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7. 주일예배 <마4:1-11. 주께서 받으신 시험>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시험을 받으러 가십니다. 창세전에 계셨던 주님이셨는데 지금 육체의 옷을 입고 성령께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받지 않아도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40일을 물 한모금 안 마신 채 혹독한 시험을 받습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그의 백성된 우리 죄인들 때문입니다.
시험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뤄갈 구원사역의 완성입니다. 십자가만으로도 충분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로 구원받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도, 즉 십자가의 도를 바로 보여주시고 알게 하신 후 제자가 되어 따라 오도록 본을 보이시는 겁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 성도가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은 주님의 40일 광야시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은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고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의 시험과정에 우리의 광야길, 인생길이 보여야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시고 시험관이 마귀인 예수님의 광야시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시험의 답이 들어 있습니다. 본문만 바로 깨달아 알면 영적전투현장인 현실 속에서 승리의 비결을 갖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세 가지 광야시험의 유형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시험의 유형을 본문에 따라 살피며 주시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험의 첫 번째 유형,
1. 절실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2절을 함께 봅니다.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주님의 첫 시험은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시작됩니다. 지금 시험받으시는 주님은 인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발을 딛고 계신 인간예수이십니다. 40일을 굶고 느끼는 모든 육신의 감각은 우리와 동일합니다. 얼마나 몸이 주려있겠습니까?
가장 절실한 것은 굶주림이며 그 상태에서 가장 연약해진 허기진 배를 사탄은 공격합니다. 40일을 금식한 주님의 몸은 지금 먹는 것에 대하여 예민하고 취약합니다. 사탄은 허점만 노리고 공격하는데 선수입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못되고 비열한 사탄은 언제나 약한 자를 찾아 이빨을 감추고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섭니다. (마약밀매단의 친절한 접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주변에 가장 달콤하고 절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과 주님의 교회에 과연 절실하고 요긴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거룩이 그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달고 끌리는 것뿐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약인지 독인지 모르고 덥석덥석 목으로 넘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돌에게 명령하여 떡이 되게 해서 배고픔을 면하라는 사탄의 시험은 간악한 공격입니다. 이는 가장 아픈 곳인 급소를 때려서 맥을 못추게 하는 악랄한 공격과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 급소를 노출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급소는 거의 본능에 묶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급소는 잘 만져주면 모든 피로가 풀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먹고 누워야 하는 몸은 알맞게 채워주지 않으면 대번에 흔들리는 급소같지만 성경적으로 바로 사용한다면 매우 효과적인 삶을 사는데 필수적인 귀한 부분들입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된 우리몸(고전3:16)은 알맞은 운동과 수면과 섭생활동으로 건강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옛말에 사흘굶어 도둑질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부부가 종종 애정을 확인하며 피차 섬기는 일은 건강한 가정화목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전7:5절엔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엡5:31절에 또 사람이 부모를 떠나 한몸을 이룰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하나 되는 것에 비유된 큰 비밀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가운데 명예욕과 물질욕은 반드시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기 전에는 분명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비굴하게 도망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노라..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거기 주님이 안계시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다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죽는 명예주의자요, 인본주의의 말로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명예는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명예만을 위하여 다른 더 귀한 것들을 무참히 짓밟는 명예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희생과 섬김과 자아의 죽음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시작되고 진행되며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한 어느 것에도 유혹되거나 흔들리지 마시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미래라는 이름의 씨를 심는 믿음의 행위인 줄 깨달으셨다면 아멘하기 바랍니다.
2. 능력을 보이라고 시험합니다.
