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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시사.

내가 본 미국 911. 그리고 세월호참사..

by 설렘심목 2014. 5. 2.

참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다.

사고후에도 똑같이 밥먹고, 일하고, 잠자는 일상을 보내면서

"이래도 되는걸까?"하는 마음

하지만,

그나마 이런 최소한의 염치, 최소한의 죄책감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 질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

.

.

그렇지만, 과연 이렇게 잊어야 하나?

또 한번, 여느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남은 가족들은 통곡하고, 국민들의 가슴은 미어지고...............그러다 지치고

결국 잊혀지도록 두어야 하는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다.

2001년 9-11 테러가 났을때,

나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가까운 맨하탄 미드타운의 현장에 있었다.

그것도 건물 맨 꼭대기층 펜트 하우스,

건축 관계자들이 아침 8시부터 미팅을 하고 있었는데, 한사람이 갑자기 하늘을 가리켰다.

"왜, 비행기가 저렇게 낮게 날아가지?"

그리고 이 건물들이 붕괴하기까지 시시각각의 상황을 내 눈으로 보았다.

보면서도 믿을수 없던 놀라운 광경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끔찍한 패닉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사건 발생후의 뉴욕 시민들과 공무원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처럼 남아있다.

건물이 무너질 상황에서 오히려 건물을 향해 달음질하던 소방대원들, 구조 요원들,

죽음의 순간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던 시민들,

사건 이후에 느낀것은

또 다시 이런 재난이 닥쳐도,

죽음을 무릅썼던 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행동을 똑같이 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평범했던 사람들을 그토록 용기있게 만들었을까?

오랜 시간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이었다.

1987년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몇주를 형님이 살고있던 서부지역에서 지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의 작은 타운에서 살고 있던 형의 집에 머물며

근교에 있던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모로베이(Morro Bay)등을 방문했었다.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자랐고, 강남 1세대쯤 되는 도시 뺀질이지만

80년대말 보았던 이 도시들의 아름다움과 부유함은 허걱스러움 그 자체였고,

말로만 듣던 미국의 풍요함에 한없이 기가 죽던 느낌이었다.

그리고, 뉴욕에 왔다.

1987년의 뉴욕은 거대했고, 세계의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서부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아수라장이라고 표현해야 딱 좋은 상태였다.

시내 한복판에서 버젓이 마약을 팔던 딜러들,

섹스숍과 홈레스들, 어두운 범죄의 냄새가 짙게 풍기던 42번가 뒷골목

건물들 또한 크기는 했지만 더럽고 낡은 유물처럼 보였다.

이게 내가 꿈꾸던 뉴욕이었나 하는 실망감이 상당기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신기한 모습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의 오만 별별 국가 출신들이 빠짐없이 뉴욕에서 살고 있었고,

귀에 들리는 언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게다가 생활방식까지 천차만별이었는데,

현재 코리아 타운의 남쪽 브로드웨이에서 일하던 나의 눈에 들어온 장면 하나.

이 지역에는 많은 아랍인들이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고,

종교적으로 매일같이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 무슬림들,

쬐그마하던 사원이 비좁아 도로에까지 자리를 깔고 절을 하는 풍경을 보고는 했는데,

아이고 세상에, 여기가 미국 맞아?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게 도로 점거 허가는 물론, 안전하게 경찰이 지켜주기까지 하는 이 배려는?

온갖 민족에, 온갖 종교에,

이 거대도시가 어떻게 이런 모든 종류의 모순과, 불합리와, 다양함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유지가 되는걸까?

도대체 무엇이 이 도시를 지탱시키는 걸까?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은 도대체 뭘까?

내 눈에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고, 커다란 의문이었다.

1988년에는 드디어 전공을 살려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현장 수퍼바이저로 취직한 나의 첫 프로젝트는

오래된 건물을 완전히 개조해서 로프트(loft) 스타일의 콘도미니엄을 만드는 것이었다.

1988년에 내가 로프트가 뭔지, 콘도미니엄(당시 한국에서 콘도는 휴양지의 아파트식 호텔을 말하는 것이었다.)이 뭔지 알았겠나,

그냥 도면대로 건축 지시를 했다.

그런데 이 건물, 이 당시에 이미 100년이 넘은 건축물이었다.

세상에! 철거를 하지..........ㅠㅠ

하지만, 공사 이후에도 25년이 지난 지금의 건물 모습은

음..... 내가 공사한 이후 25년이 지났는데 아직 그대로군

25년이 지난 지금도 꿋꿋하게 잘 서있는 이 건물

요즘 매물로 나온 아파트 하나는 현재 이런 모양이란다.

내부도 내가 공사했을때와 별로 달라진것 없군.

그런데, 처음 시작한 뉴욕의 건설 현장은 정말 난리판이었다.

현장의 인부들은 대충 10개국 이상의 나라 출신이었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언어는 도대체 단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언어들이었다.

