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의 공동체가 추구한 제자도
목회와 신학 2013년 6월호
교회, 예수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이며,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라고 고백한다.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였고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해왔다. 그리고 교회가 단지 행정적인 기구나 정치적인 제도가 아니라 영적 공동체여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모인 교회는 종종 기구나 제도로 변질될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를 갈망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삶, 가난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오롯이 살아 내는 제자이고자 했다.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예수님이 몸소 걸어가신 그 좁은 길을 묵묵히 뒤따르며 살아가는 제자이기를 원했다. 필자는 교회사 가운데 나타난 이런 제자들의 공동체 가운데 12세기에 등장한 발도파, 16세기에 형성된 후터라이트의 브루더호프, 18세기에 나타난 친첸도르프의 헤른후트 공동체를 살펴보고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진지한 성찰이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제자도는 어떤 것인지에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자도를 추구한 역사 속의 공동체들
1. 발도파 공동체
발도파(Waldenses) 공동체는 12세기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피에르 발도(Pierre Walde 혹은 Valdes, c.1140-c.1218)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일부 학자들은 발도파 운동이 피에르 발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발도파의 고대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에 따르면 발도파라는 명칭은 개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사도 시대 이후 계곡(valley)에 살면서 제자도를 실천하려고 했던 일단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으며, 12세기 프랑스의 발도가 그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발도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피에르 발도 이전에 토리노의 감독이었던 클라우디우스(Claudius, 827년 사망)나 투르의 베렝가리우스(Berengarius, 1088년 사망)가 계곡에서 거주하던 발도파의 지도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의미한 교회 개혁 운동으로서의 발도파는 12세기 프랑스의 피에르 발도에게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발도파의 아버지를 피에르 발도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발도는 성공한 상인이었지만 성 알렉시우스(St. Alexius)의 생애에 감명을 받고, 또 가까운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으면서 신앙적 각성을 경험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주신 말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에 순종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쫓았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가난을 택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에 동참했다. 이들을 가리켜 ‘발도파’ 혹은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발도파 운동은 처음부터 자발적 가난, 성서에 대한 애착, 복음 선포에 대한 강조가 그 특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에 따라 철저한 가난을 이상으로 삼아,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기부금과 탁발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나갔다. 또한 성서를 강조해 누구든지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프로방스 지역의 언어로 신약을 번역해 배포했다. 이것은 라틴어 외의 현대 언어로 성서를 번역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런 점에서 발도파는 ‘오직 성서’를 주창한 종교개혁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성서를 들고 행상인으로 가장해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발도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할 의무를 지닌다고 말하면서 평신도 설교권을 주장했다. 이 또한 종교 개혁자들이 주창한 ‘만인제사장설’의 선구적인 형태라 할 것이다. 이처럼 발도파는 개신교 전통의 원조에 해당한다.
1179년 발도와 그의 동료들이 로마로 가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보편적 제사장설, 대중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것, 자발적 가난에 대해 설명했으나 이들의 ‘위험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발도는 1184년 베로나 대회에서 교황 루키우스 3세에 의해 파문을 당했고 발도파의 교리는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로서는 라틴어 성서의 권위를 무시하고 함부로 성서를 ‘천한’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나 자격도 없는 평신도들이 설교하는 일을 용인할 수 없었다. 또한 발도파가 연옥을 인정하지 않고, 죽은 자를 위한 미사와 속죄를 위한 보속에 반대할 뿐 아니라 로마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교황권이나 권력에 대한 서약을 거부한 것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발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면서 여전히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가르치고 설교했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발도파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 조직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발도파는 쫓기는 이단자들이 되어 그들의 이름처럼 계곡으로, 산으로 피신해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발도파는 개혁 교회와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개혁 교회도 1532년 10월 12일에 개최된 발도파의 샹포랑(Chanforan) 대회에 기욤 파렐과 앙투안 소니에를 파견했다. 또한 칼뱅이 서문을 쓰고 올리베탕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서가 1535년 뇌샤텔에서 출판됐는데, 발도파의 자국어 신약성서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비록 발도와 칼뱅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도파는 이제 칼뱅의 신학과 연결됐다. 발도파는 1559년 채택된 프랑스 개혁 교회 신앙고백에 기초해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채택했으며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개의 성례를 인정하고 컨시스토리를 통한 치리를 받아들였다. 그로인해 발도파는 프랑스의 소위 ‘위그노 전쟁’ 동안(1562-1598) 칼뱅주의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였던 위그노들과 함께 박해를 받았다. 오늘날까지 발도파 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1에 속해 있다.
