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1월15일 주일설교<창24:1~8. 아브라함과 엘리멜렉의 맹세>
신기하게도 가끔은 초등학교도 가기 전 어린 날들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귀여움을 받으며 아무 걱정없이 뛰놀던 날들이 엊그제같은데 이젠 또 그런 손자를 보면서 기뻐합니다. 전도서에 “한세대는 가고 한세대는 오는데 모든 날이 그림자와 같고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한가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만이 모든 인생의 본분이라며 끝을 맺습니다. 잠언은 어떻게 끝납니까?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도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구름같이 다 흘러가고 이슬처럼 다 사라져도 하나님의 실존과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으시고 사망과 죄악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존하시는 하나님곁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아브라함과 엘리멜렉의 맹세입니다. 용장밑에는 졸군없다는데 대단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겐 역시 대단한 종 엘리멜렉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알면 평생 갈등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본래 죄의 노예로 죄아래 살던 자들입니다. 죄의 결국은 사망이요, 현주소는 어둠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피로 값주고 사셔서 이젠 죄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들입니다. 본적지이동이요, 신분의 변화입니다. 아브라함과 엘레멜렉을 살피는 중에 우리의 다짐을 새롭게 하는 시간되기 바랍니다.
1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승리라는 것은 후반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며 아무리 멋지게 싸워도 끝이 비참하면 패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젊은 시절엔 매우 가난했고 자식없어 외로웠지만 세월이 갈수록 대단한 가문을 이루고 318명의 개인군사를 둘 정도로 큰 부자가 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크리스쳔은 약속의 사람들입니다.
2절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원어에서 허벅지는 남자의 생식기를 둘러 표현한 겁니다. 야곱도 같은 맹세(47:29)를 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자손가운데 메시아가 오신다는 굳은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특별하고 중요한 약속이나 맹세에 자신의 사후에도 자손들을 통하여 불변인 것을 다짐하는 대단한 관습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가?
3~4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며느리를 구하는 일입니다. 며느리는 단순히 아들의 배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대를 이어갈 자손의 어미라는 점에서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믿음의 순수혈통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엔 이방인과의 결혼이 곧 불신결혼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불신결혼은 심각합니다. 애초 불신자끼리 만나서 시작하는 것과는 달라서 힘든 일이 많습니다. 여기서 우린 두 개의 중요한 주제를 봅니다.
하나는 엘레멜렉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아브라함이요.
둘째는 순수신앙을 지키려는 아브라함의 의지입니다.
먼저 엘리멜렉의 성실한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2절 앞부분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당시 거부인 아브라함의 집 모든 소유를 맡았다면 이는 종 엘레멜렉이 대단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늙은 종이라 함은 어려서부터 계속 아브라함을 잘 섬겨서 그 무던한 성실을 증거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허벅지아래 손을 넣어 맹세하게 합니다. 생식기관아래 손을 넣으니 이제 모든 자손들을 참여시키는 맹세가 되었습니다.
노예의 생애는 어떤 주인을 만나냐에 따라 그 인생길이 갈립니다. 좋은 주인만나면한 어지간한 자유자보다 훨씬 품격있고 풍요로우며 모든 면에 보장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종으로 살던 자가 희년을 맞아 놓임을 받을 때에 주인댁과 관계가 좋고 대접이 좋아 독립하기를 거부하면 귀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달아 계속 종을 원하는 표시를 하고 함께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아브라함을 만나 충성과 성실을 다해서 모든 소유를 관리한 것처럼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복음사역을 맡은 자들입니다. 엘리멜렉의 사명이 이삭의 배필감을 구하는 것이라면 교회의 사명은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지옥으로 끌려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그냥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어둠의 세상을 향하여 빛되신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며 땅끝까지 가야할 복음의 사명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3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낙타를 타고 한 달이 걸리는 고향으로 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중요한 곳에 엘리멜렉의 손을 넣게 하고 하나님을 두고 맹세시킬만한 일은 다름이 아닌 며느리를 구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는 인간이 평생 살면서 배필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대사인지를 단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성도에겐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내용인즉 이방여인을 며느리로 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른 바, 불신결혼은 절대 안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꼭 짚고 가야 할 것을 잠시 살펴봅니다. 불신결혼 왜 안되는가?
1) 인격과 영혼의 문제는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2)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 효과적인 사역에 가장 힘든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결혼전 교제중엔 결혼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려 하기 때문에 결혼만 허락하면 뭣이든 하겠노라고 약속하지만 영혼의 문제를 쉽게 믿어선 안 됩니다. 최소한 세례를 받고 목회자의 주례로 결혼한다면 다소 안도할 수 있지만 안 그럴 경우, 평생 낭패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피차 불신상태로 결혼한 경우에는 책임을 묻기 어렵지만 부부가 영으로 하나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사랑의 문제이듯이 부부가 영으로 하나되어 손을 잡고 교회에 올 수 있는 것도 알고보면 사랑의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들었던 문자가 기억날 줄 압니다. “지옥에 따라가서도 네가 여기 있으니 여기가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사람으로 받아줘도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난 당신의 자녀를 찾기 위해 “하늘 저 끝, 땅의 음부 그 아래 거기까지라도 가셔서 찾으신다.”고 시편기자는 노래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신선한 사랑을 회복한다면 함께 교회를 향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진 영혼은 양심도, 약속도, 사랑도 잠들어 있어서 그런 일이 사람의 생각처럼 쉽질 않습니다.
7절을 읽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의 단호하고 굳은 결의와 자신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까지 한 약속을 전적으로 믿은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후에 외아들 이삭까지 바치기에 주저하지 않는 데까지 갑니다. 엘리멜렉을 보내면서도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하나님이 누군가를 시켜서 종보다 먼저 보내어 일을 잘 성사시킬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믿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잘 믿어 그 믿음대로 열리는 남은 생애와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해 정리합니다.
첫째, 약속의 믿음아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던 아브라함은 결국 약속처럼 거부도 되고 후손의 복도 받습니다.
둘째, 충성된 종 엘리멜렉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종된 우리들의 기쁨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봅니다.
셋째,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적 결단과 단호함을 봅니다.
주인의 엉치아래 손을 넣고 맹세한 엘리멜렉의 맹세는 결국 주인 아브라함의 자손 대대를 걸고 충성하겠단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삭의 아리따운 배필 리브가를 구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아래 모인 것은 주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신앙고백은 관계를 통한 헌신입니다. 왜 낙타를 타고 한달씩 가서 며느리를 구했습니까? 한 영으로 평생을 함께 주를 섬기며 기쁨의 예배자가 되는 것은 한 가문의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가운데 아브함과 엘레멜렉의 맹세가 저와 여러분의 후손에게 임한 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아브라함의 풍요도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약속으로 임한 줄 믿습니다. 믿은대로 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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