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기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강정구 교수는 19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했으며 1965년 부산고 졸업 후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왔다. 1981년 도미해 템플대에서 1983년 사회학 석사, 1985년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사회학 석사, 1987년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 교수는 1988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해 한국사회론, 정치사회학 등을 강의했다. 2005년 ‘6·25전쟁은 통일전쟁이었다’라는 논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찬양, 고무) 혐의로 불기소된 후 2006년 2월 학교당국은 교수직위를 해제했다. 교수직위가 해제되면 강의를 할 수 없으며 연구비 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그러나 교수 신분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어서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교수 직위가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강 교수는 학교당국과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강 교수는 1996년 한국산업사회연구학회 회장과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했으며 동아시아 한국학연구센터에서 초청교수(1996~1997)로 참여하면서 연구활동을 했다.
강 교수는 1996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약칭 민족회의) 정책위원장을 거쳐 1998년 공동의장으로 활동했으며 1999년 베트남진실위원회 대표, 2002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약칭 평통사)’ 지도위원을 거쳐 현재는 평통사 공동대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맡아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강정구의 이중성
강 교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표적인 급진좌파 지식인이다. 국내의 학자들은 강 교수의 이념성향에 대해 그를 정통좌파 또는 급진적 민주주의자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외부평가에 대해 강 교수 자신은 “정통 좌파는 아니지만 좌파는 맞다”면서 “정확히 표현하면 ‘민족민중민주주의자’로 봐야 할 것 같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통일시대의 북한학’ 등의 저서나 각종 세미나에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책임론을 주장하는 등 강한 반미성향을 보여 왔다. 또한 강 교수의 저술과 논문의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철수와 반미, 통일과 평화와 같은 주제와 담론에 치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 교수의 미국과의 인연은 매우 친미적이다. 강 교수의 큰아들은 미국의 대형 법률회사에 취업했으며 둘째 아들은 카투사군인)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또한 강 교수의 부인 노모 씨(모 대학 의대 교수)는 1980년 노 씨가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난 뒤 이듬해 노 씨의 설득에 의해 강 교수도 미국행을 선택,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두가 미국과 상당히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간 강 교수의 큰 아들은 중학교 1학년까지,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미국 현지 학교를 다녔다. 큰 아들의 경우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뒤 2003년 시카고대 로스쿨에 입학, 올해 6월 졸업한 뒤 미국의 대표적 법률회사(로펌) 중 하나인 ‘클리어리 고트리브 스틴 앤드 해밀턴’에 다니고 있다. 또한 둘째 아들은 강 교수가 안식년을 맞은 1995년 함께 미국으로 가 현지 고교를 다녔으며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쳤다.
강 교수는 저작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통해 친북적 정향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2000년 잡지의 기고문에서 “광복이 되었을 때 만약 외세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북한 뿐만 아니라 남한도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그 당시의 역사적 필연”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강 교수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아마도 2001년 평양에서 개최된 통일대축전에서 생긴 일 때문이다.
‘만경대 정신’글로 남겨
2001년 평양 통일대축전에 참가한 강 교수는 김일성 생가를 방문한 뒤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라는 글을 남겼다. 소위 ‘만경대 정신’사건은 2001년 평양 통일대축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남남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만경대는 김일성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북한에서는 성지로 간주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 파장은 클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강 교수가 방명록에 남긴 ‘만경대 정신’의 의미는 김일성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정부는 8월 20일 청와대에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회의를 열고 방북단 인사의 사법처리 방침을 확인했다. 방북단이 귀환하자 강정구 교수, 김규철(범민련 부의장), 임동규(범민련 광주전남의장), 문재룡(범민련 서울부의장), 김세창(범민련 중앙위원), 박종화(범민련 광주전남 사무국장) 전상봉(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의장) 등을 구속했다.
