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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2.12.16. 주일예배<출23:1-13. 의로운 율례-시리즈4/4>

by 설렘심목 2012. 12. 24.

 

2012.12.16. 주일예배<출23:1-13. 의로운 율례-시리즈4/4>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 “스스로 있는 자” 또는 “히브리인의 하나님”“만군의 여호와”등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전쟁터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범죄의 현장에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선으로 악을 갚고 가난한 자를 돕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칫 공정하지 못한 판결을 종종 받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사에 부패하지 않은 곳이라곤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제나 무고한 자 곧 억울한 자를 살피시며 약한 자를 도우라고 합니다. 그간 살펴본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공평하신 하나님,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질서의 하나님,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특별히 언급하시고 장자와 첫 소산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성품 첫 째,

 

1. 억울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1절과 2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아멘.

 

세상은 다수의 악으로 구성되어 있고 교회는 소수의 선과 진리로 세워집니다. 교회가 당장 뵈지 않는 진실한 이치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면 세상은 악한 음모와 꾀로서 당장 눈에 뵈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합니다. 방법을 막론하고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동안 남보다 많이 먹고 남보다 잘 입고 남보다 많이 즐기며 높아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세상의 철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남의 형편을 살펴줄 여유가 없습니다. 방법이야 어떻든 일단 남보다 앞서가야 합니다. 할아버지 노아의 벗은 것을 소문내기에 서두른 니므롯의 조상 가나안처럼 남보다 빠른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다수의 보편적 욕구가 평등이라는 기치를 걸고 권력과 자산가를 적으로 해서 공산혁명을 일으켰지만 1%의 권력과 자산을 무너뜨린 노동자 농민은 다시 99%의 가난속에 들어가고 혁명주체세력인 혁명가그룹이 또다른 권력과 부자그룹을 형성해 그 1% 안에 들어가서 결국 스스로의 모순을 안고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운동은 교회를 통하여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도 소수의 헌신된 사람의 희생과 섬김으로 펼쳐져 가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어리석은 다수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소수의 진리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는 악한 다수의 무리를 따르지 말고 소수의 진리수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근거가 없는 헛소문을 듣고 퍼뜨리지 말고 남을 모함하고 해치는 악한 증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악한 무리를 따라 군중심리에 속아 약한 자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오보를 통해 속아왔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싸늘해집니다. 세상은 정직한 자뿐 아니라 속이는 자도 때론 얼마든지 승리한다는 것을 최근의 나라역사에서 충분히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시49편14절입니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성경은 분명하게 정직한 자가 아침에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밝힙니다.

 

신5:32절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아멘. 그리고 바로 이어서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합니다.

종종 감정이 냉철한 이성을 흐리게 합니다. 바른 시각과 바른 판단, 정직한 증언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굽은 판단과 그릇된 증언은 그것으로 인하여 무고한 생명들이 억울하게 죽거나 모두 깊은 불행의 수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되듯이 가진 자라고 하여 공연히 미워하거나 불평등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970년 캄보디아엔 시아누크정권을 둘러엎고 론놀이 이끄는 우익구테타가 성공합니다. 그 론놀정권을 다시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군이 접수하고 1975년 4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장악했습니다. 그 이후 캄보디아는 말할 수 없는 피흘림의 소용돌이에 들어갑니다. 크메르루즈군은 14세의 가난한 가정의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무자비한 군대입니다. 이 소년병사들은 자본주의자들이 사회를 좀먹는 악의 근원이라고 배워서 1977년부터 1999년까지 20여 년간 상상하기 어려운 만행을 철없이 저지릅니다. 특히 1977년부터 2년간은 하루에 약 3천여명을 죽이는데 총알을 아끼느라고 비닐봉지로 뒤집어 씌워 죽게 하고 예리한 사금파리나 유리조각으로 목을 그어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죽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개발하여 즐기기에 이르릅니다. 기타를 칠 줄 알거나 피아노연주를 하거나 안경을 쓰거나 손이 곱다거나 얼굴이 하얀 사람도 사냥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핼로우라는 영어식 인사를 알아듣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처형했습니다. 뚜올슬랭으로 불려지는 심판센터에서는 14-16세의 심판관들이 절대권력으로 인간사냥을 실시했는데 들어는 가지만 나온 사람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보는데서 아이를 멀리 세워놓고 사격연습타겟트로 사용하는 일도 자행하며 킥킥대며 희희낙락했습니다.

