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론: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목회와 신학 2013년 6월호
창조주가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필자가 미국에서 섬기던 교회에는 석사와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불신자나 초신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필자는 불신자나 초신자가 교회에 오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들과 함께 ‘기독교 신앙은 과연 진리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고 그 세미나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목사님, 저는 이제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겠는데요,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이 꼭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야 될 좋은 이유라도 있나요?”
사실, 이 질문은 참 중요한 질문이다.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신이 꼭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인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아닌가?’라는 의문은 많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우주를 통해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의 속성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
논리적으로 유추한 창조주의 속성들
그렇다면, 우주를 만든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일까? 논리적으로 볼 때, 창조주는 다음과 같은 속성들을 지녀야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원리들, 즉 자연 법칙, 질서, 복잡성, 도덕성, 정보, 의미성, 목적성, 인격성 등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첫째, 창조주는 우주를 만드셨기에 우주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주의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주를 초월하며 우주와 구별되는 분이다.
둘째, 창조주는 지성적인 분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질서 속에서 운행되고 있고, 약력, 강력, 중력, 그리고 전자기력 등을 포함한 수많은 우주 상수들이 미세하게 조정돼 있어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도록 조율돼 있다. 또한 생명체의 DNA는 복잡하게 설계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의 질서와 미세 조정, 그리고 생명체의 복잡성을 고려해 볼 때 창조주는 지성적인 분이어야만 한다.
셋째, 창조주는 인격체로서 도덕적인 분이다. 창조주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만들기로 결정한 분이다. 이러한 속성은 신이 인격체임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은 인격체이면서 도덕적 존재다. 그러므로 인격체인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는 인간보다 더 완벽한 인격체며 도덕적인 존재여야만 한다.
넷째, 창조주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 분은 우주를 지성적으로 디자인 하셨을 뿐만 아니라, 신의 능력으로 우주를 조화롭게 운행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어야만 한다.
다섯째, 창조주는 정의롭고 사랑이 충만한 분이다. 창조주는 세상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정의로우신 분이며, 피조 세계의 정의와 아름다움을 유지시킬 만큼 거룩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정의, 그리고 사랑이 창조주의 인격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이러한 덕목을 추구할 수 없으며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창조주는 우주의 근원이고, 지성적이며,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요, 전지전능하고 정의롭고 완벽한 사랑의 속성들을 갖고 계신다. 만일 이러한 속성을 가진 창조주가 없다면 우리는 우주의 기원, 질서, 생명체의 복잡성, 아름다움, 도덕성,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 논리로 추론해 볼 때, 창조주는 반드시 위의 속성들을 모두 갖춘 분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속성들을 모두 갖춘 창조주는 과연 어느 종교에서 주장하는 신(God)일까?
창조주의 속성을 모두 갖춘 신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여러 신관들의 유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신관의 종류로는 유일신론(monotheism), 다신론(polytheism), 그리고 범신론(pantheism)이 있다. 유일신론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해당된다. 다신론은 신이 여럿이라는 주장이며, 범신론은 우주 자체가 신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유일신론, 다신론, 그리고 범신론의 주장을 하나씩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자.
첫째, 유일신관은 신은 한 분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유일신론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신의 정의에 가장 잘 부합된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신의 정의는 무엇인가? 신은 최고의 존재(the Greatest Being), 가장 완전한 존재(the Perfect Being)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요, 가장 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신은 최고의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신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신은 더 이상 신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신의 정의와 관련해 이런 질문을 한다. “목사님, 하나님이 왜 최고의 존재며 완전한 존재입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이 경우에 필자는 그 질문자에게 다시 질문한다. ‘총각이 왜 결혼 안 한 남자입니까?’ 왜 총각이 결혼을 안 한 남자인가? 원래 총각의 정의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왜 가장 완전하고 최고의 존재인가? 원래 우리는 그런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가장 완벽한 최고의 존재는 단 한 분뿐이다. 그러므로 유일신론은 신에 대한 정의와 가장 잘 부합된다.
