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 결혼, 논란의 핵심 문제와 신학적 검토
목회와 신학 2013년 7월호
최근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지난 5월 프랑스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인정하는 14번째 국가가 됐다. 미국에서도 12개 주가 이를 인정하고 있으며 현재 연방대법원은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결혼 보호법(DOMA, Defense of Marriage Act)의 위헌성 여부를 가리는 심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판결은 동성 결혼 합법화로 흐르고 있는 현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판결의 결과나 내용에도 불구하고 동성 결혼 합법화 문제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것은 동성 결혼을 마치 1960년대 일어났던 흑인 민권 운동과 유사한 일종의 게이 혹은 레즈비언 민권 운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서구 사회의 문화적 흐름은 대체로 이를 관용하고 조금씩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이미 서구 교회 안으로도 흘러 들어와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개신교단인 미국 장로교(PCUSA) 총회는 2011년 5월 목사에게 “배우자와의 결혼 언약에 신실하거나 독신으로 살 경우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법 조항을 삭제하기로 한 총회 결정을 노회 수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통과함으로써 30여 년에 걸친 논란을 종식하고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직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동성애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성 결혼 허용에 대해서도 문빗장을 열어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동성 결혼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언제까지나 예외일 수는 없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난 10여 년간 동성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송을 꾸준히 탔고 처음과 달리 이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도 조금씩 줄어드는 분위기다. 특히 20대 젊은이들의 40% 정도는 동성애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런 여론조사에 비춰본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의 동성 결혼에 대한 태도도 바뀌게 될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교회 역시 이 흐름에서 비켜나지 못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서구 사회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현상을 주시하면서 논란의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신학적으로 잘 정리해 대책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결혼의 의미와 정의의 문제: 두 당사자의 문제인가?
동성 결혼 합법화 논쟁에 있어서 우선적인 관건은 결혼의 의미와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다. 결혼이라는 것을 두 당사자 간의 사랑과 행복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또 그들만을 위해 제정된 제도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결혼의 범위와 목적이 당사자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만약 결혼을 두 당사자에게만 관련된 좁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논쟁의 핵심은 ‘결혼이 남자와 여자 간 결합인가 아니면 단지 두 사람 간 결합인가’로 천착될 것이다. 동성 결혼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결혼을 단지 성(gender) 구별 없이 두 사람이 결합하는 것으로 볼 것이고 이에 따라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들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가정을 가질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고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결혼이란 제도의 의미와 목적이 두 사람과 관련된 지평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한가?
현재 서구 사회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 운동이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캐나다 맥길대학교 법학 교수인 소머빌(Margaret Somerville)은, 동성 결혼 합법화 운동은 결혼을 우선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 행복, 권리의 문제로 이해하고 그 관점에서 재정의하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혼을 그 사회에서 자라는 어린이들과도 관련된 제도로서 그 중요성에 큰 의미를 부여해온 입장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소머빌 교수에 따르면, 동성 결혼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우선적으로 결혼 당사자들의 문제이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게 될 자녀들은 이차적인 문제다. 따라서 동성 결혼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비록 결혼 제도가 문자적으로는 자녀와 관련해 정의되지 않는다 해도 실상 아이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사실 아이들은 결혼으로 형성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고 또 그 안에서 자라왔다. 전통적으로 사회는 그 사회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의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 권리와 또 그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양육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또 이것을 일종의 규범으로 여겨왔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아이들의 권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제도이고, 그래서 결혼이 문자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든 간에 실질적으로 아이의 권리와 결코 분리돼 정의될 수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결혼을 당사자의 권리 차원으로 환원해 그 의미를 재정의하려고 하는 것은 그 동안 인류 사회가 받아들였던 규범을 더 이상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오랫동안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여겨지던 규범을 폐지하는 것은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형성해온 여러 중요한 토대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사람들은 사회적 합의만 이뤄진다면 결혼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가능하고 그에 따라 합법화도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껏 인류 사회가 받아들였던 규범을 폐기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더 신중한 검토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은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인가?
