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 무엇이 다른가?
여는 글 목회와 신학 2013년 3월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전 세계 기독교계에 화두로 떠오르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교회 성장’이라는 용어가 수십 년 동안 유행했고 최근에 관심을 끌고 있는 선교적 교회가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와 더불어 그 뒤를 잇고 있는 것 같다. 이 용어들은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선교라는 관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와 같이 선교적 교회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폭되고 있는 현상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암울한 현실을 반영해 주는지도 모른다. 양적이든 질적이든 간에 성장이 정체되고 사회적 비판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은 우리의 교회가 선교적이지 않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에 대한 관심 자체는 희망의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개혁자들의 주장을 생각하면 변화를 추구하는 몸짓은 그 자체로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선교적 교회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힘들어 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까지 전개된 선교적 교회에 관한 논의가 지나치게 학문적 차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학자들마다 그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학자들이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 차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만큼 용어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선교적 교회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이 용어를 쓴 사람들이 처음에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선교적 교회를 뜻하는 영어 단어 the missional church 중 ‘missional’은 본래 영어 사전에 없는 단어로서 missionary라는 기존의 단어를 대신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단어다. mission이라는 단어에 ‘al’이라는 형용사 어미를 합쳐 만든 것으로 1998년 본격적인 선교적 교회 운동을 알린 책, 《선교적 교회》(the missional church)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이들이 missionary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단어가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과거의 선교 패턴 곧 선교적 활동, 프로그램, 지리적 관점의 해외선교 등에 중점을 둔 선교 개념을 뜻하는 것처럼 오해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는 어떤 교회를 말하는가? 선교적 교회의 선교는 기존 교회의 선교와 어떻게 다른가? 선교적 교회는 분명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와 선교 개념을 뜻한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와 선교적 교회의 선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와 기존 교회의 선교를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존 교회라는 용어는 쉽게 일반화 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기존 교회들 중에는 매우 모범적이고 건전한 교회들도 많다.
다만 여기에서는 선교적 교회를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에 속한 교회를 통칭하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
첫째,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존재성 또는 본질에 초점을 두는 반면,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에 속한 교회는 교회의 행위에 초점을 둔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존재의 표현으로 이해하지만 기존 교회는 선교를 행위로만 이해한다. 선교 활동이나 사업을 많이 하는 교회, 선교와 관련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많이 추진하는 교회,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에게 선교비를 지원하며 때로 여러 단기선교여행팀을 파송하는 교회 등이 낡은 패러다임에 속한 교회의 이미지다. 교회 게시판에는 언제나 후원자들로부터 모인 선교비 모금 현황과 함께 해외 선교사들로부터 온 선교편지로 넘쳐난다. 그러나 정작 목회자를 비롯해서 그 교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을 선교 후원자라고만 생각할 뿐, 자신이 선교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교회는 무엇보다도 선교적 본질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적 교회의 핵심 주장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교회가 왜 선교적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를 말할 때 네 가지 표지를 언급한다.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이 사도성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선교적) 사명을 부여한 하나님의 백성 자체다.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선교적이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 행위(doing mission)가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가 되는 것(being mission)이다. 곧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앨런 록스버그(Alan J. Roxburgh)와 스콧 보렌(M. Scott Boren)에 따르면, “‘선교적’으로 존재함(Being missional)은 보다 나은 방식의 ‘교회 활동’(doing church)에 관한 것이 아니요 ‘교회’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고 했다.1 요하네스 니센(Johannes Nissen)도 “선교는 사랑하고, 섬기고, 전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해방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보내진 교회다.”??2라고 함으로써 선교를 교회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 교회가 단지 활동 또는 사업에만 초점을 둔다면 그 활동 또는 사업을 하는 동안에만 선교를 행할 뿐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는 선교와 상관없이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선교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자체가 교회라면 선교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교회가 선교적 본질로부터 선교를 이해하고 행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선교에 대해 말할 때 mission(단수)과 missions(복수)를 구분한다. 전자는 주로 세상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행위 또는 세상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한다.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필요와 관련된 특정 형식들을 가리킨다.3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시각이 단지 후자의 차원에만 머무를 때 문제가 된다. 그렇게 되면 선교가 사업과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고, 선교는 결국 왜곡될 수밖에 없다.
