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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세상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시대 거상 김만덕’

by 설렘심목 2014. 7. 7.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시대 거상 김만덕’

 

국내 여성 경제인은 2010년 기준으로 125만 명이며, 전체 사업체의 37.2%를 차지한다. 이는 2004년에 비해 5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여성기업의 조직형태를 살펴보면, 법인사업자(3.1%)에 비해 대부분 개인사업자(96.8%)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2008년도 개인사업자 비율인 97%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치이다. 법인사업자의 세부 업종을 들여다보면, 하수·폐기물처리 원료재생 및 환경복원이 56.7%, 금융 및 보험업이 40%, 건설업이 26.8%로 타 업종에 비해 상당히 높은 것이 특징이다. 여성경제인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활동분야(영역)도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남성 못지않게 활발한 경제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성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렇게 점차 여성경제인이 늘어나면서 <한국여성경제인협회>는 1996년부터 7월 6일을 ‘여성경제인의 날’로 지정해 매년 기념해오고 있다. 7월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경제인인 김만덕을 기념하고자 한다.

전 재산을 털어 제주도민을 돕다
김만덕(金萬德, 1739~1812.10.22, 이하 만덕)은 조선시대 정조(正祖, 1752~1800) 때 제주도에서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자 두 명의 오라버니인 만석과 만재는 목동이 되고, 만덕은 기생집에 의탁하게 된다. 만덕은 퇴기(退妓)의 수양딸이 되어 기생수업을 받게 됐는데, 악기를 잘 다루고 미모가 뛰어나 스무 살도 안 되어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이 되었다.

<제주도민들을 도운 거상 김만덕>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아름다움 덕분에 숱한 남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만덕, 스무 살 즈음에는 꽤 많은 재물을 모았다. 부를 쥔 그녀였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게 있었으니, 바로 기생이라는 신분이었다. 그녀는 제주 관아(官衙)로 달려가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복원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제주목사(牧使)는 그녀의 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만덕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주목사를 향해 “자신에게 양인의 신분을 돌려주면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하며 간절하게 설득했다. 끈질긴 노력 끝에 제주목사는 만덕의 양인 신분 회복을 허락했다.

그토록 원하던 기생의 굴레를 떨쳐버린 만덕, 본격적으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객주(客主)였다. 객주란 ‘제주 포구에서 이루어지는 상거래 주선, 금융, 창고업 등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정조 때는 객주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이 매우 번창했다. 덕분에 만덕은 그 일로 꽤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타고난 사업가였던 만덕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만덕은 재물을 집안에 쌓아두기만 하는 양반들과 큰 거래를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의 소비성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양반들의 주요 소비품목 중 하나였던 녹용(鹿茸)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또 양반 부녀자들을 위해 고급옷감과 화장품, 장신구 등에도 손을 댔다. 사업은 점점 번창하여 나중에는 선박 무역까지 하게 됐고, 만덕은 10년도 안 되어 제주 포구를 완전히 장악한 거상(巨商)이 되었다.


1795년 제주도에는 폭풍과 폭우, 흉년 등 계속되는 재해로 인해 굶어죽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조정(朝廷)에서 제주도민들을 살리기 위해 구휼미(救恤米)를 보냈으나 배가 풍랑에 침몰하는 불상사까지 겹쳐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사(餓死)하기 전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 500섬을 구입했다. 그리고 제주도민들에게 흔쾌히 전달했다. ‘부자가 될수록 욕심이 늘어난다’는 속담은 만덕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뛰어난 기업가이자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자선사업가로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경제인이었다.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다
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만덕을 불러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소원을 말하라 하였고, 만덕은 지체 없이 금강산을 구경하겠노라고 답했다. 당시 금강산은 여성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공한 남성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영역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그리고 금강산으로 통하는 길목마다 모든 관아가 만덕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김만덕 기념관 전시실 전경>
<김만덕 기념관 전시실 전경>

조선후기의 문신이던 채제공(蔡濟恭),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시인 조수삼(趙秀三), 추사 김정희(金正喜) 등은 만덕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남겼으며, 당시 형조판서를 지냈던 이가환(李家煥)은 만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칭송했다.

만덕은 제주도의 기이한 여인
나이는 60인데 얼굴은 마치 마흔 살쯤
천금을 던져 쌀을 사다 굶주린 백성을 구했네
한 바다를 건너 임금님을 뵈었네
다만 한 번은 금강산 보기를 원했는데
금강산은 동북쪽 멀리 안갯속에 싸여 있네
임금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날랜 역마를 내려주시니
천 리를 번쩍하고 강원도로 옮겨 갔네
높이 올라 멀리 조망하며 눈과 마음 확 트이게 하더니
표연히 손을 흔들며 바닷가 외진 곳으로 돌아갔네
탐라는 아득한 옛날 고씨 부씨 양씨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한양을 구경한 여자는 만덕이 처음이었네
우렛소리 요란하게 와서는 백조처럼 홀연히 떠나고
높은 기상을 길이 남겨 세상을 씻어줬네
인생에 이름을 남기려면 이렇게 해야지
진나라 과부 청(淸)하고 어찌 비교할 수 있겠나

만덕은 평생 혼인하지 않고 홀로 살았으며, 죽기 직전에 가난한 이들에게 남은 재산을 고루 나눠주고 양아들에게는 살아갈 정도의 적은 재산만을 남겼다. 그리고 1812년 10월 22일 74세를 일기로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만덕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 ‘김만덕 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만덕상’을 제정하여 또 다른 만덕들을 배출하고 있다. 또 ‘만덕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해마다 ‘나눔 쌀 천 섬 쌓기, 만 섬 쌓기’ 등 행사를 성대하게 열고 있다.

출처* 위민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