또 다른 논란이 되는 것은 결혼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이기 때문에 시대와 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그 내용과 형식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사회가 합의만 하면 결혼도 재정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서구 사회가 결혼을 이성애자들의 결합으로 받아들인 것이 다분히 기독교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다문화 흐름이 지배적인 오늘날에는 이런 생각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성 간 결혼을 규범으로 고수하는 것은 후기 기독교·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적 결혼 윤리와 문화를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결혼관을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영향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객관적 검증이 충분하지 않은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결혼에 대한 기존 인식은 기독교뿐 아니라 이슬람이나 힌두교와 같은 타종교 전통에서도 강하게 공유돼왔다. 결혼이 어떤 특정한 종교나 문화가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제도라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고 증명한다. 그러므로 결혼을 특정 시대가 빚어낸 사회적 산물로 보기보다 인간의 본유적 도덕관념에 따른 제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으로 생각하며 시행해온 것은 인간이 지닌 본유적 도덕, 즉 자연법적 질서에 따른 결과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결혼 관행과 법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결혼에 대한 신학적 이해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로 인식하지만 성경은 신적으로 구축된 제도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신 후 인류를 위해 결혼 제도를 직접 만드셨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창 2: 24).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며 심히 기뻐하셨다(창 1:31). 즉 성경에 따르면 남녀의 성 구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사역과 설계의 산물인 것이다.
두 번째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남자를 위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다(창 2:18).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연합해 한 몸을 이뤄 살아가는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다. 본래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기에 이 둘은 본래 하나였다가 두 개체가 된셈이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아내로 맞이하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로 소리친 것은 남자가 본래 자기 몸에서 나왔던 여자를 맞아 다시 한 몸 됨을 이루게 된 것을 재확인하며 기쁨으로 탄성을 발한 것이라고 구약학자 악트마이어(Elizabeth Achtemeier)는 분석한 바 있다.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결혼에 대한 창조 기사의 정의, 즉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그리고 한 몸 됨’은 신약에 와서 다시 예수님에 의해 확인되고 재천명된 바 있다.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4-5). 성부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재천명하신 결혼의 의미와 정의, 이것만큼 기독교회에서 권위 있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외에 어떤 다른 정의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은 범죄한 이후 창조주 하나님의 설계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남자와 남자로 더불어 관계를 맺는 반창조적 행동을 하게 됐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극명하게 대조하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는 인간이 저지르게 되는 도전 행위로 묘사했다(롬 1:18-32). 남자가 남자를 취하는 행위는 창조 시 하나님이 세우신 순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결혼은 인간적 제도가 아니라 신적인 제도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창조 시에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고 인간은 본유적으로 이에 대한 인식과 도덕적 실천 의지를 갖고 살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고 영화롭게 섬기며 그분의 질서에 따라 살려고 하기보다 자기와 피조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겼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도덕적 부패에 유기되고 순리를 거슬러 역리를 행하려 하게 됐다. 결혼의 내용을 재정의하고 시행하려는 것도 이런 과정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결혼 제도를 만드신 목적은 신학적으로 여러 분석을 내놓을 수 있지만 놓치지 말아야 한 것이 있다. 첫째는 결혼 생활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신비하게 연합하고 서로 온전해질 수 있다. 이것은 혼자 살 때 누리기 힘든 서로에게 좋고 유익한 것이다(창 2:18-24). 둘째, 결혼은 두 사람이 배타적으로 헌신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삼자를 끌어들여서는 안 되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가를 때까지 일평생 함께 동반자로 엮이는 것이다. 셋째, 남편과 아내는 연합을 통해 신비롭게 한 몸이 되고 그 결실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결혼은 이런 면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다. 우리는 창조 기사와 성경의 가르침 안에 천명돼 있는 결혼의 의미와 목적에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과 한 몸 됨’ 그리고 ‘자녀 출산과 양육’은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 사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과 무관하게 결혼을 재정의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거나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새로운 종류의 결혼 제도 생성 개연성
결혼 제도가 인간이 만든 제도요, 사회적 산물이라고 이해한다면 동성 결혼뿐 아니라 다른 형태의 결혼 관계도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노년기의 사람이 미성년자인 아동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고 서로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하자. 서로 합의했다고 이를 허용할 수 있을까? 만약 아버지와 딸이 또는 어머니와 아들이, 형제와 자매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근친 결혼도 허용하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대부분의 문명 사회에서 거부하는 중혼, 즉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도 사회적 합의만 이뤄진다면 가능한 것인가? 동성 결혼의 논리를 따르게 되면 이와 같은 문제는 계속 발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결혼은 언제나 열리게 될 것이다.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절충적 제도로서의 시민 결합