‘만경대 정신’을 방명록에 서명한 강 교수가 21일 김포공항에서 당국에 연행되기 직전 낭독한 메모가 또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메모에서 ‘만경대 정신’이란 “민족을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한 사람을 기리고 자손에게까지 명예와 보상을 내림으로써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해 민족정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김일성 주석 가문이나 주체사상을 찬양할 의사가 없었다. 단지 순간적으로 나타난 단상(斷想)을 방명록에 가벼운 마음으로 썼다. 만경대 정신이라는 개념을 언론이 확인도 없이 멋대로 왜곡 과장해 문제 삼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통이라는 과정이 필연적이라고 본다. 방명록 기재라는 사소한 일 때문에 진통을 겪는 것은 민족과 통일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주문하고 했다. 이는 자기방어를 위한 논리적 비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다”
강 교수는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대업 이룩하자’는 소위 ‘만경대 정신’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강 교수는 구속된 20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돼 공판이 2002년 8월까지 모두 8차례 열렸으나 이적성 문건에 대한 감정서가 제출되지 않아 재판을 속행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강 교수는 보석된 상태에서 ‘부시방한 반대시위’에 참여하는 등 반미활동을 지속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장군 동상을 놓고 ‘사수-철수’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강 교수는 2005년 인터넷 신문에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기고문을 통해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으로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소위 통일전쟁 논쟁을 점화시켰으며, 보수단체의 반발을 불러왔다. 보수성향의 시민단체 회원 820명은 강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고, 강 교수에 대한 재판은 2005년 12월에 재판이 재개됐다. 재판은 ‘만경대 정신’사건과 ‘통일전쟁’ 사건은 1심에서 병합심리를 받게 됐다. 실로 3년 만에 공판이 재개된 것이다. 강 교수는 이듬해 5월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징역2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어 2007년 11월 2심 선고공판에서는 1심형량과 같은 징역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다”
강 교수는 “국방백서에 주적을 미국으로 명시해야 한다”며, “미국과 한미동맹 운운하는 것은 도둑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강 교수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11번의 전쟁 위기 중 9번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며 “이 땅의 전쟁 주범은 북한이나 남한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라는 게 명백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이쯤 되면 2004년 국방백서는 주적을 지울 것이 아니라 주적으로 미국을 명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힐난했다.
이어서 강 교수는 2005년 5월 국회와 평화통일연구소가 개최한 ‘2004 국방백서 바로잡기’ 토론회에서 “우리 민족의 국방백서라기 보다 미국의 작은 국방백서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주장한 뒤 국방백서를 ‘대미 용비어천가’라고 규정하며 “국방백서는 미군 주둔을 정당화해 민족자주를 훼손하고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고취함으로써 통일에 걸림돌로 작용, 평화를 저해해 왔다”고 맹비난했다. 또한 “국방백서는 과거 한미동맹을 그야말로 평화지킴이로 평가하고 있다”며 “그야말로 맹목적 대미 추종주의,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 민족 자폐주의 등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고 주장하면서, “국방백서와는 정반대로 미국과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평화지킴이가 아니라 전쟁위기 주도자, 곧 전쟁주범”이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전쟁위기의 주범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으로 미국주도의 전쟁위기는 핵전쟁까지도 상정하고 있다”며 “남북주도의 전쟁위기는 우발적 충돌에서 비롯됐으나 미국주도의 전쟁위기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의 반미 활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도가 강화되어가는 것 같다. 그는 2005년 9월 30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민교협) 주최의 한반도 정세 토론회에서 ‘한미관계의 비판적 검토와 새판짜기’라는 발제문을 통해 “한미동맹의 본질적 속성상 반민족적, 반평화적, 반통일적, 예속적이며 한국전쟁 때 미국이 남한을 도와줬으니 우리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맹목적 보은론의 포로로 사로잡힌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한미군사동맹은 철폐돼야 하며 한미관계는 한중, 한일 관계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우호친선협력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며 “민족 공조와 탈미 비동맹 중립의 위치에서 ‘동북아 경제평화협력체’를 구성해 동북아의 장기적 상생 구도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
강 교수는 2006년 ‘한국언론을 말한다’라는 강연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개입을 두고 “‘가상의 적’(미국)이 평양까지 온 데 대한 ‘보가(保家)’ 개념의 방어전쟁이었다”라며 반미를 거침없이 주장했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좌파세력의 운동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집요하게 계속됐다. 동상철거문제가 최초로 표면화한 것은 2004년 11월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등 10여개 인천의 좌파계열 시민단체들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면서 이를 시내 연수구 옥련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데서 비롯됐다.