종종 이런 태도는 선교를 교회 확장에 이용하려는 의도와 맞물리는 경우가 많다. 선교에 대해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니던가!
선교적 교회란 교회의 본질로부터 교회의 사역이 비롯되고 교회의 사역으로부터 교회의 조직이 세워지는 교회이다.4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세 가지의 순서가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교회 성장을 위해 효과적인 사역과 조직에 관심을 갖는다. 프로그램과 비법을 배우기 위해 다양한 세미나를 찾아다니는 현상이 이런 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역과 조직 기법이라도 교회의 선교적 본질로부터 이해된 것이 아니면 부작용을 일으키기 쉽다. 어떤 사역을 할 것인가? 그것은 교회가 그 지역과 사회에서 어떻게 선교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시작된다. 또한 교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선택된 사역을 가장 잘 지원할 수 있는 체계여야 한다.
자신의 삶에서 선교적 직무를 수행하는 평신도
둘째,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자체가 선교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인격과 삶을 선교의 중요한 지평으로 생각하지만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에 속한 기존의 교회는 주로 선교 사업과 프로그램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신자들의 인격과 삶을 선교적 지평에서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ecclesia)는 결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며 세상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자체를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안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교는 교회 조직에 의해서 계획된 사업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근대 이후 정치와 종교, 주거 공간과 일터의 분리 현상은 신앙과 삶의 분리를 야기했다. 그 결과,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추구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도직(선교적 직무)이 교회 전체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재발견함으로써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한다. 선교는 사업과 프로그램이 아니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선교를 교회 조직이 행하는 사업과 프로그램으로만 생각하는 교회는 결코 선교를 신자들의 삶에 연결하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의 사도직 수행은 신자들이 각자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고 따르는 제자도(discipleship)를 실천 함으로써 가능하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는 진정한 선교를 위해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에서 선교적 직무를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일깨우고 훈련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도직의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와 평신도는 더 이상 차별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각자 은사와 기능이 다를 뿐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선교적 백성에 속한다.
지역사회와의 선교적 교감
셋째,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지리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며 지역사회를 선교의 핵심 영역 의 하나로 여기지만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에 속한 기존의 교회는 선교를 주로 해외선교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지역사회를 향한 선교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은 선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선교를 지리적 관점으로 인식하던 시대는 지났다. “선교는 더 이상 해외 혹은 다른 문화권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선교의 전방(mission frontier)은 일차적으로 지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신앙, 확신, 헌신의 영역에 있다.”??5 선교를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신에게서 가장 먼 땅 끝은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옆이 아닌가! 이는 자신이 위치한 바로 그 자리, 교회의 관점에서는 교회가 위치한 바로 그 지역사회가 중요한 선교의 현장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사도행전 1:8은 흔히 주님의 선교 명령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구절은 선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과연 얼마나 지역사회와 선교적 관점에서 교감하고 있는가?
해외선교나 선교 사업에 집중하는 많은 교회들 가운데 지역사회에서는 외로운 섬과 같이 존재하는 교회가 많다. 지역 주민들은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지역 주민들로부터 반감을 사는 교회들도 있다. 어떤 교회는 넓은 주차장이 있고 대부분의 시간에 텅 비어 있으면서도 지역 주민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늘 잠가 놓는다. 종종 몰래 차를 댄 지역 주민이 있으면 심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이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그 교회들이 얼마나 선교에 무지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교회들은 대체로 선교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공적 제자도의 실천
넷째, 선교적 교회는 복음과 구원의 통합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 안에 있는 교회는 단지 개인구원과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서 드러내야 할 복음의 공적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4세기에 콘스탄틴 교회가 확립된 이후 기독교는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상실했다. 구원의 개념을 단지 개인의 회심으로 제한하는 축소주의적 신앙관이 서구 사회에 만연했고 제자도는 개인적 차원에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단지 교회에 제한되지 않고 세상과 만백성에 미치고 있고, 그분이 세상의 변화와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공적 제자도의 선교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영국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말한 바와 같이 교회는 그 동안 잃어버렸던 ‘공적 진리에 대한 우위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6 이런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는 개인구원에 관심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최근에 한국 개신교의 위상은 매우 낮아졌고 개신교 인구 수도 줄었다.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의 전도 활동은 전보다 약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복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담임목사직을 세습하고 돈으로 선거를 조작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철저한 주님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이런 문제를 반영한다.
