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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운동 초기교회, 중세교회의 ‘땅끝까지 이르는 세계선교’

by 설렘심목 2012. 8. 7.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운동 초기교회, 중세교회의땅끝까지 이르는 세계선교

목회와 신학 2012 8월호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1: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 지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최후의 부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코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다. 그 가운데는 예수를 따르던 열 한 제자뿐만 아니라,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한마음으로 기도에 힘쓰며 기다림 속에 있게 된다.

과연 누구실까? 오실 그분은! 예수님께서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16:7)고까지 하시면서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소개했던 그분은 바로성령이다. 광야에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이 자신에게 나와 세례를 받으시던 예수님 위에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머무는 것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성령님!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사역하실 때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7:37, 38)고 외치셨지만, 예수님께서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7:39)라고 성경에 기록됐던 그 성령님이다.

예수님께서는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1:5)고 하셨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순교자)이 되리라”( 1:8)는 말씀으로 4 복음서 각각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선교의 지상 대 위임령을 성령이 임하시는 것과 더불어 약속으로 주셨다. 따라서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세계선교란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져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모여 기도에 힘쓴 지 열흘이 지나가고 있던 오순절 날, 홀연히 하늘로부터 온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고, 그것은 이내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에 가득하게 됐다. 바로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그가 보내시겠다고 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이다. 바로 이날이 교회의 탄생일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의 역사는 어느덧 두 번의 천 년을 보냈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세 번째 밀레니엄의 시작점에서 지나간역사를 돌아보는동시에, 새로운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교회는 예수님의 산 증인들로서 초림 예수님과 함께이미시작된 하나님 나라와아직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도래를 꿈꾸는 사이에서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 하고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며 선교적 종말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선교사 하나님(missionary God)’께서는죄와 사망을 멸하시고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에게영원한 생명과 더 풍성한 삶을주시려고선교사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그 아들을 살리셔서 영광을 입게 하신 후, 또 다른 보혜사인선교사 성령을 보내시어 인류의 구원이라는 구속역사를 펼쳐가고 계신다.

약속으로서의 성령

성령은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성령이라는 이름 자체가 성령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 신적(divine)임을 가르쳐 준다. 성령세례는 율법이 아닌 약속으로, 도전이 아닌 선물로 온다. ‘약속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주로 은혜의 맥락에 포함되며, 노력과는 대조를 이룬다(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을 참조하라).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은 세례 요한이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그가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7~8. 참고 마3:11; 3:16; 1:33)에서 처음 나온다. 성경에서 성령세례는 동사로만 표현됐는데, 신약에서 7번 나온다( 3:11; 1:8; 3:16; 1:33; 1:5, 11:16; 고전 12:13). 이중 네 번은 세례 요한의 예언적 언급이고, 한 번은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 1:5), 또 한 번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사건( 11:15~17), 마지막은 모든 성도들이 받는 성령세례에 관한 것이다(고전 12:13).

오순절 이후에 처음 행한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2:38~39) 성령이 이 약속과 동등한 자매어인도레아(dwrea,, 선물)’로 나타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늘에팡겔리아(evpaggeli,a)’인데, 이 약속은 은혜롭게 부여되는 선물이지 협상으로 얻어지는 공약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 서문과 중요한 장면들 ? 1:4(오순절 이전), 2:33(오순절), 2:38~39(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첫 설교), 8:20(사마리아), 10:45(가이사랴, 참고 11:17), 또한 아마도 19:2(에베소, 참고. 15:8) ? 에서 성령은약속이나은사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성령은 결코 성취되거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항상 선물이다. 즉 성령은하나님의 영이시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서 바로 이 성령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이름을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1:5)고 하신다.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수동의 의미로 성령세례가 받는 사람이나 혹은 받는 자의 노력이 아니라 약속하신 자와 그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가복음 24:49에서의 약속에서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도 역시 수동이다. 즉 이 약속은 노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 나타난다. 더구나 이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에는 예루살렘에 유하라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조건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특징은 자격이나 제외됨이 없이 오순절에 120명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지 못한 이가 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선물의 성격을 띤 아버지의 약속이신 성령을, 받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해석하거나 조건적인 것 또는 노력의 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약속의 성취: 오순절 성령강림

