)’,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스러운 전투가 이어졌다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양구 북방)’ 등은 전쟁의 참화를 웅변해주는 명칭들이다.

■ 허무한 고지전투

그러나 처절한 고지전투의 끝은 허무 그 자체였다. 예컨대 ‘피의 능선’ 전투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T R 페렌바크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 보잘것없는 둥근 언덕 3개(피의 능선)를 차지하려고 4000명이 넘는 아군 병사가 목숨을 바쳤다.”

42일 동안 피아간 2만~3만7000명의 인명피해를 낸 ‘저격능선’ 전투를 평가한 우리 측 전사는 어떤가.
“저격능선이라는 적의 전초 하나를 뺏으려 그렇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어야 했던가.”(<한국전쟁전투사-14. 저격능선전투>)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헛된 피를 뿌린 것일까. 혹 그들의 희생 덕분에 세계는 제3차 대전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천의 한 귀퉁이, 유엔군 화장터에 다시 선다. 누군가 굴뚝 위로 녹슨 철모를 살며시 얹어 놓았다. 누구의 넋이 찾아와 그렇게 앉은 것인가.

쏜살같이 다가오는 땅거미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훠이훠이 진혼곡을 불러댄다.

 

▲ ‘지하만리장성’을 아시나요
공산군, 중부전선에 총연장 4000㎞지하갱도 만들어

“설령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해도 공산군 진지를 파괴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철원 김화 동북방 오성산 일대에서 벌어진 이른바 상감령 전투(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혀를 내둘렀다.

1951년 8월부터 1952년 12월까지 공산군 측이 중부전선 250㎞에 총연장 4000㎞에 이르는 이른바 지하갱도를 구축했던 것이다. 공산 측이 판 갱도는 9000여개, 엄체호는 78만여개에 이르렀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에 이르는 거대한 개미집이 형성된 것 같았다. 중국군은 이것을 ‘지하만리장성’이라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어떤 사단도 3개월간의 식량을 보관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유엔군이 1952년 10월14일부터 42일간 벌어진 상감령 혈투에서 사실상 패배한 이유가 바로 이 지하만리장성 때문이었다. 당시 정일권 한국군 2사단장의 회고.

“동굴은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니 사통팔달이었다. 중국군의 반격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는데 바로 이 동굴진지 때문이었다.”

미 7사단이 맡은 삼각고지에서 사상자가 2000여명이나 나자 미국 내에서는 “미군이 명분없는 싸움에 희생되고 있다”는 반전여론이 들끓었다. 반면 중국군은 이 상감령 전투의 승전보를 시시각각으로 대륙에 전했다. 1950년대 중국에서는 ‘상감령 정신’이 대륙을 풍미했다. 1956년 개봉된 영화 <상감령>의 주제곡(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지금도 제2의 국가(國歌) 대접을 받고 있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하면(若是那豺狼來了) 사냥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라는 가사이다.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바로 미국을 의미한다.

지금도 중국군이 구축한 이른 바, 지하만리장성은 비무장지대 일대에 묻혀있다. 피를 뿌리며 스러져간 젊은 넋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