강 교수는 ‘데일리스프라이즈’에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6·25전쟁을 ‘통일전쟁이자 내전’이라고 전제한 뒤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며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 명에게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라고 규정했다. 이어 그는 6·25전쟁 당시 일어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맥아더 장군이 중국과 북한에 원자탄 투하를 주장했던 것을 지적한 뒤 “거의 대부분은 그들이 ‘구세주’로 모시는 바로 그 당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이런데도 생명 은인이라고 동상을 세우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금지야 옥지야 껴안고 있어야겠다고 폭력몰이와 색깔몰이까지 벌리는 판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고 비판하고, “맥아더는 오직 이곳 남한 땅에서만 아직도 웅대한 동상으로 위용을 보여주면서 죽어서도 역사를 왜곡하고 오염시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며 “아직도 맥아더의 허물 속에 갇혀 냉전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를 넘어서고 또 이 허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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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놈은 기껏 배워서 간첩질하는 한심한 놈..그옆에 서있는 얼간이들하고는..ㅉㅉㅉ
너희들 공상당이 뭔질 안다음엔 후회해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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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
written by. 최옥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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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왜곡하고 전쟁사를 날조하던 강정구는 시민단체에 의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하고 그를 성토하는 단체들은 동국대학교로 찾아가 강정구를 교수직에서 파면하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하는가 하면 자유청년 개척단에 의해 그의 사진이 불에 타는 장면이 속출하기도 했다. 아들을 미국에 유학 시키고 아내도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나 결혼을 하고 강정구 본인도 미국에서 유학하여 교편을 잡게 되었다면 그 가족들은 가히 미국 사대주의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은 미국 덕분으로 얻어 먹으면서 머리는 반미 친 김일성을 연구하는 기형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동국대학교 제자로부터 『교수님, 부끄럽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어야 하는가?
그런 면에서 강정구는 김정일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있었음에도 김정일은 핵을 포기하지 않았고 1994년에 이르러서는 NPT를 탈퇴하고 IAEA 핵사찰을 거부하며 핵 개발을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그들의 핵개발을 위한 속임수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이제는 정말 다시는 핵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소위 제네바 협정이란 협약을 체결하고 김정일이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명분으로 핵을 개발할 것을 우려하여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경수로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다시 국제사회는 김정일이 핵을 개발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식량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김정일은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핵을 개발하지 않는 조건으로 경수로도 건설하여 주고 식량도 지원하여 주었지만 김정일은 핵탄두를 보유하게 되었다. 밥은 국제사회로부터 얻어 먹으면서 머리는 핵개발에 치우쳐 있는 김정일의 모습과 강정구의 모습이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김정일은 핵의 폐기냐 아니면 몰락이냐를 놓고 양자 택일을 해야 하며 강정구는 왜곡된 역사관을 버리느냐 아니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번째의 구속이냐를 놓고 양자 택일을 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강정구와 노동신문의 커넥션]
강정구와 강희남의 맥아더 장군의 동상 철거 농성을 놓고 북한의 노동신문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마치 강정구는 노동신문의 논설위원인 듯 노동신문의 논조와 강정구의 주장이 한치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2005년 7월 31일 노동신문은『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대변인담화』라는 제목으로 『남조선의 반미투쟁단체인 《미군추방투쟁공동대책위원회》는 인천시청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세계 그 어디에도 외국군인의 동상을 세워놓고 보호하는 곳은 없다고 하면서 즉시 맥아더의 동상을 철거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집회 이후 맥아더 동상 앞에서 무기한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는 내용을 서두로 시작된다.
『이에 호응하여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매일같이 시민단체들의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들도 맥아더 동상 철거의 정당성과 절박성을 적극 여론화하는 등 투쟁을 날로 고조시키고 있다. 지금 《한나라당》의 민족반역세력은 《맥아더를 점령군의 괴수로 운운하며 철거하려는데 대해 우려를 감출 수 없다》느니, 《국가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재향군인회》등 친미보수분자들을 사촉하여 롱성참가자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망동을 서슴지 않고있다.
무고한 우리 동포형제들을 참혹하게 학살하고 삼천리강토를 폐허로 만든 전범자인 맥아더의 동상철거를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친미에 환장한 매국노들만이 할 수 있는 극악한 역적행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이 미군의 남조선강점 60년이 되는 올해에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되찾고 미국군대가 없는 새 세상, 자주와 통일의 새 력사를 창조하기 위한 반미반전, 미군철수투쟁에 더욱 힘차게 떨쳐 나서리라는 확신을 표명한다 』로 끝을 맺는다. 강정구가 국가의 정통성 민족의 정통성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그의 주장의 끝은 미군의 완전 철수 이다. 김정일의 전략과 꼭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8월 2일 노동신문의 논설은 더욱 가관이다. 논설의 제목은 『증오와 폭파의 대상』이다. 논설은 이렇게 시작 된다. 『맥아더로 말하면 지난 세기 50년대에 미국이 도발한 조선침략전쟁시기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우리 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적군사작전을 직접 조직 지휘한 침략군괴수였다. 전쟁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최대최악의 살륙과 파괴작전을 감행하여 삼천리조국강토를 겨레의 피로 물들이고 폐허로 만든 극악한 살인자, 전범자가 다름아닌 맥아더이다』
6.25를 미국이 도발했다는 것과 맥아더를 전범자로 취급하는 강정구의 주장과 비교하면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미군의 완전한 철수를 목적으로 한 강정구의 주장과 노동신문의 주장은 맥을 같이 한다. 노동신문은 『증오와 폭파의 대상』이란 논설의 말미에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남조선인민들의 맥아더동상철거투쟁은 단순히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군사적 강점과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다. 남조선인민들은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을 강점하지 않았다면 민족분렬의 가슴 아픈 비극도 없었을 것이고 자기들이 지금처럼 침략자들에게 갖은 민족적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일도 없을것이라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사생결단의 의지를 안고 반미 자주화투쟁에 떨쳐나선 것이다』 라고 맺는다.