약속된 성령은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성취됐다( 2:1~4). 이 위대한 사건은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일어났다. ,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지정하신때가 찼을 때오셨다.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절정에 올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했던 것( 28:18~20; 1:8)을 온 세상에 증거하기 시작하셨다. 성령은 인격으로서 2/3 3/4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거하는 것으로 이 성령강림은 육체적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하늘로부터 온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한 것이다. 초자연적 사건을 동반한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구약에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지적해주고(3:22),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 1:13 ; 3:2~3). 제자들은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됐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첫째로 아버지 자신의 약속의 성취다( 12:3, 3:14 비교). 구약시대에 성부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거듭거듭 약속하셨다( 32:15; 11:19, 36:26, 27; 2:28~32).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이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는 시작임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이 예언을 메시아적 성취로 보았듯이, 모든 육체에게 약속된 예언은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모든 참 백성을 가리킨다.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최초의 메시아적 출현은 이 성취의 시작이다. 또한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세례 요한이 예언하고( 3:11; 1:8; 3:16~17; 1:33), 예수님 자신이 새롭게 하신 약속( 24:49; 7:37~39, 14:16~19, 14:26, 15:26, 16:7; 1:4, 5, 8)의 성취다. 오순절은 제자들을 위한 새 언약의 시작이다. 바울과 누가는 종종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하나님의 언약을 특정 짓는 데 에팡겔리아(약속)를 사용했다( 2:39, 7:17, 13:23, 32, 26:6; 4:13, 16, 20, 9:8; 3:14 ).

구속역사적으로 본 오순절 성령세례

성령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신약성서는 그 전반부(복음서)와 후반부(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중점이 다르다. 전반부는 성령의 현재적 사역의 중점이 예수님 자신과 그의 활동에 있고, 제자들에게는 미래에 받을 선물, 즉 약속으로 남아 있다. 반면 후반부는 성령의 현재적 사역의 중점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있다. 여기서 전환점을 이루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다. 즉 신약의 성령사역(성령론)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직결된 오순절 사건을 하나의 축으로 해서 돌고 있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반복된 체험이었지만, 이 약속의 성취로서의 오순절 사건은 일회적으로(once and for all) 일어난 것이다. 구속사에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받으심으로 새 시대와 새 언약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으로 세례받음으로 예수님을 뒤따르게 됐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메시아 시대가 온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한 명의 대표적 인간 예수에게 한정돼 있던 새 언약이 오순절에 예수님께 순종해 예루살렘에 유했던 모든 믿는 자들에게 확장됐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교회사 속에서 주로 개인적인 체험상에서만 이해하려고 해 그 사건이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냐, 아니면 믿는 신자가 이차적으로 받는 체험이냐의 관점에서 봐 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순절파에서는 오순절 사건을 신자가 중생한 후 이차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보며, 모든 신자들이 체험해야 할 표본으로 본다. 대부분의 웨슬레이안들도 오순절 체험을 중생한 후 신자가 이차적으로 체험하는 온전한 성결과 연결시켜 이해한다. 토레이(R. A. Torrey) 같은 케직(Keswick)파도 성령세례를 신자가 능력을 힘입는 이차적 체험으로 본다. 반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James D. G. Dunn )은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오순절과 그 후의 성령 충만의 사건들은중생 때다’, ‘그 이후다어느 하나로 획일적으로 보기 어렵다.

오순절 사건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행한 설교에서 증거하듯이 구속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2:32, 33). 성령을 부어주신 오순절 사건이 그리스도의 구속역사, 즉 부활과 승천과 직결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부활, 승천이 반복될 수 없듯이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사적으로 볼 때, 보혜사 성령이 교회에 거하기 위해 인격으로 오신 것으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회적 사건이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하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 때에도 일하셨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있었으나 그는 탄생일에야 성육신하셔서 사도와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셨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나타내시고 그 자신을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물로 주셨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까지 예수는 세상에서 그의 공적인 능력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서 그의 신적인 사역 가운데 있지 못했다. 이와 같이 오순절까지는 성령도 세상에서 그의 공식적인 영역 즉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의 중재자로서 있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 오순절을성령의 생일이라고 부른 것은 진리다.”

성령은 교회에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과 승천을 통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 15:45). 이런 의미에서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 사역의 절정적 성취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전폭적으로 일치한다.

경험적 차원에서 본 성령 충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성령이 인격적으로 교회에 임하신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의 사건이었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 후의 성령의 역사들을 보면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을 신자들이 구체적인 체험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성령을 받으라”( 20:22),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1:13), 또는 성령을 받기 위해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2:38),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는 등의 구절은 우리가(교회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성령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야 함을 말해 준다. 이런 사건이 바로 사마리아 교회( 8:14~17), 고넬료의 집( 10:44~48), 또한 에베소의 제자들( 19:1~7) 등에서 나타났다.