이것은 정체성에 대한 시험입니다. 3절과 6절의 상반부는 각각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사탄의 말로 시험이 시작됩니다.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왜 못 뛰어내리겠느냐고 사탄은 시험합니다. 이는 야유입니다. 조롱입니다. 신분을 드러내 명예심을 부축인 다음 거기에 희생되도록 유인하는 얄팍한 수작입니다. 그러나 당하실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수모를 당하십니까? 이미 밝혔듯이 우리가 분명 보고 배울 것이 있기에 주님은 몸소 본이 되는 시험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인생들이 공명심에 매우 취약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779년~1783년까지 4년간 스페인은 스페인 남단에 있는 영국의 중요 전략적 교두보인 지브럴터 요새를 집요하게 공격. 그럼에도 인명피해만 있을 뿐 아무 소용도 없는 전쟁을 여왕은 무슨 이유인지 고집스럽게 명령. “저 요새에 우리 스페인깃발이 나부낄 때까지 전쟁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소문을 전해들은 영국군 사령관은 이 몹쓸 아줌마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요새의 꼭대기에 스페인기를 1분간이나 흔들므로 그 명예를 위해 4년간의 소모적인 전쟁이 끝남.)
3. 고난을 피해가라고 유혹합니다.
세 번째 시험으로 사단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이 훗날 모진 십자가를 지심으로 받게 된 영광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후 받으신 영광과 지금 십자가 없이 즉시 절하고 받을 수 있는 영광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사단이 제시하는 영광은 천하만국의 영광, 곧 하늘아래 모든 나라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훗날 주님이 지시기로 계획된 십자가는 하늘아래 모든 나라 뿐 아니라 하늘 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사망과 음부의 열쇠와 다윗의 열쇠, 그리고 무저갱의 열쇠를 손에 쥐시고 온 만유를 심판하실 최상최고의 영광입니다.
사단이 자기에게 절하라는 것은 굴복을 말합니다. 사단에게 굴복하면 당장은 고통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즉시 제공하여 편리하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서운 십자가를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에게 제공되는 것으로 육신이 있을 동안만 유효하며 이 후의 영원한 나라에선 지옥이 기다릴 뿐입니다. 이 역시 주님에겐 가당치 않은 시험제목이지만 주님은 장차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올 양들을 위하여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오직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주님이 주시는 환상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품은 꿈은 커다란 그릇으로 심령가운데 자리잡게 됩니다. 그 안에 무엇으로 채웁니까? 거기엔 기도라는 내용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환상이 환상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반드시 기도의 내용대로 몸을 드려서 헌신하는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속삭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살며시 묻습니다. 쓸돈도 많은데 꼭 그렇게 십일조를 바쳐야하는가? 홧딱지가 나는데 속병만들지 말고 그냥 확 터뜨리는 건 어떻겠냐고 말합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살다가 병걸리면 주님이 책임지시지만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그르치면 자신은 물론, 여러 사람 다치고 소망이 없어집니다. 성령의 불이 떨어져야 살지 지옥불 맞으면 화상덩어리 됩니다. 십자가없이 받은 영광은 모두 훗날 올무가 되고 옆구리 가시가 됩니다. 모든 만사는 값을 치른 것만이 내 것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4. 오직 말씀을 붙잡고 이겨야 합니다.
사단을 이길 힘은 오직 말씀의 능력에 의존하는 길 뿐입니다. 말씀은 작정하시고 진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연약한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고 영생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굳세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악한 세력들을 꾸짖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세 번 시험에서 세 번의 말씀으로 사단을 꾸짖고 물리쳤습니다. 이 역시 주님은 직접 권세로 물리칠 수 있었지만 훗날 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말씀을 앞세우는 영적전투를 하라고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확신하고 있다면 나사렛예수의 이름이 갖는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앞세워 모든 악한 영을 물리치고 영적전투에서 멋진 승리를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절실하고 달콤한 것을 제시하며 사단은 여러분의 인생을 파먹으려고 다가옵니다. 능력을 한번 멋지게 보이라고 공명심(功名心)을 부축이며 뭐 그리 힘들게 사는가?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예수 외에 어떤 이름도 우리에겐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저와 여러분을 지킵니다. 주님의 이름이 여러분을 지킬 때 여러분의 삶은 확고하고 명랑하며 맛을 내고 노래를 불러 주변을 밝게 빛낼 것입니다. 노래하는 삶이 될지어다. 환한 얼굴로 이웃의 눈물을 닦는 비전인이 될지어다. 값도 없이 꾸어주되 기억도 못하는 비전인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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