한 사람과의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며 살려는 동성애자들이라면 이들도 이성애자들처럼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적어도 이런 사람들에게 결혼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동성애자들이 결혼에 준하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음을 존중하는 것과 결혼을 재정의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결혼의 의미를 새로이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해 너무나 많은 사회 문제와 혼동을 낳고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교과서 내용 개정, 입양과 양육과 결혼에 관련한 각종 법령 개정 등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다시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또한 매우 거세다.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해 과연 사회가 그런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이 문제는 결혼을 재정의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지 않고 동성애자들에게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회 전체를 위해 나을 수 있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는 많은 동성애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상당 수준 누리고 있다. 이성애자들처럼 자신의 성적 욕구를 자유롭게 채우거나 동거를 하며 이로 인해 처벌받는 일은 없다. 20여 개국에서는 동성애자들에게 시민 결합(civil union) 형태로 부부에 준하는 권리를 보장해준다. 취업이나 직장생활 혹은 공직 수행에도 어떤 차별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시민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누리고 있고 성(性)적 지향성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 결혼 찬성론자들은 비록 동성애자들이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을지는 모르나 이성 부부가 받는 혜택과 권리를 상당 부분 제약받고 있기 때문에 결혼의 지위를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보험 가입, 사회보장, 상속세 감면, 대리 위임권 등의 혜택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처럼 복합적인 문제를 갖고 있거나 야기하기 때문에 결혼을 재정의하고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기보다 이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법이나 제도를 가능한 선에서 개정하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절충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서구의 20여 개국에서 인정하고 있는 시민 결합의 형태를 띨 수 있을지 모른다.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서방국가에서는 동거하는 동성애자들에게 결혼에 준하는 법적 권리를 상당 부분 인정해주고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다루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방안이 신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성 결혼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성애 행위를 어떻게 보느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동성애 행위를 창조의 본성과 질서에 부합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시민 결합 제도를 대안으로 제안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동성애 행위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분명한 분석과 설명을 제시하는 저자는 바울이다(롬 1:18-32).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의 반역과 우상숭배에 대해 분노하시고 인간을 도덕적 부패 가운데 내버려두신 결과로 인간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동성애 같은 성적인 행동을 일삼게 됐다. 그래서 이런 신학에 근거한다면 사실 시민 결합도 찬성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적 신념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는 불신 사회에서 공공선을 위해 함께 의논하고 그들이 공감하는 수준에서 보편적 논리와 선(善) 의식을 고려해 대안을 제시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기보다 절충 방안으로서 시민 결합을 허용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시대 문화와 ‘정치적 올바름’의 압력 그리고 문화적 대응 전략
이런 문화적 추세 가운데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롭게 대응해나갈 필요가 있다. 현재 사회 계층적 정서와 사고 기류를 볼 때 일반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젊은 지식인들은 동성 결혼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관용적인 입장을 보이는 반면 보수적이거나 나이 들거나 학력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나타낸다. 그래서 동성 결혼을 지지하면 진보적인 지식인처럼 비춰지고 반대하면 고루하고 보수적이라는 평을 듣기 쉽다. 심지어 ‘동성애자 혐오증’이라는 딱지마저 붙는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철저한 반대론자가 아니고는 많은 사람들이 비록 거부감을 갖더라도 본인의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기를 꺼려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한다. 특히 지식인이나 젊은이들 가운데서 시대적 흐름과 문화적 분위기에 눌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 그 결과 찬성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크게 들리고 그 소리가 대세로 간주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적 분위기에 눌려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대응을 한 것이지만, 암묵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마음에 새기면서 어떻게든지 자신의 입장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압력 완충 장치를 개발해가야 한다. 실제로 동성 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중시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몰아가기를 좋아하고 일부 진보 언론들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다루곤 한다. 그러나 사회 정치적인 태도에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것을 반대하거나 이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동성 결혼 문제의 본질은 사회적 성향이나 소수자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 이전에 도덕적인 문제다. 동성애 또는 동성 결혼에 대한 태도는 인간 사회의 기본 질서인 가정과 결혼에 대한 이해와 생각에 관련된 지극히 철학적이면서도 도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소수자 인권 옹호 내지 진보적 아젠다를 가늠하는 이슈로 몰아가려는 태도는 정직하지 않거나 신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 점을 날카롭게 간파해 어떤 대응이 적절한지를 깊이 숙고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책임 있게 수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도 일종의 문화 전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문화 전쟁에서 안이하게 방관하는 것이 매우 무책임한 태도임을 인식하면서 기독교 공동체와 더불어 더욱 치밀하고 적절한 문화 대응 전략을 함께 세워가야 할 것이다.
필자 정보 - 신 원 하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보스턴대학교(Ph.D.). 저서로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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