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 100주년의 명암
출처 : 목회와 신학 2012년 06월호
금년은 한국 장로교 총회조직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고 1912년 총회를 조직한 지 한 세기를 맞으며, 지난 역사의 뒤안길을 헤쳐 보는 일은 내일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 과정
‘장로교(Presbyterianism)’를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면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다. 칼뱅에 의해 발전된 장로교 제도는 교황제나 감독제 혹은 회중제와는 달리 직분상의 평등을 강조하여 계급구조를 거부하고, 개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강조하되 연합을 중시하는 대의제(代議制)의 성격을 지닌다. 장로교 제도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성경적인 제도, 사도시대부터 존재했던 제도(행 15장, 딤전 4:14 등)라는 점에서 가장 사도적인 제도, 대의제 성격을 지닌 제도라는 점에서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일컬어져 왔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스코틀랜드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에서 칼뱅의 가르침을 입었던 낙스는 칼뱅에 의해 개진된 개혁신학을 수용하되 스코틀랜드와 인접한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ish)의 ‘감독제’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제’의 교회 곧 장로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1559년 5월 2일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낙스는 1560년 교회개혁을 단행하고 전문 25개조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를 제정했는데, 이 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까지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1561년 12월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세계장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스코틀랜드교회는 신학적으로 개혁신학을 수용했으나 교회정치제도로 장로교 제도를 채택하여 장로교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후예들이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장로교회가 전파되었고, 다음 시기에 미국·호주·캐나다 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1880년대 중엽부터 한국에도 장로교회가 소개되었다.
한국과 ‘장로교’의 첫 접촉은 1870년대로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1862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했으며, 1871년 이후로는 알렉산더 윌리암슨의 지도로 산둥반도를 주선교지로 하여 활동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871년 중국으로 파송된 존 매킨타이어와 1872년 중국에 온 존 로스였다. 만주지방 선교사였으나 조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1874년 4월말 가오리먼에서 한국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한글을 배우게 된다. 또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5년에는 의주 청년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인과 장로교 선교사의 첫 접촉이었다.
앞의 4명의 청년은 1876년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이 된다. 곧 이어 인삼 행상인이었던 서상륜도 1882년 만주 뉴좡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고, 1883년에는 서간도의 한인 김청송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장로교 수세자는 6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공식적인 한국인 첫 수세자들이 한국어 성경 번역에 기여했고, 만주와 그 변방 지역에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한국 장로교회였다. 선교사들의 공식적 내한에 앞서 한국인 스스로가 기독교(장로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자주적 기독교 영입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2년 9월 28일 일본에 갔던 이수정도 교파적으로 말한다면 장로교인이었다. 이수정은 장로교 선교사를 통해 개종하고 장로교 선교사와 접촉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그는 쯔다센을 통해 심적 변화를 경험하고 일본에 간 지 3개월 후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883년 4월 29일 주일에는 동경의 로루게즈쪼교회에서 장로교 목사인 야스까와 토오루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일본 땅에서 첫 수세자가 되었다. 특히 이수정은 일본주재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조지 녹스의 도움으로 성경연구에 진력했고, 장로교 목사로서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헨리 루미스의 요청으로 복음서 번역에 참여했다. 루미스는 1872년부터 일본에 체류했으며, 요꼬하마제일장로교회를 설립한 인물이다.
비록 한국인들이 만주와 일본에서 장로교 선교사와 접촉하고 세례를 받고 장로교인이 되고 성경번역에 동참했지만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알렌의 입국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호주빅토리아장로교(1889), 미국남장로교(1893), 캐나다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여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 사역했다. 이들은 선교지를 분담하여 일했으나 연합하여 1907년에는 첫 노회인 ‘독노회’를 조직했다. 노회 조직과 함께 최초로 일곱 목사를 장립했는데, 이들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인 길선주(40세)·방기창(58세)·송인서(40세)·서경조(58세)·양전백(39세)·이기풍(40세)·한석진(41세)였다. 1912년 9월 2일에 평양에서는 96명의 목사(한국인 52명, 선교사 44명), 125명의 장로 등이 모여 ‘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전국 규모의 장로교 치리회였다. 총회가 조직될 당시 휘하에는 7개 노회, 2,054개 교회(조직교회 134개, 미조직교회 1,920개), 69명의 한국인 목사, 77명의 외국인(선교사) 목사, 225명의 장로, 5만 3,008명에 이르는 세례교인, 2만 6,400명의 학습교인이 있었고, 총신자 수는 12만 7,228명에 달했다.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고찰
1. 미국 교회의 영향
한국의 장로교회는 신학이나 예전, 신앙고백 등 여러 측면에서 미국장로교회의 결정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이것은 선교 영역이나 선교사의 수, 선교 활동 면에서 미국 교회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독일의 선교학자 바르넥(G. Warneck)이 지적한 바처럼 피선교지의 교회는 선교국의 영향 하에 있게 되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 전까지 내한한 선교사 총수는 1,500여 명으로 파악되는데, 그중 약 70%가 미국 국적의 선교사들이었다.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 중 76%에 해당하는 513명이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미국 교회가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에 내한한 1,500여 명의 선교사 중에서 장로교 선교사는 44.5%로서 감리교의 26.3%보다 1.8배 많았다. 이처럼 장로교는 한국의 주도적인 교파였다.
