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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영화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게임 秘史 - 조갑제닷컴

by 설렘심목 2013. 2. 21.
2013년 2월21일


한국인 5000만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 사람 덕분이다!

‘인민의 徹天之怨讎(철천지원수)’, ‘美帝(미제) 침략자’. 북한이 미국을 지칭할 때 쓰는 수식어다. 왜 이렇게 부를까?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南侵(남침)이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 한반도에서 赤化(적화)통일을 이뤄내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 5000만 한국인은 미국 덕분에 김정은 治下(치하)가 아닌 대한민국 땅에서 번영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63년 전 미국은 왜 한국에 派兵(파병)했을까? 趙甲濟(조갑제) 기자가 6·25 休戰(휴전) 60주년을 기념해 쓴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秘史(비사)》(200쪽, 1만 원, 조갑제닷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韓民族(한민족)을 위하여 하늘이 낸 사람’, 해리 S. 트루먼 당시 美 대통령의 세 가지 결단이 한국을 살렸다고 말한다.

1950년 6월24일(미국 시간), 해리 S. 트루먼 美 대통령은 주말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었다. 밤 9시 잠에 들려는 대통령은 김일성의 南侵(남침)보고를 받는다. 트루먼은 보고를 받자마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sons of bitches)을 막아야 합니다”라며 미군 파병을 결심했다. 그때 트루먼은 한국에 파병해야할 아무런 조약상의 의무도, 전략적 利害(이해)관계도 갖지 않았다.

1950년 12월, 맥아더의 誤判(오판)으로 中共軍(중공군)의 기습을 허용한 유엔군은 곳곳에서 포위, 차단당하며 패주했다. 맥아더는 “原爆(원폭)을 쓰든지, 중공을 공격하지 않으면 한국을 구할 수 없다”며 비명을 지르고, 동맹국 영국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은 워싱턴으로 날아와 한국을 포기하고 미군을 철수시켜 유럽 방어에 투입하자고 압박한다. 그런 애틀리에게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도와주면 좋습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리면 미국을 믿고 함께 용감하게 싸웠던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우리는 困境(곤경)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트루먼을 잊은 한국인

1951년 6월25일 트루먼이 소련의 休戰(휴전)협상 제의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휴전이 조인된 것은 1953년 7월. 휴전회담이 2년간 이어진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공산군 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했고 트루먼은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만 교환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트루먼은 휴전회담 중 한 연설에서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넘겨주는 代價(대가)로 휴전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세 번 한국을 살린 트루먼의 결단 덕분에 우리는 지금 번영과 자유를 누리면서 잘 살고 있다. 그 한국인들이 트루먼을 잊었다. 트루먼이란 이름이 붙은 거리, 공원, 기념물이 없다. 임진각 공원의 한 귀퉁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그마한 트루먼 동상이 있을 뿐이다. 6·25 전쟁 휴전 60주년을 맞아 ‘트루먼 대통령 기억하기 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 조직, 나라가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아무리 머리가 좋은 민족이라도 恩人(은인)을 잊으면 고생한다. 그래서 이 책을 펴낸 것이다”라고 출간 의도를 밝혔다.

| 책 속으로 |

1950년 6월24일(미국 시간) 해리 트루먼 美 대통령은 주말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었다. …밤 9시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을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메릴랜드에 있는 집에서 건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78~79페이지

전용기 안에서 그는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게 하여 저녁식사를 겸한 고위 대책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약 세 시간의 비행시간 중 트루먼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들어갔다.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
저녁에 전용기 인디펜던스號(호)가 워싱턴의 국립공항에 착륙했다. 애치슨 국무장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이 마중 나와 있었다. 리무진을 타고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로 향하는 車中(차중)에서 트루먼은 말했다.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 자들이 代價(대가)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80페이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난이 심각했던 영국은 중국시장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을 화해시키고 싶어 했다. 영국 정부는 그 과정에서 한국이 희생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애틀리의 압박에 대해서 트루먼 대통령이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도와주면 좋습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리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편에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130페이지

하버드 대학의 고풍어린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숨을 바친 20여 명의 하버드생 병사들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전사했다.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전사 학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지나는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표지는 없다. 존경하는 소대장님, 용감한 대대장님, 그리고 생명을 던져 진지를 지켜낸 병사들의 얘기는 입으로만 전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戰後(전후) 팔을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했다.
-137페이지

<한국전쟁의 休戰협상 중 가장 골치 아픈 案件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우리는 미군 포로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로 걱정이 많았다. …1952년 1월1일, 우리가 휴전협상에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만 교환해야한다’는 제안을 함으로써 가장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문제에선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1952년 5월7일 내가 한 연설에서 내 마은 속에 있던 생각을 정확하게 담은 구절이 하나 있었다.
“인간을,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도록 넘겨주는 代價로 휴전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165페이지



머리글\5000만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 사람 덕분이다
1장 체코 대통령에게 보낸 스탈린의 놀라운 편지 발견!
2장 韓民族(한민족)을 위하여 하늘이 낸 사람
3장 트루먼의 결단: “한국에 파병하라”
4장 中共軍(중공군) 침공
5장 두 번째 결단: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
6장 맥아더 해임, 그 뒤
7장 “인간은 거래 대상이 아니다”
8장 “대통령은 최고의 홍보맨이라야”
9장 스탈린의 최후
부록\유엔軍 참전 주요 일지 및 6·25 전쟁 통계
趙甲濟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월간조선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전 13권)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