[세계적 양민학살의 주범은 맥아더가 아니라 김일성]
강정구가 비판 받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김일성이 기습 남침한 6.25를 통일전쟁이라 하며 미국의 도발로 전쟁이 발발 하였다는 주장은 역사와 민족사를 날조 왜곡한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분단의 비극이 미국의 도발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주장도 상통하고 있다. 미군이 6.25 당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주장도 북한의 주장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무고한 양민을 누가 학살 하였는가? 인민군 치하에서 빨치산이라 일컫는 완장 찬 『바닥 빨갱이』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 아니었나?
그 바닥 빨갱이들에 의해 숨진 무고한 양민의 수가 또 얼마인가? 무려 13만명에 이른다. 빨치산들에 의한 양민의 학살은 20세기 들어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세계적 3대 학살은 Warsaw Getto(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학살과 남경 대학살 그리고 한국의 6.25 당시 빨치산에 의한 학살을 말한다. 빨치산들의 양민학살이 세계 3대 학살에 꼽히는 이유는 학살 행위가 상상을 초월 할 만큼 잔인하고 잔혹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양민 학살에 사용한 것은 총과 같은 무기가 아니고 삽 도끼 곡괭이 등과 같은 흉기를 사용하여 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붉은 완장을 차고 무고한 양민들을 인민재판이란 이름 아래 삽과 곡괭이로 내려 쳐서 살인을 했다. 그들의 잔혹한 학살의 대상은 무고한 양민들을 비롯하여 경찰관과 우익 인사들에게 까지도 자행 되었다. 경남 김해에서 있었던 노무현의 장인 권오석도 인민재판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상사인 면장을 비롯하여 이웃 주민들을 11명이나 삽으로 내려 쳐서 학살한 사실을 우리는 독립신문 다큐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한 후 배를 갈라 간을 씹어 먹거나 경찰관의 배에 소나무 말뚝을 박는가 하면 심지어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반공인사 600여명을 철사 줄로 꽁꽁 묶어 놓은체 휘발유를 끼얹고는 웅덩이에 생매장을 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혹한 만행이 저질러 졌다. 전주 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 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으로 던져 졌으며 대전 형무소에서는 1742명이라는 우익의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 일거에 학살 되기도 했다. 그들은 특히 종교인들을 표적 학살 하기도 했다. 목사 신부 수녀들이 학살의 대상이었으며 신원이 밝혀진 숫자만 170여명에 달한다.
[南은 외세종속 北은 자주와 주체의 나라]
북한의 노동신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생결단의 의지를 안고 반미 자주화투쟁에 떨쳐 나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강정구의 주장도 다를 바가 없다. 강정구는 2002년 출간된 『민족의 생명권과 통일』이란 저서에서 북한의 사회주의를 가리켜 『민족사적 필연인 사회주의』라 주장하고 남한의 민주주의를 『야만적 美군정에 좌절』하였다고 주장 한다. 또한 남한은 외세종속이라 하고 북한은 자주와 주체의 나라라고 한다. 국가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는 북한이 남한을 능가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강정구의 김일성 우상화 노릇을 엿볼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높은 수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강정구! 그의 주장은 또 이렇다. 『사회주의 지향성이 해방 공간 조선사회의 보편적 현상이고 민족사의 필연에 가까운 것임을 확인하였다.<중략>그러나 이 내재적 역사행로는 미군정의 거대하고 야만적인 억압에 의해 남쪽에서는 좌절됐다. 그리고는 종속적 자본주의로 강제됐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의 엄청난 희생이 따랐고 민중의 생존권은 처참하게 짓밟혔으며 민족사적 핵심과제는 실종돼 반역사적 행로를 걷게 됐다.<중략>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조선사회 고유의 내재적 민족사 행로를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6.25를 통일전쟁이라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김일성에게 전쟁 발발 책임을 지우는 것은 한국 전쟁의 총체적 구도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라는 억지를 쓴다. 또한 6.25 남침을 왜곡하는 부분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침략개념은 바로 미국이 타국의 순수내전에 무력개입한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미국의 침략행위로 한국전쟁은 대량의 파괴와 살육이 난무하는 민족 재앙으로 치달았다. <중략>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을 경우 몇 주 이내 북한주도로 민족통일이 이뤄졌을 것임을 입증한다. <중략> 민족해방전쟁에서 민족해방 세력이 몰락의 위기에 몰린 10월 말 중국인민군이 참전하여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돼버리고<중략>』하는 주장 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강정구의 사고(思考)는 김일성의 사고와 100% 똑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남침한 것은 통일을 위한 전쟁이고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한 행위는 침략개념으로 즉 타국의 순수 내전에 미국이 무력으로 개입하였다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단 몇 주 이내에 북한 주도로 통일이 이루어 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일성과 생각이 똑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강정구를 사람들은 빨갱이라 부르는 것이다. 