영어로 서로 대화를 하고 작업을 지시하기는 했지만, 영어가 서툴기는 모두가 똑 같았다.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작업지시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공사는 진행이 되었고, 거기에 더해 신기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말단 건축기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던 나는

으례히 오고가던 돈봉투들, 매일같이 벌어지는 술판에,

아예 돈을 수금하러? 오는 검사관에 공무원들까지,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공사판의 온갖 비리는 다 보고 듣고, 경험도 할수 있었다.

그런데,

뉴욕에서는 아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밥과 술을 사거나 봉투를 건넬 필요가 없었으며,

심지어 자재를 주문하면 똑같은 스펙의 자재가 납품되는 것이었다.(이 당연한 일이 신기했을 정도니)

게다가

한국에서 레미콘이라고 부르는 프리믹스된 콘크리트를 주문했는데

채취한 샘플로 나중에 검사를 해 보니 강도가 주문했던 것 보다 오히려 더 나오는 것이었다.

이거 믿을수 있는거야?

그리고,

깨달았던 것은

뉴욕에서는 내가 부정을 저지르거나 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었다.

나는 감동하기 시작했다.

도면대로,공사 시방서대로 하면 되는구나,

그냥,

법대로, 원칙대로 하면 되는구나!

놀랍고, 반갑고, 기쁜 경험이었다.

그리고 몇년후 1995년에는 한국에서 삼풍백화점 붕괴가 일어났다.

아직도 보고도 믿을수 없는 장면인데,

건축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자재를 부실하게 사용하고, 눈가림 아웅공사를 해도

건물이 갑자기 이렇게 붕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수 있다.

게다가 이런 지경이 되려면, 사고의 징후는 이미 장기간 나타나는 법이다.

그리고, 이미 위험한 상황이 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은 무너지는 건물에서 제일 먼저 탈출한 이준 회장인데

경찰 조사를 받다가 몰려든 기자들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 피해도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

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여기서 말하는 손님들의 피해는 사망자가 502명 부상자가 1,000명을 말한다.

그리고, 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사고는 항상 일어날수 있고,

일어날수 있는 모든 사고의 가능성을 0으로 만들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세월호의 사고가 국민들을 애통하게 하고, 극도로 분노하게 만드는 이유는

마땅히 책임지고 수습해야 할 사람들이 제일 먼저 도망갔고,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남을 질책하고, 면피하고, 몸보신을 위해 초지일관 하는 모습 때문이다.

9-11 테러가 일어난 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이 다양한 인종과 출신의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가는지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이들이 미국에 살면서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 관습들에 동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멜팅팟(melting pot)이나 샐러드 보울(salad bowl)같은 단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사회적인 현상들과,

인도인들과 파키스탄인들이 한 집에 모여 살고,

대만인과 중국인들이 같이 차이나타운을 이루고,

유대교 사원 바로 옆에 무슬림 사원이 버젓이 있지만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고,

고난을 같이 극복하는 사회적 전통과 가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월호의 도망치기 바빴던 선장과 선원들 또한 피해자였을지 모른다.

배는 제대로 운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고,

아무리 얘기해도 개선은 커녕 해고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

언제 짤릴지 모르는 임시직에, 쥐꼬리만한 월급 받으며 나이까지 고령,

한치 앞을 볼수없는 현실 속에서

"내가 왜 이런 대우 받으면서 개죽음해야 하나?" 이런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고 초기에 허둥대기 바빴던 해경, 황당한 공무원들,

선체의 결함과 수많은 불법운항을 눈감아준 해운조합,

해운조합의 불법을 눈감아준 해양수산부 그 해양수산부는 또 어디로..............

지금은 이 모든 관계자들이 사고를 방조하고 공모한 범죄자로 취급되지만,

평상시에 이들은 범죄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민이었을 뿐이다.

심지어,

반가운 이웃이고, 따뜻한 식구에 형제들이고, 부모, 자식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

관피아, 철밥통에 뭐에 공직사회를 대수술한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자신의 최측근들부터 해당사항 1순위.

게다가, 자기 자신마저 포함해야 할텐데 과연 사정이 이루어질까?

그게 아닌것 같다.

지금 한국은 사회적 가치를 시험받고 있는것 같다.

민주주의를 시험받고 있고, 도덕과 시민의식을 시험받고 있는 중인것 같다.

혹독하기 그지없는 댓가를 치루면서.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우리의 헌신과 용기와 의지를.

작은 국가가 감당할수 없는 역사적 비극과 고난들 속에서 살아남았고,

자랑스러운 현재를 이룬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바이러스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

용기또한 전염이 된다.

세상을 바꿀수 있는 의지또한 전염시킬수 있고,

우리의 헌신으로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것을 믿고, 전염시켜야 한다,

믿고, 행동해야 한다.

그 이외에는 방법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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