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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메스 '오디세이아' 짧은 평전 - 안재원교수

by 설렘심목 2012. 6. 27.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내 삶은 내가 산다. 신들은 지도일 뿐,”

자연·죽음에 대한 공포 극복 통해 삶의 긍정성 부각.

이따금 삶이 가혹하고 힘겹다고 느껴질 때, 우리의 마음은 한 장의 지도를 꿈꾼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지시해 주는 그런 지도가 있다면, 용기를 갖고 흔들림 없이 인생의 길을 걸어갈 텐데. 그런 지도를 가졌던 시대가 있었다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는 그런 지도를 가졌던 시대와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 귀향한 오디세우스가 이타케의 구혼자들을 응징하는 화살을 날리고 있는 그림. 영어본 ´오디세이아´의 삽화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1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고향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에게 그 지도는 하늘의 별이었고, 올림푸스의 신들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였다.

퀴클롭스에게 전우들을 잃고, 칼립소와 키르케의 유혹에 발이 묶이고, 세이렌의 노래와 스킬라의 광폭함에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그는 한순간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용기를 북돋아주던 아테네 여신이 있었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전우들이 있었으며, 낯선 이방인을 환대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시대의 삶에 대해 헝가리의 문예학자 루카치는 이렇게 동경의 찬사를 보낸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올림푸스신은 공포 대상에 인간 형상 부여한 것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겸손했으나 삶 앞에서 수동적이지 않았으며, 신화적인 힘들을 존경했으나 인간적인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낼 줄도 알았다. 그들은 생각했다. 내 삶은 내가 산다. 신은 내 삶의 나침판이자 지도일 뿐이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을 제우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인간들은 걸핏하면 신들을 탓하곤 하지요. 그들은 재앙이 우리에게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못된 짓으로 정해진 몫 이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오.”

인간은 모두 자신이 행한 바에 의해 자기 삶을 스스로 축복하거나 저주한다. 자신의 의지와 정당한 노력으로 포세이돈의 저주를 뚫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한 나라의 왕으로서 행복한 삶을 완성한다. 반면 그가 집을 비운 사이 페넬로페에게 구혼을 한다는 핑계로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먹어치우며 오만불손한 행패를 부리던 이타케의 구혼자들은 복수의 화살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왜 올림푸스의 신들을 상상했을까.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삶의 공포와 전율을 알고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요컨대 살기 위해서 그들은 올림푸스라는 꿈의 산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특히 그 시대의 인간들에게 자연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인간적인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그 공포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푸스의 신’이라는 예술적 서사를 통해 더 오래, 삶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을 발견했던 셈이다.

 

●모험담 통해 나그네 환대 대가 지불

그들에게는 모든 우주만물이 ‘신’이었다. 특히 인간의 형상을 한 신들은 매번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인간들의 집을 찾아온다고 믿었다. 때문에 낯선 곳에서 오는 이방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는 기도를 하고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과 함께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디세우스의 돼지치기는 떠돌이 노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를 성심껏 환대한다.

“나그네여! 그대보다 못한 사람이 온다 해도 나그네를 업신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모든 나그네와 걸인은 제우스에게서 온다니까요.” 이런 말과 함께 돼지치기는 떠돌이 노인으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제우스처럼 환대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가장 좋은 잠자리를 제공하면서.

오디세우스나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진심으로 환대한다. 낯선 자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태도는 이방인에게 일단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될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점이다.

손님이 어떤 신분인지, 누구인지를 묻지 않고 그가 누구든 무조건 환대한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충분히 먹고 마시고 난 후, 비로소 주인은 손님에게 묻는다. 이방인이 떠나온 곳은 어디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했으며, 그는 누구인지.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자신을 환대해준 파이아케스족의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에게는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을 무조건 환대할 의무가 있으며, 손님에게는 자신을 환대한 주인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가 있다. 아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환대에 대한 일종의 답례인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가능케 했던 ‘환대의 법칙’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이타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중지된다.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던 오디세우스는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던 오만한 구혼자들의 냉대와 모욕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다. 이때 파탄난 환대의 법칙은 가혹한 복수에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공포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죽음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모두 언젠가 죽을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삶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살았다. 때문에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의 대상은 자연이나 신이 아니라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언젠가는 직면하게 될 죽음이었다.