선교적 교회는 공적 제자도의 실천을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을 포함한다. 물론 이와 같은 공적 제자도를 실천하는 방식은 자신의 신앙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방법적 다양성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방식이 얼마나 성경적 근거들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사회가 복음적으로 갱신되고 변화될 수 있는지 철저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지향하는 교회
다섯째,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지향하는 반면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 안에 있는 교회는 개교회의 이기적인 성장만을 추구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지만 기독교의 오랜 역사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근대 이후에 발생한 개신교회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나라가 목적이 되지 않고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현상은 개신교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 결과, 각 지역교회가 보다 큰 가치를 지향하기보다는 개교회의 이기적인 성장을 위해 다른 교회들과 경쟁하는 양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초대 교회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창조물이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에 속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보다 우선한다.”7 그렇지만 그 선교는 다시 하나님께 속한다. 왜냐하면 선교를 행하는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부는 파송하셨으며, 성자는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성령은 능력을 통해 선교를 이끌어 가신다. 교회는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교의 도구일 뿐이다.
종종 교회 자체가 선교의 주체와 목적이 되는 왜곡 현상이 우리의 현실에 나타난다. 교회가 회심성장(conversion growth)이 아닌 이동성장(transfer growth)을 추구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아닌 자기만의 성장을 추구한다. 다른 교회야 어떻게 되든 우리교회만 성장하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교회를 지배한다. 마케팅 전략을 통해 기존 교인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교회는 결코 선교적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동성장은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겨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육신적 방식으로
여섯째, 선교적 교회의 실천은 성육신적 방식을 취하는 데 반해서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 안에 있는 교회의 실천은 권위주의적 방식을 취한다. 선교적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모티브를 두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방식에서 선교 모델을 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자나가는 글
쉔크의 말처럼 “선교가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다.”?8 물론 선교 없이도 교회에 관해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중세기 교회처럼 복음의 능력이 사라진 교회일 것이다.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불과 불꽃으로 비유함으로써 두 개념 사이의 밀착된 관계를 설명했다. “선교는 교회의 원인이고 삶이다. 마치 불이 연소에 의해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에 의해 존재한다.”9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선교를 실천할 것인가이다. 이 점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에 속한 교회는 오늘의 교회와 선교를 이끌어갈 수 없다.
교회와 선교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옳으며, 신학적으로 적절한 이해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DNA가 바뀌어야 한다. 생각의 틀이 바뀌고 체질이 달라져야 한다. 선교를 사업과 프로그램으로만 생각하는 과거의 모델에서 선교적 교회의 모델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참되고 건강한 선교적인 교회의 성장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註
1. Alan J. Roxburgh and M. Scott Boren, Introducing the Missional Church (Grand Rapids: Baker Books, 2009), 72.
2. Johannes Nissen, New Testament and Mission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1999), 18.
3.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Maryknoll: Orbis, 1991), 10.
4. Craig Van Gelder, The Essence of the Church (Grand Rapids: Baker Books, 2000), 37.
5. Wilbert R. Shenk, Changing Frontiers of Mission (Maryknoll: Orbis, 1999), 15.
6. J. Andrew Kirk, What Is Mission? (Minneapolis: Fortress, 2000), 24.
7. 레슬리 뉴비긴, 허성식 역,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서울: IVP, 1998), 357.
8. Shenk, Changing Frontiers of Mission, 15.
9. Emil Brunner, The Word and the World (London: SCM, 1931), 108.
:: 필자 정보 - 최동규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성장학 교수. 풀러신학교(Ph.D.). 저서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 성장》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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