김일성이 몇 주 안에 통일을 이루었다면 적화통일이요 우리에게 있어서는 국가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인데 강정구 본인은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천지가 되지 못한 것을 이렇듯 한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한스러움과 강정구의 한스러움이 같다. 그래서 미국은 침략자로 규정하고 맥아더 장군을 전범자 취급을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주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김정일이 주한 미군을 철수 시키고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하는 주장과 강정구의 주장이 또한 같다. 결국 이들이 별별 단체에 이름을 걸고 이루고자 하는 최종적 목적은 주한미군의 완전한 철수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강정구는 미군 철수에 관하여 『주한 미군의 철수 쟁취는 마치 난공불락의 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패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베트남민족해방전쟁에서 민족해방전선(NLF - 베트콩)이 구정공세(Tet Offensive)로 미국 여론을 자극하여 반전운동에 불을 지핌으로써 미국의 군사력을 무력화시킨 역사적 교훈을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이렇게 주장 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강정구 그는 바로 김일성의 분신 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교수로 남느냐 아니면 김일성과 같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로 남는가 하는 양자 택일의 기로에 놓여 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바른 말이 빛을 못 보는 나라가 나라인가?]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며 맥아더 동상을 던져 버리자는 놈은 아직도 동국 대학교 교수로 있다. 그러나 8월1일 무조건적 대북 지원은 김정일을 기사회생 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편 바 있는 통일 선임 연구원 홍관희 박사는 퇴임 기자회견을 갖고 조용히 사퇴를 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다. 홍관희 박사는 금년 민족정론 시사 지에 『6•15선언의 반(反)민족성과 무효화를 위한 과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해 『6.15 선언의 무효화와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이를 확산․보편화 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 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이 때부터 홍관희 박사에게 사퇴의 압력을 넣기 시작 했다.
세상이 변해도 참으로 많이 변했다. 잘못된 대북 정책을 바로 잡으려는 의로운 자는 사퇴를 해야 하고 숨어 지내던 친북 좌파들은 이제 대 놓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지켜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자고 덤비니 정말 가관이 따로 없는 일이다. 8.15 사면에 한총련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노무현 정부를 놓고 보면 이제 그림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고려 연방제의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붉은 완장을 찬 놈들이 우리의 배를 갈라 간을 씹어 먹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써내려 오면서 온 몸에 힘이 빠져 도저히 더 써 내려갈 자신이 없다. 강정구는 아래 제자들의 말을 유념하길 바란다.
[강정구 제자의 글로 맺는다]
북한은 6.25전쟁을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치밀하게 준비해 일으켰으며, 이미 김일성은 해방 이후부터 분단 정권 수립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련 극비문서가 공개되면서 낱낱이 밝혀지고 있다. 현재 북한은 전례 없는 수령독재와 기아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90년대 중반에는 6.25 전쟁 희생자에 버금가는 300만 명이 아사했다.
어떻게 이런 현실을 목전에 두고 6.25 전쟁이 통일 위업을 달성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이를 방해한 미군이 6.25 전쟁 희생자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교수님은 과거 미국이 개입하지만 않았어도 통일될 수 있었다는 통일 '그 자체'만을 강조함으로써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많은 학생들을 호도하고 있다.
개인이 알고 있는 사실(사실이건 아니건)에 대해 누구나 표현할 자유가 있는 우리 나라지만 그것이 학생을 가르치는 신분일 때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자신의 사상이 여과 없이 학생들에게 주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경대 방명록'사건이 잊혀져 갈 즈음 또다시 이런 이야기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교수님의 무책임한 발언을 듣고 있노라면 동국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제자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자유북한방송)
최옥화(동국대 북한학과 4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