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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3.01.27.주일예배<삼하12:26-31. 요압의 충정>

by 설렘심목 2013. 1. 26.

2013.01.27.주일예배<삼하12:26-31. 요압의 충정>

 

 

요압은 다윗왕의 누이“스루야”의 아들이며 외삼촌인 다윗에게 생명을 걸고 충성을 다한 충직하고 용맹한 군인입니다. 9:14절 뒤쪽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했는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가로채고 전쟁은 승승장구 계속 승전을 거듭할 때, 즉 아직 밧세바범죄에 징벌이 떨어지기 전, 때는 이복누이 다말을 강제추행한 암논을 압살롬이 죽이기 전입니다. 다윗이 승리의 자만감으로 긴장이 풀어져 밧세바를 범할 때 요압장군은 전쟁터에서 생명을 걸고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압이 암몬왕궁 랍바를 공격해서 거의 다 차지하기 직전 다윗왕을 전투현장에 모셔 마무리를 짓게 함으로 그 승전의 영광이 다윗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요압의 충성스런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압은 전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으로서의 소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모습 가운데 자신의 이름보다는 왕의 이름을 중시하는 요압에게서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받습니다.

1. 직무에 성실한 요압입니다.

 

1) 성실은 최선입니다.

요압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였습니다. 심지어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까지도 거침없이 척결(18:14)한 우직한 충성심으로 다윗을 아프게 했습니다. 또 밧세바일이 터졌을 때도 요압은 우리아장군을 처리하는데 민첩한 분별력을 보입니다. 일은 이미 저질러진 뒤였고 밧세바의 배는 불러옵니다. 다윗의 범죄는 곧 드러날 것이고 그렇다면 다윗왕의 신뢰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약화와 붕괴를 말합니다. 나라를 위해 한 개인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일은 속히 진행돼야 한다는 요압의 판단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가지에 머리털이 걸려 버둥댈 때 요압은 지체없이 달려가서 무참히 베었습니다.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의 생명만은 자신을 봐서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그렇게도 신신당부(18:5)했지만 그것은 한낱 왕의 개인적인 감정이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압살롬은 어차피 죽어야 할 반역자였고 그래야 나라의 질서와 기강이 바로 선다는 것을 요압은 냉철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요압은 군인으로서 본분을 잃지 않았습니다. 군인은 죽이느냐 죽임을 당하느냐의 기로에서 늘 싸우는 자입니다. 물론 요압의 순간결정과 거기에 따른 냉엄한 집행은 두 개의 악 가운데 큰 악을 가차없이 즉각 처리하도록 훈련된 사람임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것을 상황윤리에 능한 사람으로만 보기엔 요압은 군인의 한 사람으로 상관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거기 머뭇거림없는 결단과 행동으로 본분을 다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로서의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딤후2:4절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고전4:2절에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군사로서 악한 영을 죽이고 결박하는 승리자입니까? 아니면 결박당하고 종종 얻어터지고 숨이 막히는 패자입니까? 충성 외엔 사는 길이 없습니다. 요압이 충성하지 않았다면 다윗 망하고 이스라엘 망하고 요압도 죽었을 것입니다.

 

요압장군은 다윗이 이미 저지른 실수 앞에 최고의 군장으로서 어찌해야 할지를 속히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결단을 미루면 자신은 물론 왕과 나라가 흔들리는 낭패를 당합니다. 요압은 사사로운 것들을 미련없이 잘라내고 처리했습니다. 군인은 사념과 잡념이 없고 오직 명령에 따르며 국가와 군조직과 상급자를 보호함에 최우선의 목적을 둬야 한다는 겁니다. 왕이 간절히 부탁한 왕의 아들인데...우리아장군은 매우 충직한 사람인데..하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면 다윗은 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압의 목적은 다윗왕과 이스라엘의 재건입니다. 그것을 위해 인간의 감정조차 단절시키는 용단이 이미 체질화된 군인입니다. 그것으로 그는 자기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한 가운데 들어 있을 때 작은 인간의 시야에 드러난 과정으로 인해서 자칫 하나님과 교회를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괴롭고 또 지체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압의 충정을 보며 군사에겐 명령에 복종하고 최우선의 목적달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이나 사견을 내려놓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은 그 목표를 복음전파에 두고 그것이 지속적이고도 왕성한 교회운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기쁨을 이뤄가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사는 요압에게서 보았듯이 우리들의 우선목표가 복음의 생활화, 복음의 확산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모든 생활의 원리가 거기서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개인의 판단기준과 기호와 모든 소망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돼야 합니다. 혹 하나님의 영광인 교회운동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요압처럼 갈등하지 말고 단호하게 잘라내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 그것이 성실이며 성실은 주님보시기에 최고로 선한 것 곧 최선입니다.