둘째, 다신론은 어떠한가? 다신론은 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다신론은 문제가 많다. 우선 신의 정의에 위배된다.
가장 최고의 존재며 완벽한 존재는 한 분뿐이다. 그런데 만약 둘 이상의 신들이 있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그 신들 사이에 상하관계가 형성된다. 서로 충돌하고 상하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완전하고 최고의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상하관계에 있는 신들은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누군가가 만들 수 있으면 신이 아니다. 또한 만들어진 신은 우주의 궁극적 기원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가장 완전하고 최고의 존재는 단 한 분밖에 없다. 이처럼, 다신론은 우리가 믿기엔 많은 논리적 모순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셋째, 힌두교와 같은 범신론의 유형이 있다. 범신론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신이며, 우주 자체가 신이라고 믿는다. 범신론은 우주 자체가 궁극적인 존재요 신이기 때문에 우주를 만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영원하지 않다. 우주는 시작이 있고 끝도 있다. 우주는 우주 대폭발과 함께 시작됐고, 모든 연료를 다 태우며 서서히 죽어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만약 우주가 죽는다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신들도 우주와 함께 죽게 된다. 범신론에서는 우주가 신인데 우주가 죽으면 과연 누가 우주를 구해 줄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범신론의 한계며 약점이다.
이처럼 신관들의 유형을 하나씩 분석해 보면, 힌두교의 범신론과 다신론은 논리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완전하면서도 최고의 존재라고 믿는 유일신론이 가장 논리적으로 합당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왜 기독교 신관이 가장 합당한가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뿐이다. 그러면 이 세 종교 중에서 과연 어느 종교의 신관이 최고의 존재며 완전한 존재인 창조주 하나님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가? 어느 종교가 인격적이며 지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전지전능한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의 개념과 일치하겠는가?
이슬람은 유일신을 믿고 있지만 인격적인 신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알라’는 세상을 창조한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알라는 인간의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 자신을 희생하는 신이 아니다. 또한 알라는 유일신이면서 한 인격만 가졌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못 되며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이슬람과 유대교는 그들의 신관에 삼위일체 하나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최고의 존재며 완전한 존재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설명하지 못한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한 분이지만 그 위격은 세 분, 즉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돼 존재한다는 교리다. 이것은 ‘1+1+1=1’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1×1=1’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도 신적 속성을 가지고 계시고 성자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속성을 가지고 계시며 성령 하나님도 신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지만, 그 한 하나님 안에는 각각 개별적인 의지와 인격을 가지신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 신관은 논리적인 것인가? 비록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지만 논리적 모순이 없으며 오히려 논리적으로 가장 타당한 신관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되새긴다면, 하나님은‘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최고의 존재’이다. 완벽하고 최고의 존재는 그 존재의 본질상 오직 한 분뿐이다. 완벽한 최고의 존재는 둘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일신(monotheism)이다.
또한 그 유일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도 완전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체로서 사랑하는 분임을 의미한다. 사랑은 인격적인 행위로서 관계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 사랑이란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다른 인격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한 분 뿐이면서 한 인격만 가졌다면 그 사랑의 대상은 누구겠는가? 교제의 대상이 없다. 바로 이런 문제점을 가진 신관이 이슬람의 신관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본질적으로 한 분뿐이면서 오직 하나의 의지만 가졌기 때문에 다른 인격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런 신은 완전하고 최고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랑하지 못하는 신은 완벽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반드시 완전해야만 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이기에 오직 한 분뿐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도 완벽하게 사랑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한 분뿐이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신은 본질적으로 유일하면서도 세 인격을 가지신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면서도 세 인격을 가졌기에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완전한 사랑을 본성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가장 논리적으로 타당한 신관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시며 모든 것을 알고 설계할 수 있는 전지자며 지성적인 존재다. 그 분은 도덕성을 부여한 인격자여야 하고 죄와 죽음과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정의로우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장 완전하고 최고의 존재다.