‘오디세이아’에서 호메로스가 이야기의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저승’의 에피소드를 삽입해 넣은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즉 그 시대 그리스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돼 있던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고통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시의 11권에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귀향을 둘러싼 예언을 듣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갔을 때, 그가 확인한 것은 삶이 죽음보다 좋은 것이라는 점이었고, 그러한 깨달음이 이후에 그가 겪게 될 고난이나 고통으로부터 그의 삶을 지켜준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의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를 칭송하는 말을 건네자, 아킬레우스의 혼백은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승에서 사자(死者)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다.” 자연에 대한 공포나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한 방식으로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것은 신화 혹은 서사시라는 예술의 영역이었다. ‘오디세이아’에는 한 용감하고 지혜로운 그리스인의 여행담이라는 형식으로 이러한 내용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한 용기와 의지를 버리지 않으며, 신을 섬기듯 낯선 자들을 환대하며, 일상을 축제로 즐길 줄 알았던 그리스인들의 머리 위에는 항상 반짝이는 별들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권용선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오디세우스 내세워 문명과 야만을 구분짓다
고전 오디세이 ④ 자연세계에서 국가로 가는 길

낯선 손님을 예의롭게 맞고 그가 곤경에 빠졌으면 돕고 신에 대해 두려워한다면 ‘문명’

 

서양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텍스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이다. 여신 칼립소의 오기기아를 떠나 20일간의 항해 끝에 간신히 육지에 발을 디딘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손만 뻗으면 먹을 게 있어도 손님에게 잔인하게 굴거나 오만불손 무법천지라면 ‘야만’

 

 

 

나는 또 어떤 인간들의 나라에 온 것일까?  오만하고 야만스럽고 옳지 못한 자들일까? 이방인에게 친절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일까?(<오디세이아> 6권, 119~123행)

흥미로운 고민이다. 고민의 한 편에 오만, 야만, 불의가, 다른 편에 관대, 친절, 정의가 서 있다. 이른바 문명과 야만의 대립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 문명에 대한 나우시카의 말이다.

 

손님이여, (…) 올림포스 제우스는 마음 내키는 대로/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모두 가리지 않고 행복을 나누어 주시지요./ 그대가 겪는 어려움도 그분이 주신 것이니 참고 견디어야 해요./ 지금 그대는 우리 도시와 나라에 오셨지요.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간청하는 옷과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을 받으실 거예요. 도울 수 있는 처지라면 당연히 도와야 하니까요. (<오디세이아> 186~193행)

» 이탈리아 화가 미켈레 데수블레오(1602~1676년)의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의 만남〉.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귀환하는 오디세우스에게 문명의 상징인 옷을 전하고 있는 나우시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문명의 기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기준은 손님에게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이다. 서양 고대 세계에서 손님에게 열린 마음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다. 손님을 잘못 대접하거나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일로 해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이 대표적이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파리스가 손님의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도 주요 원인 가운데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손님 파리스가 주인 헬레네를 유혹해서 트로이로 데려가 버린 일은, 그들이 해당 국가의 왕자이고 왕비였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연애 행각으로 끝나지 않았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유에서 손님 대접에 관한 예의 일반에 대해서는 제우스가 직접 관장한다. “크세니우스 제우스”(Xenius Zeus)라는 별칭이 이를 잘 보여준다. “손님 환대의 예의를 관장하는 제우스”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디세우스의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일까”라는 물음은 제우스에게 던지는 것이다. 적어도 신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그의 간청을 들어주어야 하기에 그렇다.

 

이에 대한 나우시카의 답이 흥미롭다. 불행과 곤경에 빠진 손님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인간은 제우스가 내리는 행복과 불행 앞에서 누구나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젠가 나도 그런 곤경에 빠질 수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해명이다. 소위 “인간 조건”(conditio humana)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것이 인간 조건이기에 그렇다. 이와 관련해서 손님에게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오디세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손님을 돕는 것은 제우스의 뜻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도 아마도 제우스의 뜻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은 모두 낯선 손님에 속하기 때문이다. 낯선 이도 돕는데, 아는 이를 돕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기에 그렇다. 원래 라틴어 호스티스(hostis)는 손님을 의미하기도 하고 적을 뜻하기도 한다.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 손님 환대의 규칙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연결된다. 이를 통해서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은 인간의 의무로 자리잡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간청이 신의 힘에 기초한다면, 나우시카의 답은 인간의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겠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되고 서로 잘 연결된 나라가,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른바 문명 세계다. 이것이 호메로스의 생각이다. 이는 야만의 지역을 살필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키클롭스의 지역으로 항해해 보자. 오디세우스와 폴리페모스가 나누는 대화다.