역사에서 패자이자 소수자였던 발도파는 그동안 알려질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왜곡돼 알려졌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발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했지만 사실 그들의 활동은 13세기 초에 일어났던 탁발 수도회,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왜 프란체스코는 성인이 되고 발도는 이단이 됐을까? 그것은 프란체스코는 교황과 교회 권력에 순명을 약속했지만 발도는 교황권을 비판하고 교회 개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발도를 이단으로 정죄한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는 발도파의 중대한 오류가 ‘교회 권력에 대한 경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성서에 기초한 그리스도 제자의 삶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했으며, 복음을 들고 어디든지 찾아가 전하려 했던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 원했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현재 발도파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의 남서쪽에 위치한 토레 펠리체(Torre pellice)에 근거를 두고 공동생활을 하고 있으며, 토레 펠리체와 로마에 신학교를 두어 자신들의 사상을 전수하면서 지켜나가고 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유럽과 미국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에 흩어져서 그들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발도파는 복음을 선포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기고, 사회정의를 진작시키고, 종교의 다양성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는 등 21세기의 역사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2. 브루더호프 공동체
브루더호프(Bruderhof)란 ‘형제들이 더불어 사는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도교 공동체다. 브루더호프의 기원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 시 이른바 재세례파라 불리던 사람들 중에 모라비아 지역에 거주하던 일단의 사람들이 성인 세례, 형제애, 단순한 생활 그리고 평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제도화된 교회를 떠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공동체를 꿈꿨다.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야콥 후터(Jakob Hutter)의 이름을 따라 이들을 후터라이트(Hutterites)라고 부르며 이들의 공동체는 ‘브루더호프’ 혹은 ‘자치 공동체’(Colony)라고 부른다. 이들 후터라이트는 메노 시몬스의 후계자들인 메노나이트(Mennonites), 야콥 암만의 후계자들인 아미쉬(Amish)와 더불어 재세례파의 직접적인 후손에 속한다.
후터라이트의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발도파와 마찬가지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을 버리고 모든 소유권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사유재산을 거부하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실현했던 ‘재산 공유 공동체’를 실천하고자 했다.
또한 절대적인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군 복무와 전쟁세를 거부했다. 이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따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했다. 이런 후터라이트의 삶의 방식은 당시 사람들 눈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으로 비쳐 국가와 교회, 양측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진 박해를 겪으면서 후터라이트는 모라비아에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오늘날 후터라이트는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돼 있다. 슈미드로이트(Schmiedeleut), 다리우스로이트(Dariusleut), 레흐레로이트(Lehrerleut)가 그것인데,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 분열됐다기보다 각 그룹의 지도자 이름을 따라 자연스레 나뉜 것이다. 현재 후터라이트의 숫자는 약 4만 명이며 공동체는 300개 이상이다. 이들은 대략 100명이 되면 공동체를 나눈다. 기존의 공동체는 어머니 공동체가 되고 새로 생겨나는 공동체는 딸 공동체가 되는 방식으로 자기 증식을 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가족 중심의 농업에 종사하면서 도자기 공예, 시계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오늘날 후터라이트의 농산품은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으며 유통된다. 후터라이트는 농업 생산력 증진을 위해 농기계를 사용할 뿐 아니라 직접 제조까지 하고 있으며, 전기와 전화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현대화된 기계화 농업과 기술을 거부하는 아미쉬와 분명히 구별된다. 하지만 후터라이트는 진정한 필요와 소비적인 욕망을 구별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욕망 이외의 용도로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 승용차의 경우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도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브루더호프에서 개개인은 자신이 할 일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공동체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예배를 위해 설교자를 선출하고, 초창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찬송가를 악기 없이 부르며, 성찬식에서는 포도 주스가 아닌 포도주를 사용한다. 후터라이트는 공동체 건물에서 매주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매일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예배를 드린다.