 

2) 최선은 기쁨입니다.

딤후4:7절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주님 앞에 최선을 다한 말년의 거장이 지금 지난날을 회상하며 영의 아들에게 피와 같은 한마디 한마디를 적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최선을 다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감동의 회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말년에 이러한 최선을 다한 바울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최선(最善:Best)이란 가장 좋거나 훌륭한 것, 바라는 마지막 것을 말합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옳다고 여기는 것을 서슴없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내일을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제임스 딘의 말입니다. 여러분. 누구도 과거는 변화시킬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와 후회 속에 살고 현명한 사람은 소망가운데 미래를 보며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미 이뤄진 구원과 아직은 다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즉, 이미 받은 구원과 아직도 이뤄가는 구원사이의 광야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임입니다. 잠깐이면 끝나는 이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영화 ‘가시나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그렇습니다. 사실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진정 괴로운 것은 실패보다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회한과 아픔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 영광을 사양하는 요압

 

1) 겸손입니다.

고대전투에선 승전한 측 장군이름을 따서 성의 이름을 바꾸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깃발을 올리고 성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으로 되는 것이 두렵다고 합니다. 신하로서의 마땅한 겸손입니다.

2) 성숙입니다.

겸손은 언제든지 성숙을 바탕으로 시작됩니다. 성숙하지 않으면 결코 겸손하지 못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자의 겸손은 무능을 위장하는 것에 불과한 비굴입니다. 삼하3:38-39절을 보면 요압이 죽인 아브넬을 다윗은 용사요, 대인이라고 높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요압은 다윗다음에 권세를 쥐고 있었고 다윗도 어찌하지 못하는 큰 자였습니다. 빈수레가 소리요란하고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맞습니다.

 

11C초 영국왕 카누트는 신하들이 자신을 너무 찬양하는 것에 늘 부담을 느꼈습니다. 하루는 왕좌를 해변으로 옮기고 대신들을 불러 보는데서 바다에 명령했습니다. “파도여. 잠잠하라.”그러나 파도는 변함없었습니다. “그대들은 보았는가?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는 파도를 잠잠케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도다.”그는 돌아와 왕관을 벗어 십자가위에 걸어 놓고 평생 쓰지 않아 왕관벗은 왕으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후에 신하들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해서 모든 국사가 일사천리로 이뤄졌습니다.

 

성도여러분. 요압은 비록 국가대계를 위해 잘한 일이지만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죽였습니다. 사울의 사촌형제이자 군장인 아브넬을 비겁하게 죽여서 다윗으로 하여금 울부짖듯 저주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한이 맺혔지만 본문처럼 어떤 경우에도 다윗왕과 이스라엘의 안위에는 최우선적으로 몸을 날렸던 충복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통해 양면교사를 삼아야 합니다. 요압은 다윗이 망명을 환영했던 사울의 군장 아브넬을 비겁하게 죽이고 압살롬을 죽인 후 자신을 꺼려하는 다윗의 마음을 만회하려 한 게 아닙니다. 그는 다윗 왕을 섬기기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오직 왕과 나라를 위해서 무던히 달려왔습니다.

 

저와 여러분, 죽음에서 살리시고 지금도 우리를 복된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앞에 우직한 충정으로 온 몸을 드리는 헌신이 오늘 이 순간 결단되기를 바랍니다. “수고는 내가 하고 영광은 하나님께”비전동시절 강대상위에 붙여놨던 표어입니다. 우리 힘을 합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의 것을 드리고 우리는 다만 주께 사용되었다는 감사와 감동 기쁨만 차지하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