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독거노인, 임대아파트 계약 잘못 쫓겨날 위기
대전고법 박철 판사 “法도 따뜻해야” 할아버지 손 들어줘
판결문
가을 들녘에는 황금 물결이 일고,…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 바람이 일고,…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
요즘 인터넷에 잔잔하게 퍼져 나가고 있는 판결문이 하나 있다. ‘판결문’이라면 난해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글이 떠오르지만 ‘아름다운 판결’이라고 이름 붙은 이 판결 덕분에 칠십 넘은 노인이 이 겨울을 훈훈하게 보내고 있다.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의 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6·25 참전유공자 이종명(76)씨. 딸이 보내주는 20만원과 참전용사 지원비 7만원으로 한 달을 사는 고단한 삶이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1일 대전고등법원에서 나온 판결문 한 장이 그를 훈훈하게 덥혔다.
▲딸 명의로 충남 조치원의 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종명(76)씨는 이 겨울 이 아파트에서 쫓겨날 위기를 넘겼다. 임대주택 ‘임차인’의 요건을 넓게 해석한 판결 덕분이다. /조치원=박종인기자
‘…가을 들녘에는 황금 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 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한다. 법의 해석과 집행도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1999년 이씨는 딸 이름으로 계약을 맺고 이 아파트에 입주했다. 석 달 만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동네 아파트 공사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다. 요즘은 “늙었다”는 이유로 일감이 없다. 세 끼 가운데 한 끼는 봉사단체에서 주는 밥을 먹는다. 난방은 방 한 군데, 밤에만 튼다. 지난해 12월 한 달 전기 사용량은 불과 25㎾h. 요금은 1980원이었다.
2005년 어느 날 이씨는 주택공사로부터 ‘퇴거 요청’을 받았다. 계약자로 된 딸이 충북 청주에서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니 불법이라는 내용이었다. 임대아파트는 5년이 지나면 분양을 받을 수 있지만 이씨는 계약 당사자가 아니고, 계약자인 딸은 무주택자가 아니어서 분양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이씨는 “중병에 걸린 아내 병 수발하느라 내가 나설 시간이 없었다”며 “딸이 대신 계약을 했는데, 그게 이리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주택공사로 찾아갔다. 직원은 “딸이 서류상 이혼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늙은 몸 하나 살겠다고 자식을 망칠 수 없다”고 대답하고 돌아섰다. 참전용사라서 어찌 되지 않을까 알아 봤지만 국가유공자가 아니어서 불가능하다고 했다.
소송을 냈다. 1심은 졌다. 2005년 12월 20일이었다. 법에 규정된 대로 ‘입주일부터 분양 전환 당시까지 임대주택에 거주한 무주택자 임차인’이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이씨는 “억울하고, 분했다”고 했다. 항소를 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장이 이씨에게 이렇게 묻더라는 것이다. “추운 겨울인데…, 혼자 사는 노인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재판부는 직권으로 소송구조를 신청했다. 가난한 이씨를 대신해 변호인을 선임해준 것이다. 네 번째 재판에서 선고가 이뤄졌다. 재판부가 판결문을 읽었다.
“…계약은 딸 명의로 맺었지만, 이는 병든 아내의 수발을 위해 자리를 뜨지 못한 피고를 대신해 딸이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법 지식 부족으로 벌어진 실수로 판단된다. 피고는 이 주택 임차를 위해 본인의 돈으로 보증금을 내고, 실제로 이 주택에 살았다. 피고는 사회적 통념상 실질적인 임차인으로 충분히 생각될 수 있으니, 법적으로도 임차인으로 보는 것이 공익적 목적과 계획에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씨가 승소했다. 이씨는 “너무 고맙고 너무 감사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대전고법 제3민사부 박철 부장판사다. 지난 18일 만난 박철 판사는 “법의 목적을 생각하고 해석을 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정의(正義)라는 원리와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 없이 법 조항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에게 물었다. 왜 판결문에 수필처럼 감성적인 글이 있느냐고. 그는 “정서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는 판결문을 쓰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판사는 판결로만 말해야 하는데,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했다. 이 재판은 현재 대한주택공사의 상고로 대법원에 올라와 있다.
원문 : 조선일보 2007년 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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