물론 앞에 설명한 것처럼 사도행전의 오순절 이후 성령받은 사건은중생의 체험또는회심 이후의 이차적인 체험으로 획일적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성령의 선물을 중생할 때 받는 것인가 아니면 그 후에 받는 것인가? 물세례를 받기 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그 후에 받는 것인가? 고넬료의 집에서는 물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았고, 사마리아 교회(8)와 에베소 교회(19)에서는 물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오순절에서는 그 전후 표시를 명백히 찾아볼 수가 없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사마리아 교회에서 성령을 받았을 때, 그곳에 있는 제자들이 모두 같은 단계나 같은 차원의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단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성령이 이미 교회에 충만히 임해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믿음이 부족해 성령이 충만히 임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또 이후에 충만히 받기를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 모든 죄로부터의 용서를 마련해 놓은 완전한 화목제물이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 그것이 주어지는 것과 같다.

오순절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2:4),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부활을 힘 있게 증거했다. 이와 비슷한 그룹이 사도행전 4 31절에 다시 나타난다. 두 그룹이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더라도 아마 많은 구성원이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4:31)고 기록된 대로 다시 충만하게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권위자들 앞에 섰을 때성령이 충만하여”( 4:8)라고 말했다. 그전에도 성령이 충만했던 베드로였기에 무언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더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아나니아를 보내셨지만( 9:17), 그는 박수 엘루마에게 말할 때 다시성령이 충만하여”( 13:9)라고 했다. 이와 같이 교회나 개인에 대해서 기록된성령 충만은 체험으로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로 나타났다. 교회에서 능력 있게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술 취하지 말라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고 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목회자나, 봉사자, 선교사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성령 충만은 설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평상시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동사의 시제가 말해주듯이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매 순간 받아야 한다. 믿음이 있어도 더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야 하듯이 신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5:18). 주님께서도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1:13)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을 받은 상태는 한편으로는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는 것으로( 24:49 ; 1:8), 다른 한편으로는 죄에서 씻음 받는 것( 15:8, 9)으로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사역에 새로운 능력이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말씀 전파나 제자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넉넉한 능력을 공급받았다. 예수님께서도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는 사역을 시작하지 말라고 하셨다( 24:49; 1:8).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능력 있는 설교나 사역은 성령 충만과 연결돼 있음을 본다. 오순절 이후로 사도들은 기사와 표적을 행했고(2:43, 5:12 ),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다( 4:33, 5:32).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은사들을 통해 나타났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죄에서 씻음 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해서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15:8, 9)라고 했듯이, 성령 충만은 죄에서 씻음을 받는 것(19세기 성결운동의 강조점)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성령 충만을 단순히 봉사를 위한 능력으로만 보는 것(19세기 무디 등)은 성령 충만의 한쪽 면만 보는 것이다.

19세기 말 자유주의의 정점이라 불리는 아돌프 폰 하르낙은 정경화의 완성과 더불어 예언을 포함한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는 끝났다고 보았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나 은사는 사도시대까지만 필요했다는 은사중지주의(cessationism)로 성령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기교회는 사도시대가 성령을 충분히 경험한 유일한 시대라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이 계속 일하신다고 보았다.” 정경화가 이 성령의 역사를 종결시킨다고 보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의 능력(1:8)과 땅끝까지 이르는 복음 전파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는 것과 관련돼 나타나는 용어는 앞에서 말한성령세례외에도성령 충만’, ‘성령의 선물’(2:38, 8:20), ‘성령을 받는다’(8:15, 17, 18, 19:2), ‘성령을 주신다’(5:32, 15:8), ‘성령이 내리다’(8:16, 10:44), ‘성령을 부으신다’(2:33, 10:45), ‘기름붓다’(10:38) 등이 있다.

