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김제에 금산교회라고하는 자그마한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5만교회가 넘는교회가 있지만 이 교회는 아마 가장 작은 교회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됨니다.
금산교회당은 100년전에 ㄱ자 형으로 지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 ㄱ자 교회들이 더러있지만 원형그데로 보전되어 문화제로까지 지정된 교회는 금산교회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교회를 ㄱ자형으로지었을까요?
한쪽날개는 남자석 다른쪽 날개는 여자석입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예배를 볼 때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금산리는 옛날이나 약100여 세대정도되는 노령산맥 줄기 모악산 기슭에 있는 조그마한 산골 마을입니다.
그러나 이 금산리라는 마을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첫째 전라북도의 중심사찰인 금산사가 이 동네에 있습니다. 1천 4백 여전 전 백제 법왕 2년에 지은 고찰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금산리는 신흥종교 대순진리의 증산교 의 본부가 있는 마을입니다.
금산리 용화마을에서 강증산이 증산교회를 시작 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간증산이 사망하자 그 신도들이 제각기 나뉘어서 각종 종교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는 보천교를 비롯해서 태을교 용화교 등 무려100개가 넘는 신흥종교들이 하나의 단지를 이루다시피했습니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 기울어져가고 있었던 1904년에서 05년 무렵 한젊은 미국의 선교사 레위스B. 목사가
말을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 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교가 우글대는 금산리야말로 무슨일이 있어도 꼭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라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는 금산리에 머물 때에는 조덕삼이라고 하는 이 고장의 제일가는 부자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루밤을 묶곤했습니다.
조덕삼이라는사람은 이 일대의 가장 큰부자요,
금광을 겸해서하는 큰부자였고 그 가문은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보수적인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던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로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테이트 선교사의 말을듣고 나서 조덕삼은 선교사 앞에서 고백을 합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의 말을듣고 이제 이렇게 마음이 후련하고 시원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저는 인생에 대해서 몹시 궁굼하고 마음이 답답했던 처지에 참으로 제 마음을 열어주게 했습니다.
선교사님 .앞으로 우리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보도록하십시다."
바로 이 고장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였습니다.
그런데 금산교회가 시작되는데에는 또 한명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 있습니다.
그게 일제시대이래 조손야소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번이나 지낸 이자익목사님입니다.
이자익 목사님는 당시 조덕삼의 집에서 마구간에서 일을하던 청년머슴이였습니다.
이자익의 고향은 본래고향은 남해입니다.
그는 3살 때아버지를여의고 6살때 어머니마저 잃은 뒤 고아가 되어 호구지책을 위해서 걸어서 걸어서 전라도 땅까지왔고.
그 곳에서 다시 곡창지대라고하는 김제땅으로 당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조덕삼을 만난 이자익 청년은 무척 인상이 좋았던지 그 자리에서 바로 마부로 채용이 되고 그렇게 조덕삼 집안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자익의 청년은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총명하여 조덕삼 집에 머슴으로 있으면서도
틈틈이 독학을하였고 또 주인을따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금산교회에 진기한일이 일어납니다.
그 것은 얼마후 교인이 70명, 아니 나중에는 2백명이 넘게 늘어나자 장로를 한명 피택하게 되었습니다.
장로 투표에는 조덕삼과 그의 머슴 이자익이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반상을 따지던 구한 말 당시.
주인과 머슴이 장로 경쟁투표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피택투표 결과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당선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모두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조덕삼은 이 모든 것을 수용 하였습니다. 조덕삼은 곧 바로 교인들 앞에서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
그는 주일마다 머슴 이자익청년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자익은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고 지주 조덕삼은ㄱ자교회당 마루에 끊어않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반대로 조덕삼은 주인자리에 앉고
이자익은 청년장로는 그 밑에서 인부 노릇을 하며 성실하게 주인을 섬겼습니다.
조 집사와 최의덕 선교사는 이 장로의 믿음을 귀하게 여겨서 학비를 후원하여 1910년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시켰는데 5년 만에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때도 조덕삼씨가 앞장서서 이자익 목사를 모 교회인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신실한 목회와 덕스러운 생활은 널리 알려져서
1924년, 1947년, 1948년에 세 차례에 걸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습니다.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배후에는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훌륭한 후원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사학자 김수진 씨는 "머슴 이자익이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실한 신앙에다 훌륭한 인격자였던 조덕삼씨의 사랑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금산교회에서는 그 어려웠던 일제말엽에 조선기독교를 끌고 가는 대들보 총회장을 세번이나 지내는 인물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금산교회는 날로날로 번성하였습니다. 믿음도 뜨겁고 충만하였습니다.
한때는 금산교회의 종소리가 금산사에서 울리는 인경소리보다도 더 크게 울려퍼졌다고도 합니다.
교회는 비록작지만 법리를 지키고 주일성수 하는데 아주 엄격하였습니다.
도박을 하거나 부모불효을하면 가차없이 제명 출교도 시키고 체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보수적이던 금산교회는 아주 색다른 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의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특히 사외적인 문제에는 매우 개방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진취적이었습니다.
또 조덕삼장로는 금산교회 부설로는 유광학교를 병행하여 청소년 민족교육을 시켰습니다.
망국의 서러움에 허덕이는 당시를 생각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한글과 한국역사와 성경을 가르쳤고 심지어는 일제말까지도 태극기 그리기를 시켰습니다.
조덕삼의 아들 조영호장로가 뒤를이어 유광학교 교장을 맡았는데 그는 필경교장을 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ㄱ자교회당이 100년이 되도록 기둥하나 석가래하나 상하지 않고 원형 그데로 남아 있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건물만 남긴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믿은과 사랑도 함께 남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뜻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금산교회는 정말로 작고도 큰 교회의 역사 자리매김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크신은혜와 축복이 항상 그 곳에 충만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조덕삼 장로같이 겸손한 분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진다면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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