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21. 주일낮예배<엡3:7-9)바울이 받은 선물 ‘이방인의 사도’>
어느 날 저는 공원벤취에서 쓰러져 시체처럼 누워 추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노인을 보면서 순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노인이 태어났을 때 엄마의 젖을 물며 얼마나 귀여움을 받던 아기였을까? 저 노인은 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런 인생으로 변했을까?”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부모님을 만나서 육신을 얻고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존재에 깊은 질문을 하며 여러 경로를 따라 여러 계층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 모양의 길을 가게 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 어느 날 갑자기 결정된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반복된 삶의 모습이 지금 저와 여러분으로 굳어져 이렇게 예배당에서 만난 겁니다. 늘 고백하지만 예배당에서 만나니 오늘도 주님께 감사하고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강권적인 부르심으로 만나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가던 길을 180도 돌이켜 유턴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색출해 산헤드린공회에 넘김으로 유대교에 충성하던 전망 밝은 총명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를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꿔 놨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고백처럼 이방인의 사도로서 지극히 겸손한 전도자가 됩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벌어진 일입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전적으로 계획하시고 주장하신 일방적인 사건입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1. 하나님의 예정된 선물입니다.
본문 7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바울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 근거를 본 절에서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된 경위는 곧 육체로 이방에 있던 우리가 구원받은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바울의 회심, 하나님의 예정된 선물, 그것은 첫째,
1) 그리스도의 능력과 역사입니다.
에베소서 2:19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나 선민 이스라엘이 주님을 거부하고 우리 한반도에 복음이 전파되어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찌 인생의 작은 가슴과 머리로 헤아려지겠습니까? 헤아려지는 분이라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만 믿어드리는 것 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유념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 일을 유념해야 합니까? 왜 기뻐해야 합니까? 그 일이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과 주권에서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녕 그리스도의 전적권한과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사람의 생각과 길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일에 제대로 헌신돼 있었습니다. 어느 누가 충고하거나 설득하려해도 그의 굽히지 않는 신념을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오직 주님만이 사람을 바꿉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변화받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까? 주님의 절대하신 주권아래 맡겨드리고 간절히 구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예정된 선물, 그것은 둘째,
2) 거저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사도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선물입니다. 기뻐하라고 거저 주는 게 선물입니다. 구원은 전혀 값없이 받은 새생명입니다. 그 값은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때 남김없이 청산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우리가 치른 게 아무 것도 없고 한 일이라곤 믿으랄 때 줄기차게 도망치고 화내고 욕한 것뿐입니다.
롬8:12절에서 바울사도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권면합니다. 복음에 우리가 지불한 아무 것도 없음으로 우린 복음에 빚을 지게 되었단 사실은 누구나 늘 복음 앞에 겸손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저주신 구원 앞에 뭔가 대가를 치르려 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행여 구원의 감격이 손상되거나 거저 받은 구원에 떳떳해진다면 이는 실로 영혼의 무서운 함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된 선물, 그것은 셋째,
3)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가수는 노래할 때 행복합니다. 화가는 그림그릴 때 행복합니다. 교회는 언제 행복합니까?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할 때입니다. 교회는 복음운동을 통한 죄인구원이 본질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복음으로 기뻐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복음이 예수그리스도인 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는 매우 중요한 명령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50절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영생인 복음의 능력이 예수 우리 주안에 있어서 그의 택하신 뜻을 따라 이제 저와 여러분, 곧 우리 교회들을 통하여 땅끝까지 전파되기를 명령하셨다는 데에 큰 기쁨으로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복음이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복음을 위한 것, 즉 복음운동을 위해 헌신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결정과 거기 따른 하나님의 활동인줄 믿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바울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일방적인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바울은 어떻게 응대했는지 사도행전22:1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행22:10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가로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정오쯤 갑자기 공중에서 큰 빛과 바울을 친히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는 즉각적으로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어찌하면 되겠냐고 반문합니다. 이 반문은 지극한 순종의 표현입니다.<애드립>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선물 ‘이방인의 사도’ 그것을 위한 선물 두 번째,
2. 사도 바울의 겸손입니다.
“주여 종이 무엇을 하리이까?” 참으로 저와 여러분 입술에 영원히 붙여두고 싶은 말입니다. 주여 종이 무엇을 어찌하면 되겠나이까? 바울사도의 고백을 더 들어보기로 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교회 안에 매우 작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체격이나 외모가 아닙니다. 영향력도 없고 하는 일도 없고 없어도 표가 나질 않아서 찾지도 않는 사람, 자신은 그 사람보다도 더 작은 자라고 말하는 바울, 그는 진정 대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인 거인입니다.
칼뱅선생도, 한경직목사님, 개혁주의설교의 거봉 석원태목사님을 비롯한 교계의 거성들이 한 한결같은 말, “성도의 덕목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겸손목회가 능력목회나 은사목회나 감성목회보다 앞서 갑니다. 그래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바울에게도” 부활주님의 승천을 보여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배꼽이 덜 떨어진, 그냥 우리말로 덜 떨어진 바보같은 자신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겸손, 어찌 주님이 이러한 자를 귀히 쓰지 않겠습니까? 주앞에, 교회앞에 “저는 지극히 작은 자 입니다.”라고 서슴없이 진실로 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선물 ‘이방인의 사도 그것은,
3. 하나님속에 감추어있던 비밀의 경륜입니다.
본문 9절을 함께 읽습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안에서 그동안 비밀의 경륜 속에 묻혀 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요. 이방인의 구원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했을 뿐 이방인의 구원은 공평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의 마땅한 구속운동이 때를 따라 나타난 것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들 개인과 가정에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마치 비밀처럼 감추어져 있는 것같이 보이는 구원의 역사가 아직도 진행되어가는 과정가운데 우리가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진행중인 가운데서 함부로 결론을 속단하고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의 감춰진 경륜의 비밀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보아 마땅합니다.
당시 누가 감히 이방인이 구원받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여자와 이방인과 개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존재자체를 부정당하는 저들의 전통 의식세계라면 이방인의 구원은 매우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이시요, 무소부재이신 하나님께 파격은 없습니다. 늘 변함없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다만 때에 따라 행하실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모습에 너무 집념하셔서 주눅 들지 않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을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께선 사람이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경륜가운데 결코 식지 않는 사랑으로 지금도 우릴 향한 좋은 일들을 진행시켜가고 계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을 분명히 확신하며 기다리며, 소망이 오직 예수께 붙들린 자로 넉넉히 살 것입니다.
잠시 우리 눈을 감은 채 기도하길 원합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는 분들은 일어나서 오른 손을 높이 드셔도 좋습니다.
“이시간 여기 살아계신 주님이 우릴 기뻐하시고 여전히 모든 우리들의 영적인 소망을 주님의 비밀하신 경륜가운에 일점의 오차없이 진행하시는 줄 우리가 믿습니다. 성령이시여, 지금 오셔서 각사람의 심령을 만져주시고 소망가운데 주님의 경륜을 절대신뢰하는 깊은 믿음을 내려주옵소서. 믿음만이 능력인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능력된 삶을 살게 도우셔서 온전하신 주의 뜻이 세상가운데 저희를 통하여 우리교회를 통하여서 이 조국과 민족을 통하여 남김없이 넉넉히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를 받으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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