오순절 전 성령에 관련된 마지막 구절인 사도행전 1:8에 나오는 약속은 1:4, 5에서처럼 가정법이나 명령법이 아닌 단순미래형이다. 여기서 나오는성령이 임하시면(evpe,ocomai, come upon)”에피(evpi,, upon)’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도 나타나듯이, 받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 고 주는 자의 주권과 은총을 지적해 준다. 성령은 위로부터 오는 것, 즉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1:8)의 권능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 예수의 증인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증거의 목표나 주체는 능력이나 은사나 세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성령의 권능은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권능이다. 성령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도록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결합시켜 준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증인될 수) 있도록,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는 능력이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복음 전파가 7장까지에서는 예루살렘, 그리고 8~11:8까지에서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마지막 28장에서는 마침내 로마에까지 이른 진행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진전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초기교회를 넘어 중세교회에 이르기까지 로마와 서구유럽으로 확장됐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동쪽으로는 중동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던동구교회(the Church of the East)’2를 통해 복음 전파가 이뤄진다. 사무엘 모펫(Samuel Moffett)은 그의 책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아시아 기독교 교회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 신앙이 서쪽으로 전해지면서 유럽으로 갔던 초기 기독교 전파 시기와 같은 때에, 바로 그 기독교 신앙이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아시아로 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서구교회사는 바울을 따라 빌립보에서 로마로 갔고, 유럽을 건너 콘스탄틴의 회심과 그 주변 나라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많은 세기 동안에 아시아에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기독교가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회는 처음 아시아에서 시작됐다. … 아시아에서 첫 교회 건물도 발견됐고, 최초로 신약성경도 번역됐다. 최초의 크리스천 왕이 (아마도) 아시아에 있었고, 최초의 그리스도인 시인도 아시아에서 배출됐다. …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극심한 박해들을 견뎌냈다. 그들은 13세기가 넘어갈 때까지 서구 그리스도인들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교의 열정을 갖고 있었고 글로벌한 모험적 사역으로 선교의 일을 확장해 나갔다. 그때에 (한국에서는 경교라고 알려진) 네스토리안교회(아시아에서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다 네스토리안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가 로마교회 지도자들이나 콘스탄티노플교회 지도자들 보다도 훨씬 더 넓은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치리하는 교회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했다”(Moffett, xiii).

오늘날 동구교회는 잃어버린 기독교 역사가 됐지만, 로마제국 내의 교회들보다 지역적으로 광대한 곳에서 선교의 네트워크를 이뤘다. 이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시리아나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던 초기교회들과 생생하고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여러 세기 동안 중동지역을 다스렸으며, 7세기부터 새롭게 생겨난 이슬람 국가들에서 주요한 행정가로 또 지도자로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 초기 이슬람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에 대해 온건융화 정책을 썼다. 그러나 중세가 무르익어 가면서 아시아와 중동 지역에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극심한 박해가 거듭되면서 결국 이 지역에서 기독교는 사라지게 됐다.

실제로 네스토리안교회, 아시리아교회를 포함한 동구교회는 초기교회 때부터 세계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성령에 이끌려 복음을 거대한 아시아 대륙에 전파했다. 많은 경우에 이들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었고, 순교가 그들의 최종 복음 증거의 길이 되기도 했다. 11세기 말, 동구교회는 당시의 가장 큰 교회였다. “전 아시아에 이들을 통해서 어떤 시점엔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선교활동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 교회들의 선교는 중국에서부터 예루살렘과 사이프러스까지 확장됐고, 놀라운 선교활동의 결과로 11세기에는 그리스교회와 로마교회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교회가 됐다고 존 스튜어트(John Stewart)는 말한다.

이때 동구교회가 선교활동을 펼친 나라는 소아시아, 사이프러스, 이집트,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인도, 중국, 일본, 몽고, 만주, 터키스탄 등이다. 이들의 선교는 동쪽으로는 태평양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미쳤고, 흑해와 시베리아 지역에서부터 인도양과 아라비아 바다까지 진행됐다.

이들 선교사들은 걸어서 깊은 강을 건너고 높은 산을 넘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다. 발에는 샌들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등에는 바구니를 지고 갔는데, 그 바구니 안에는 성경과 십자가가 들어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서 그들은 희생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복음을 모른 채 우상을 섬기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인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14세기 들어 극심해진 박해와 멸절로 선교사들의 활동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이때 이들은 크게 둘로 갈라진다. 몽고의 박해를 받았던 선교사들은 쿠르디스탄(Kurdistan) 산맥으로 피난했고, 쿠르드(Kurds)와 터키(Turks)의 박해를 받았던 선교사들은 로마 천주교를 피난처로 삼았다. 이후 동구교회는 이들 간의 분열로 인해 교세가 더욱 약해졌다.

오순절에 인격으로 오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약속하신 대로 권능으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초기교회부터 시작해 모든 시대에 걸쳐서 땅끝까지 이르는 예수의 증인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사도행전적인 교회로서 예루살렘에서도, 온 유대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순교자)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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