 

지금 캄보디아에는 지식층의 빈곤으로 말할 수 없는 국력의 약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뚜올슬랭의 해골무덤사진을 봤습니다. 영화 ‘킬링휠드’에서 일부 묘사되었으나 실제는 훨씬 더 잔학했다고 합니다. 누가 이 어린 소년병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잘못된 편견이 이토록 무서운 죄악의 시작이 된 겁니다. 부자는 무조건 보기싫은 작자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함께 읽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아멘.

 

2. 선으로 악을 갚으시라는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이 말씀은 듣고 행하기만 하면 모두가 감동하며 기뻐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명령입니다. 내게 손해를 끼치고 언제봐도 싫고 미운 그 인간이 힘든 일을 만나면 웬일인지 흐믓해지는 게 인간입니다.

장마비로 내 논이 좀 망가져도 그 인간 유산받아 넉넉한 수십마지기 논이 망가질 거 생각하면 비 좀 더 와도 과히 서운치 않다는 게 우리네 심보라는 것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로마서 12:20절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기 쉽지 않고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그렇게만 한다면 상황은 확실히 명쾌하고 감격적인 답을 구하게 됩니다. 상대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으면 어찌 됩니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머리를 싸매고 불에 뜨거워 구르듯 바닥을 구를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아야 할 원수가 “일없어. 저리가게.”한다면 낭패입니다. 그것은 원수의 비뚤어진 마음도 있겠지만 혹은 도와주는 자세에 행여 파고들 수 있는 교묘한 심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악한 인생들은 상대방을 안됐다고 측은히 여기며 위로할 때 은근히 그것을 즐긴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안도감을 느낄 때 불행한 광경을 즐기는 상태가 순간 이뤄진다는 겁니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생긴 게 인간심리입니다.

 

조심스런 자세로 다가서서 곤경에 처한 원수를 돕는 저와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상대의 머리에 숯불이 지펴지고 괴로워하면 위로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3. 골고루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금방 읽은 본문에는 추수할 때에 7년째의 안식년과 그 때에 가난한 자와 짐승들에게 돌아갈 몫으로 땅을 묵혀두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소외당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먹을 것을 염려하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추수 때 이삭을 흘리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 12절에는 엿새 일하고 다음 날 제7일에는 일손을 놓고 쉼으로 종이나 주인이나 피차 숨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욕심많은 인생들은 쉬지 않고 일하려는 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하나님께선 아십니다.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안식일제도는 욕심많은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주 5일근무제가 도입되고 있지만 일주일휴무제도가 없었다면 노사간 노동협약의 기본자체가 달라졌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사업주는 어떻게 해서든 인건비가 더 나가더라고 더 많이 일시켜 더 많이 생산하고 싶어합니다. 여기에 안식제도가 본래부터 없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6일 근로하고 하루 쉬는 게 발전해 5일 일하고 이틀 쉬려는 생각을 했을까 의문입니다. 안식제도는 일을 시키는 자보다 일을 해야 하는 자들 편에서 배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역시 약자들 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안에 우리를 배려하시는 부분을 그간 4번에 거쳐 말씀을 받아 은혜를 나눴습니다. 줄거리를 훑어보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약속의 하나님. 약자를 보호하시고 생명을 존중하셔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공평하고 자비로우시며 인자하셔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 장자와 첫 소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억울한 자 편에 계신 하나님. 선으로 악을 갚으시라는 하나님. 이제 그 하나님이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더해 주시려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며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도 더 풍성히 채우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복과 그 풍성은 언제나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면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더 가까이 깨닫게 됩니다. 절실한 기도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감동은 인간을 움직이게 합니다. 움직여 행동하는 믿음은 마지막 날에 칭찬받을 만한 귀한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을 받은 우리모두 이 귀한 행하는 믿음의 복된 자들이 다되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