후터라이트의 브루더호프는 처음부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했다. 이것은 그들의 모습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남자들은 검정 색의 멜빵바지와 코트를 입으며, 여자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긴 옷에 머릿수건을 착용한다. 따라서 옷을 잘 입기 위해 사치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여자들의 경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그들만의 스타일로 빗어 관리하기 때문에 머리를 매만지는 데 돈 들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동체를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이 태어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고 세상 한가운데 있는 빛이 되고자 한다.
20세기에 이르러 브루더호프의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독일의 유명한 작가였던 에버하르트 아놀드(Eberhard Arnold)는 1920년에 베를린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자네르츠(Sannerz)라는 독일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가 그곳에 초대교회의 실천에 근거한 ‘형제들의 공동체(Society of Brothers)’를 세웠다. 아놀드가 자신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면서 후터라이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후터라이트의 브루더호프를 알게 된 후에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아놀드의 공동체를 후터라이트의 네 번째 그룹, 즉 ‘아놀드로이트(Arnoldleut, 아놀드의 사람들)’로 여기고 있다.
아놀드의 사람들은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자 1930년대 후반에 영국으로 망명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남미 파라과이의 정글로 이주해 독충과 풍토병과 싸우면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1960년에 미국으로 이동했다. 아놀드의 ‘형제들의 공동체’는 1974년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를 ‘브루더호프’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후터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해 현시대의 문화적 흐름에 맞서 새로운 대안 문화를 제시하고자 애쓰고 있으며, 급진적인 제자도와 영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아놀드의 브루더호프는 현재 세계 5개국에 2,500명 정도가 공동체를 이뤄 살고 있다.
3. 헤른후트 공동체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는 1722년 독일 북동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됐다. 이 운동은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친첸도르프(Nicolaus Ludwig Zinzendorf, 1700-1760)와 모라비아 형제들에 의해 시작된 공동체 운동이다.
친첸도르프의 부모는 루터파 경건주의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 필립 슈페너(Philipp J. Spener)를 친첸도르프의 대부로 삼았다. 친첸도르프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경건주의 신앙에 심취해 있던 외할머니 헨리에테 카타리나(Henriette Catharina)의 손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는 그의 성격과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청소년기에 경건주의 전통이 강한 할레에서 교육을 받으며 프랑케(August H. Franke)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 후 1716년 루터의 도시인 비텐베르크대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런 만남은 그의 지적이고 영적인 세계의 폭과 깊이를 더해줬다.
친첸도르프는 슈페너의 경건주의 이상을 실제로 실험하고자 했다. 그가 바란 것은 루터주의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설교와 책과 실천적 나눔을 통해 무뎌진 교회를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요한 안드레아스 로테(Johann Andreas Rothe), 멜키오르 셰퍼(Melchior Schaffer), 프리드리히 바테빌(Friedrich Watteville)과 더불어 “사형제들의 반트(band)”를 결성해 종교적 각성을 일으키기 위해 기도하고 설교하고 저술하는 일을 해나갔다. 그들은 출판사를 만들어서 경건주의자 요한 아른트(Johann Arndt)의 《진정한 기독교》(은성, 2004)를 펴내는 등 자신들의 사상을 널리 알려나갔다.
그러던 중 친첸도르프는 1722년에 그의 일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모라비아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모라비아 형제들은 체코 프라하에서 교회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화형당한 얀 후스(Jan Hus, 1371-1415)의 후예들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친첸도르프는 모라비아 형제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줬고, 모라비아 형제들은 그곳에 헤른후트 공동체를 만들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졌고, 이제는 종교적 자유의 피난처와 같은 장소로 알려졌다. 종교적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던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이곳을 찾아오게 되면서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친첸도르프는 공동체 내에서 기도와 성서 연구의 불을 다시 지폈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사랑 안에서 더불어 살도록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고, 자신들이 경험한 불일치와 갈등은 성서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성서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른 자발적인 규율을 담은 <형제애적 일치>(Bruderlicher Vertrag)라 불리는 문서를 만들었다. 1727년 5월 12일 헤른후트의 구성원들은 이 문서에 서명했다(이후 수차례 개정을 거친 이 문서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적 삶을 위한 모리비아 형제들의 언약> 혹은 <헤른후트 형제들의 언약>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헤른후트 공동체의 본격적인 출발이다.
