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지도층 가운데 보수주의자라 할 수 있는 이와 처음 만나 얘길 나누다 보면 그가 나를 당연히 좌파로 상정한 채 대화에 임함을 은연중에 깨닫고는 쓴웃음 짓게 되는 경우가 적잖다. 그가 스스럼없이 그러는 까닭은 백이면 백 빤한데, 바로 내 알량한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과분한 오해 앞에서 내가 감히 좌파도 우파도 못되는 일개 광대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나면 그는 비로소 내가 좀 편해졌는지 이내 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특히 문화예술계는 죄다 좌파에 물들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한탄을 던져오기 마련이다.
이 익숙해진 풍경 속에서 내가 화제를 얼른 다른 방향으로 돌리곤 하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불온한 박쥐인 내가 자칭 보수주의자인 그에게 해줄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몰라서 저런 질문을 해대는 그의 실존이 너무 괴로워서다. 한 청년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 순수한 눈에 비춰진 세상이란 모순과 불의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또한 예술가란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사랑을 찾아 헤매는 행위로부터 자신의 예술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청년과 예술가는 비록 불가능하고 급진적인 정의감일지언정 좌파적 견해와 감상에 매혹되기가 쉽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 이치가 이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청년들과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없는 형편을 다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보수주의자들은 왜 자신들이 젊은이들과 문화인들로부터 극단적인 혐오와 적개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 제발 무작정 역정만 내지 말고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공동체의 안정과 질서를 중요시하는 보수주의는 다른 정파에 비해 가장 다양한 도덕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한다. 보수주의자가 완고해 보이는 것은 설익고 파괴적인 변화가 사회의 한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 사회 전체에는 해를 끼치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것에 반대하기 때문이지 변화 자체를 부정해서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시대가 발전했어도 인류 생존의 기본 법칙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의 골격이 조상의 골격과 별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고 소로는 『월든』에 썼다. 보수주의는 국가 체제의 골격을 소중히 여기는 상식주의자들이다. 이 사회가 보수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모습은 오만과 부패가 아니라 고뇌하는 균형감각과 청정한 위엄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소위 좌파들이 선한 사마리아인 행세로 나르시시즘의 허기를 채우고 있다면, 이 나라의 소위 우파들은 애국자 행세로 속물의 극치를 보여준다.
애국은 인생 못지않게 모호하고 난해한 개념이다. 그래서 애국은 자신을 정말 애국자라고 착각하는 근육주의자들에 의해 아집과 폭력으로 쉽게 변질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누가 목숨을 던져 국가를 지키는지는 새벽에 닭이 울기 전까지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처럼 그때 가 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법이다. 타락한 종교가 죽음을 가지고 사기를 치듯 파시스트들은 애국으로 사기를 친다.
도대체 이 나라의 보수에게는 분노만 있지 반성이 없다. 보수는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비극을 설명하고 희망을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보수는 청춘들을 희롱하고 착취한다. 만약 우리의 보수가 드높은 도덕과 지성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장차 통일 대한민국에서 탄생할 2500여만 명의 새로운 유권자는 보수의 강력한 정치적 적대자로 수렴되고 말 것이다.
“보수주의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새롭고 아직 시험을 받지 못한 게 아니라 익히 알고 시험을 겪어온 것을 지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1860년 2월 27일 링컨의 연설 중 한 대목이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익히 알고 시험을 겪어온 것이 보증하고 있는 아름다운 가치와 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당신들의 더러운 욕망에 대한 변명과 사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또한 이 질문은 가짜 좌파 진보주의자들처럼 이 나라에 득실거리고 있는 가짜 우파 보수주의자들에게가 아니라, 진보란 모든 살아 있는 정신의 기조임을 믿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일 것이다.
이념의 균형이 잡힌 사회를 두고 새는 좌우 양 날개로 난다고들 흔히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진보는 좌파의 전유물이 아님을 주장하는 동시에 저 비유를 오류로 받아들일 게 분명하다. 보수주의는 새의 한쪽 날개가 아니라 새의 몸통이다. 그 몸통은 인류의 빛나는 미래를 향해 진보의 양 날개를 유연히 휘저으며 역사의 창공을 날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자유라고 부른다. (중앙일보펌:이응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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