 

 

혹시 그대가 환대해주거나 아니면 손님의 당연한 권리인/ 그 밖의 다른 선물을 줄까 해서 이리로 와서 그대의 무릎을 잡는 것이오./ 가장 강력한 분이여. 그대는 신들을 두려워하시오. 우리는 그대의/ 탄원자들이오. 제우스는 탄원자들과 이방인들의 보호자시며/ 존중받아 마땅한 손님들과 동행하시는 손님의 신이시오./ 이렇게 말하자 그자는 즉시 비정하게 대답했소./ “이봐, 나그네, 나더러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라고/ 명령하다니 너는 어리석거나 멀리서 왔나 보군.”(<오디세이아> 268~274행)

 

 

도움을 청하는 오디세우스에게 폴리페모스는 아주 “비정”하게 거절하고 있다. 나중에 폴리페모스는 손님들에게 식인(食人)을 할 정도로 잔인하게 굴었다. 이 대목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겠다. 인간적인 것과 잔인함의 대비가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문명의 형성에 대한 호메로스의 생각을 좀더 살펴보자.

 

오만불손한 무법자들인 키클롭스들의 나라에 닿았다. (…)/ 밀이며 보리며 거대한 포도송이들로 포도주를 가져다주는 포도나무하며/ 모든 것이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 않건만, 그들을 위해 풍성하게 돋았다. (…)/ 그들은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었다.(<오디세이아> 106~113행)

 

 

키클롭스 지역의 묘사가 매우 흥미롭다. 어찌 보면, 키클롭스의 지역이 바로 유토피아다. 유토피아(utopia)란 어디에도 없는 곳, 즉 ‘무토피아’(無土彼亞)다. 서양의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묘사에 따르면, 일단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먹을 것이 제공된다. 그야말로 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이곳을 무법천지에 불경스럽고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는 곳으로 묘사한다. 단순 생존이 아닌 사람이 살기 위해 요청되는 제도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생존과 생활의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 여기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먹을 것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다운 삶을 채워주는 곳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생존(生存)이 아닌 생활(生活)이 있는 곳이, 국가라는 제도가 작동하는 곳이 문명의 세계라고 호메로스는 생각한 것 같다. 문명에 대한 호메로스의 이런 생각은 이후 내내 서양 역사를 지배하게 된다. 증인으로 키케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바로 말의 힘 때문에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하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그들을] 야만의 거친 삶에서, 이곳 로마처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문화와 문명의 세계로 이끌 수 있었던, 또한 국가가 이미 세워졌을 때, 입법과 사법 그리고 법에 입각한 권한과 법이 보장한 권리에 대한 규정과 틀을 마련하고자 할 때, 어떤 다른 힘이 가능했을까?(키케로, <연설가에 대하여> 제33장)

 

»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키케로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야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틀 안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가능케 해준 근본적인 힘이 말이라고 한다. 모여 살게 하고 거기에서 문명과 문화를 가꾸고 살도록 사람들을 설득한 힘이 말이기에. 키케로에 따르면, 이런 말의 힘에 기초해서 성립한 제도가 국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명 담론의 성격이 달라진다. 문명 담론이 폴리스(로마의 경우 키비타스(civitas))의 성립과 연결되어 논의되기 때문이다. 폴리스라는 말에서 국가의 개념이, 폴리스라는 말에서 모여 사는 곳의 의미인 도시의 개념이, 도시의 개념에서 세련됨이, 세련됨에서 닦음, 길들임, 수양과 예의의 개념이 흘러나온다. 이 반대, 곧 잔인하고 무례하며, 조야하고 거칠며, 들판과 산에서 흩어져서 살며 나라도 없는 곳이 바로 야만이 지배하는 곳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