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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는 없다 사수하라 [ 1 ]-히틀러의 실수...

by 설렘심목 2013. 3. 7.

august 의 軍史世界

후퇴는 없다 사수하라 [ 1 ]

변함없는 히틀러의 레퍼토리

"총통각하! 후퇴를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후퇴는 없다. 현지를 사수하라"

제2차 대전 당시 야전의 독일군 지휘관들과 히틀러 사이에 가장 많이 오고간 말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위에 언급한 대화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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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내내 현지 사수에 대한 히틀러의 의지는 그야말로 대단하였습니다 ]

승리를 원하지 않는 지휘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처럼 경우에 따라서 전쟁 도중에 적에게 뒷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거시적인 목표가 있다면 이것은 결코 창피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유사 이래 당연한 병법 중 하나인 '후퇴'라는 선택을 노골적으로 경멸하였고 패망하는 그 시점까지도 용납하려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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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는 후퇴와 패배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제2차 대전당시 독일에는 지금도 경외의 대상이 되는 수많은 맹장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전쟁 말기까지 남아 일선에서 부대를 지휘한 예를 찾아보기는 의외로 힘듭니다.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말미암아 제거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후퇴를 금지한 히틀러의 엄명을 어겨서 내쳐진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만큼 후퇴에 대한 히틀러의 판단 기준은 확고부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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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를 점령하였을 당시의 폰 보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 이들 대부분이 이후 히틀러에게 밉보여 군복을 벗습니다 ]

그렇지만 이러한 히틀러의 옹고집은 결국 자신을 겨누는 비수가 되어 명을 단축시켰고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에서 비참하게 녹아버리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스탈린그라드에서 운명을 다한 제6군의 최후를 언급할 수 있는데,

전사를 살펴보면 히틀러의 편집증적인 고집 때문에 그에 못지않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던 경우는 무수히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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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6군처럼 히틀러의 엄명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부대가 많습니다 ]

물론 전투의 결과를 알기 때문에 히틀러의 고집이 잘못된 판단이었다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있지만 사실 히틀러의 모든 현지 사수 지시를 무조건 오판이었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히틀러의 명령을 따른 장성들도 있었지만 의외로 순수한 군사적 관점에서 현황을 고려하여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에 지휘관들이 동조하였던 경우도 많았고 경우에 따라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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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텔(中)처럼 일신의 영달을 위해 예스맨 노릇을 한 이들도 있지만

요들(右)처럼 전황을 분석하여 히틀러의 의견에 동조를 하였던 경우도 많습니다 ]

예를 들어 1941년 겨울에 소련의 반격이 개시되면서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자 육군 총사령관인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를 비롯한 수많은 장성들은 일단 후퇴하여 전선을 정비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들을 일거에 해임하면서 현지 사수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이후 여러 평가를 받는데 그중에는 그의 강고한 의지 때문에 소련군의 공세를 그 정도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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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엄명한 1941년 겨울 전투는 다양한 평가가 나옵니다 ]

전사를 살펴보면 비록 많은 피해를 당한 이후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전략적 후퇴를 허락하였을 만큼 히틀러도 물리적으로 무조건 현지사수를 엄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현지 사수의 마왕'으로 인상적으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정확한 판단과 조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주관에 따라 현지 사수 명령을 남발하여 작전을 틀어버린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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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제17군의 최후는 그야말로 비참하였습니다 ]

히틀러의 현지 사수 판단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커랜드(Couland) 반도에 완벽 하게 고립되어 종전을 맞이하였던 북부집단군의 경우처럼 결과적으로 비참하게 몰락한 예가 훨씬 많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판단됩니다. 그 중에서도 앞으로 소개할 독일 제17군의 최후는 현지 사수 명령 때문에 결국 후퇴하지 못하고 갇혀서 무의미하게 산화한 비극의 대표적 예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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