이러한 속성들을 모두 갖춘 신은 과연 어느 종교의 하나님인가? 다른 종교가 주장하는 신은 이런 판단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앞서 귀납법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특성에 꼭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은 분명히 기독교에서 경배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며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사랑이 충만한 분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요,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필자의 강의를 들은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이제 저는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 삶에 왜 중요합니까?” 이 같은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가?
우리는 자문해 봐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과연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나의 인생에 왜 중요한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왜 중요한가를 알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만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 존재의 중요성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없다면
정말로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첫째,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삶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에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 주장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끼리 어떠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우리끼리 도덕을 만들고 착하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만든 도덕과 의미 부여는 분명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한 시대가 지나고 상황이 바뀌게 되면 지난 시대의 도덕은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그것들이 궁극적인 가치와 인생의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이나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다면 그 어떠한 궁극적인 가치도 존재할 수 없고, 객관적인 도덕성도 없으며,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지낸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창조주의 뜻과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손목시계를 보라. 시계는 자기가 왜 바늘을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시계가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계를 만든 사람은 그 시계의 목적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목적을 물어보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인생에게 주어진 의미와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요, 최고의 행복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은 궁극적인 희망을 상실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저 죽으면 끝이다.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결국은 절망에 빠진다. 왜 그러한가? 그 이유는 인간이 죽어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다면 죽음을 이길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생존할 방법이 없다. 인간이 질병과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없는 것이다.
예컨대,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던 사람이나 사고로 인한 장애로 평생을 고통 가운데 지내다가 죽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 사람들이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절망적이다. 이처럼 무신론의 끝은 절망적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무신론 철학자들은 방탕하게 살았거나 그들의 종말이 비참하고 절망적이었다. ‘인생은 절망이다.’라고 주장한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마지막 여생을 허무하게 마감했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는 생의 마지막 17년 간을 미쳐 날뛰는 광인으로 살다가 죽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이 절망적이고 비참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이 좀 더 나은 내일을 살아 보고자 하는 노력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면 결국 절망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고 그 분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질병과 고통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고통과 슬픔이 희망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확신하고 소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망의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과 죄악, 그리고 질병을 심판하고 해결하실 그 때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귐을 갖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면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하나 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체험할수 있고 그 분의 사랑을 누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어느 초신자가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사랑한다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게 나타나서 ‘내가 하나님이다. 나를 믿어라’ 하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믿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공감 가는 질문이다. 비록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권능으로 놀라운 기적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적인 권능을 보여주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놀라움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지 진정한 인격적 사귐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특별하게 창조됐다. 그래서 자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존경이 아니면 어떠한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인격적인 순종이나 교제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진정한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 이러한 진정한 교제는 인간에게 너무나 큰 영광이며 유익이고 행복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복 주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를 주셨고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질 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지 않고 하나님 없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 바로 이것이 죄다.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되고 분리되면 그 삶의 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뿐이다. 지옥의 삶이란 다른 게 아니다. 이것이 지옥의 삶이다. 지옥이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다운 존재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한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가 바로 지옥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목적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이들이 얻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다. 인간이 지음 받은 본연의 목적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추방과 영원한 분리가 바로 지옥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끝까지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하면서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영원히 분리된다. 이것이 영원한 죽음이다. 그래서 지옥 자체는 형벌이고 엄청난 고통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인간이 마음을 돌이키기 원하신다. 그런데 한 번 빗나간 인간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완고해지고 교만하며 자기중심적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심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직접 보여주기로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자신의 권능을 보이거나 인간을 협박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로 결심하셨다. 하나님은 겸손하게도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받으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두 팔을 넓게 벌리시고 ‘내가 이 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이고자 하셨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나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신다. 말로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온 몸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길 바란다.
주위에 아직도 하나님의 존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는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① 당신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다. ② 당신은 당신 삶에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③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그 분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으며,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영원한 절망이냐, 아니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냐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전해보자.
필자 정보 - 박명룡
큰나무교회 담임목사. 탈봇신학대학원(D.Min.). 저서로 《예수는 신화가 아니다》, 《기독교! 지성으로 이해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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