한국 장로교회가 미국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를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에 대한 문자적 강조(biblicism)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주의 혹은 성경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 대한 문자적 강조와 윤리적 엄격성을 의미한다. 둘째는 유럽교회 전통에 비해 신조나 신앙고백, 그리고 성례전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이런 미국 교회적 특성이 한국에도 영향을 주어 신조나 성례전에 대해 심각하게 논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 번째 성격은 부흥주의(revivalism)라고 할 수 있다. 부흥주의는 감성적 측면이 강조되고 개인 전도와 중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미국 교회적 특성들이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1년 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했지만 1920년대 말까지의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의 주도 하에 있었다. 한국인에 의한 신학연구 혹은 교회적 영향력은 1930년대 이후 나타난다. 한국인들이 신학교육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1927년 이후로, 남궁혁, 이성휘, 박형룡이 각각 1927년, 1928년, 1930년에 교수로 임용된다. 평양신학교 교지 형식으로 발행되었던 <신학지남>이 1918년 창간됐지만 1930년 이전에는 선교사들이 주된 집필자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장로교회는 한국 장로교 형성기의 신학과 교회생활 일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2. 선교정책과 복음화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허드슨 테일러가 선호했던 순회 혹은 순행전도와 매서전도를 실시하는 한편 1890년 이후에는 네비우스 정책(Nevius plan)을 수용했고, 1893년부터는 효과적인 선교 활동과 인적, 재정적 낭비를 막기 위해 ‘선교지역분담정책’을 실시했다. 선교지역분담정책은 교회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것이 후일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 활동은 한국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천주교 선교사들은 천문학을 이용했으나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 활동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을 사고자 했다.
1909년 당시 한국에는 950여 개의 기독교 학교(mission school)가 설립되었는데, 이중 장로교계가 605개로 63.7%에 해당한다. 감리교계 학교는 200개로 21%에 불과했다. 장로교가 근대교육운동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교육은 특수한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공교육(public education)이라는 개념을 심어 주었고, 남자뿐 아니라 여성도 교육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1913년까지 전국에는 3개의 진료소를 포함하여 33개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장로교 병원이 17개 병원으로 52%에 해당했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강계·선천·평양·제령·서울·청주·안동·대구·부산에, 남장로교는 군산·전주·목포·광주·순천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활동을 했다. 캐나다장로교는 성진 함흥에는 병원을, 원산과 회령에는 시약소를 두고 있었다. 호주장로교회는 진주에는 병원을, 통영에는 시약소를 두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장로교는 부산·대구·광주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교육과 의료 활동을 주도하며 구습 개혁, 신분제 타파, 여권 신장과 여성교육, 술·담배·아편 금지, 혼례·장례 개혁 등 건실한 사회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 교회부흥과 민족주의
첫 거주 선교사였던 알렌의 입국 이후 첫 십년 동안은 ‘고투의 기간’(years of struggles)이었으나 1900년대를 경과하면서 장로교회는 조직, 치리회 등 제도와 신학, 예전 등에서 정비가 이루어져 갔다. 주목할 사실은 청일전쟁(1894~1895)을 경험한 이후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수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청일 전쟁 이후 자강 민족의식이 싹텄고, 기독교를 통해 서구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국가적 위기라는 정치 환경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여 이를 타계하고자했던 집단적 의식을 호주의 역사가 케네스 웰즈(K. M. Wells)는 ‘자강 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라고 불렀다.