공동체는 반트로 알려진 소그룹 내에서 계속적인 성서 연구와 기도 운동을 통해 화해를 이뤘고, 이어서 1727년 8월 13일 성만찬 예배를 진행하는 동안 강력한 영적 갱신을 경험했다. ‘모라비아 형제들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이 경험은 헤른후트 공동체의 영적 성장에 있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형제들의 헤른후트 공동체는 선교와 교회 일치라는 양 측면에서 크게 공헌했다. 무엇보다 헤른후트는 선교하는 공동체였다. 헤른후트의 거주민이 300명 정도일 때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해 이후 30여 년 동안 카리브해, 아메리카, 아프리카, 북극, 극동 지역 등 세계 각지로 수백 명의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했다.
친첸도르프 자신도 모라비아 형제단의 감독으로서 ‘필그림 백작’이라 불리며 세계를 무대로 복음을 전했다. 1739년 유럽을 떠나 서인도제도로 갈 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마지막 설교를 하고 아내에게 유언장을 남기기도 했다.
1741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펜실베이니아를 방문해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지도자들을 만났고,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이러쿼이 종족(the Iroquois)을 만나 모라비아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도 했다.
또한 1749년에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18세기에 개신교 선교의 요람이자 본부였다. 흔히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를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칭호는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의 선교사들에게 돌려져야 할 것이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세계 전역에 기도, 성서 연구, 영감이 넘치는 예배, 죄의 고백, 단순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공동 생활, 물질의 나눔을 실천하는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친첸도르프의 헤른후트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공동체였다. 헤른후트 공동체가 초창기에 종교적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 공동체가 그 시작에서부터 일치와 연합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친첸도르프는 각 교단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으며,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독특한 선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열린 태도 덕분에 친첸도르프는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를 포함한 다른 교단의 지도자들과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과도 거리낌 없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라비아 형제들의 일치와 연합의 정신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이라는 이들의 모토에 잘 나타나 있다.
경건주의가 독일 밖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 공동체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의 강조점은 무미건조한 이성주의와 황폐한 정통주의와의 결별을 잘 보여주는 ‘마음의 종교’라는 개념과, 개신교 정통주의의 생명력 없는 믿음에 반대해 내걸었던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표어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이후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그는 교회 연합 운동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생활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또한 세계 선교 활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모라비아 형제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헤른후트 공동체에는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는 말씀 묵상집이 있는데 바로 《말씀 그리고 하루》(Losungen,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 2009)다. 로중(Losungen)은 군사 용어로 ‘암구호’를 뜻한다. 전투에 나서는 군인들이 암구호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필수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헤른후트의 말씀 묵상집인 《말씀 그리고 하루》는 거의 300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을 지탱하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국내에도 2009년에 우리말로 번역돼 소개됐다.
오늘날 모라비아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일치, 개인적 경건, 선교, 음악과 예배를 중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이상을 지금도 이어가며 자신들의 유산으로 지키고 있다. 모라비아 교회의 문장(紋章)에는 승리의 깃발을 지닌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려져 있고 “우리의 어린양이 승리하셨다. 우리는 그를 따르자”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로
그리스도인이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즉각적인 결단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제자다. 제자는 자신의 생각과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발도파, 브루더호프, 헤른후트의 형제들은 제자의 길이라고 믿은 바를 온전히 실천하고자 애썼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고, 고난의 길을 기쁘게 걸어갔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달려갔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떤 것보다 우선시했다.
우리는 그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아서 불편하다. 동시에 그들 때문에 희망을 가진다. 껍데기보다는 알맹이를, 형식보다는 본질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의 나태하고 무력하고 타협적인 신앙에 경종을 울려, 치열하고 진지하고 생동하는 신앙을 갖도록 도전을 준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진주처럼 귀한 영적인 보화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보화가 우리만을 위한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보화는 이 세상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것은 이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함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셨듯이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빛이 돼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주기도를 매일 드리고 있다. 이제는 그 기도를 실천해야 할 때다.
필자 정보 - 박 경 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클레어몬트대학원(Ph.D.). 저서로 《교회사 클래스》, 《교회의 신학자 칼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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