한국 교회는 1903년 원산을 시작으로 영적 각성과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1904년과 1906년에도 반복되었고, 1907년에는 대부흥을 경험했다. 이때의 부흥은 약 6개월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장로교회는 1만 6,000명의 새신자를 얻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1909년에는 ‘백만구령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부흥 기간 중에 한국 교회의 고유한 신앙 행위인 새벽기도·통성기도·날연보·사경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은 조선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교회 성장을 선교정책설, 정치사회적 환경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론 등으로 설명해 왔지만 한국이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정치 환경에서 유래한 민족주의에 기인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 달리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기독교 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나라들의 민족운동은 반기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300여 년간 화란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한국은 일본의 지배 하에서 기독교를 통해 근대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환영을 받았고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친기독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이런 특수한 상황을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일제하 교회의 수난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하에서 수난을 겪으며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했다. 일제는 1925년 신사제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로 도처에 신사(神社, 神祠)를 건립하고 일면일신사주의를 강행했다. 1935년부터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대 수난의 역사를 엮어 갔다.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 타다오의 부임으로 발화되었다면, 교회에 대한 강요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부임으로 방화되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용하든지 거부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었다. 천주교와 감리교·구세군·성결교·안식교·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회들은 일제의 압력에 굴복했다. 장로교회는 끝까지 저항하는 듯했으나 1938년 2월 9일에 교세가 가장 큰 평북노회가 굴복했고, 1938년 9월 이전까지 당시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일제의 요구에 굴복했다. 장로교 총회는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 가결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굴욕이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태양신 숭배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1938년 6월 당시 한국의 장로교회는 3,300여 개에 달했다.
1938년 총회 이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1940년 7월 이후 ‘일제 검거’란 이름으로 체포구금 되었다. 결국 2,000여 명 이상이 투옥되었고, 이 중 30여 명이 순교했다. 마지막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인사는 20여 명에 달했다. 1938년 이후 한국 교회는 굴종과 저항이라는 양면적인 역사를 엮어갔다.
해방, 친일청산의 좌절,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해방을 맞은 한국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한국 교회를 쇄신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당위이자 한국 교회에 주어진 숙제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교회, 그 어느 쪽도 친일세력을 제거하거나 잠재우지 못함으로써 식민지적 상황은 이후의 사회와 교회 현실에 영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 즉 신앙 정기를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교회 쇄신을 이루지 못했고,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해방 후 이북과 경남에서 교회 쇄신에 대한 평신도들의 열화 같은 요구가 있었으나 친일적 인사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따라서 교회 쇄신의 요구는 좌절되었다. 경남에서 기존의 경남노회를 이탈한 친일적 인사들이 자구책으로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한 일은 해방 후 장로교회 분열의 시작이 되었다.
1950년대 한국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다. 특히 남북한 간의 첨예한 대립과 냉전체제, 한국 전쟁의 전화(戰禍)는 민족의 고난과 아픔의 실체였다. 이 시기 교회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부족했다. 북한에서의 공산정권의 수립, 남북 간의 이념적 대결, 이데올로기적 심화는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신사참배 문제, 신학적 문제, 교권적 대립 혹은 교회 지도자간의 갈등으로 장로교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교회 쇄신론자들이 총회에서 축출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분열이었다.
고신(1952), 기장(1953)에 이어 승동과 연동(1959년)으로 나눠지고 그 분열은 그후 심화되었다. 분열의 중심에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4명의 지도자, 곧 한상동(1901~1976), 김재준(1901~1987), 박형룡(1897~1978), 한경직(1902~2000) 목사가 좌정하고 있었다. 분열된 교회 간의 합동을 위한 시도도 없지 않았으나 분열은 눈앞에서 전개되었고 연합은 산 너머에 있었다.
1960~70년대의 교회
1960년대 한국 교회는 정치 현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계기가 된 사건이 1960년의 4.19학생혁명이었다. 4.19는 민주의식 혹은 정치의식의 발전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참여와 그 대응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교회는 이승만 재임 중에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으나 4.19 이후 정치 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보수나 진보의 구분선이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출현과 함께 정치권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신학적 성향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되기 시작했고, 정치권력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대두되었다. 즉 보수적 성향의 교회나 그 지도자는 개인구원을 강조하고, 정교분리에 근거하여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구조의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무관심했다. 그러나 진보적 교회는 사회구조의 개혁 및 변혁을 우선시하고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1960년대부터 보수와 진보 양측은 정치권력과의 관계 혹은 태도에 대한 분명한 차이를 노정하기 시작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의 양극화 현상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특히 1970년대 이후 그 경계선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 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교회성장이었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의 제왕이었고, 교회성장은 이 시대의 제일의적(第一義的)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성장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갔다. 성장은 교회의 최고 가치이자 최고선(最高善)이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교회의 양적 성장 추구가 이 시대 교회의 뚜렷한 특징이 되어 1970년대 이후 큰 성장을 이루었으나 성장 아닌 것은 경시되거나 무시되어 기독교적 가치들을 상실했다. 교회 분열도 그 중의 하나였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교회 문제는 성장의 그늘에서 자란 잡초들이다.
1980년대 이후의 교회
한국 교회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의 정치적 변혁을 경험하면서 국가와 교회에 대한 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했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의 사회 참여는 더욱 확대되었고,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확대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 교회의 대사회적 관심사가 민주화였다면, 1980년대 후반에 와서 민족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통일이었다. 따라서 통일은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진보적 교회가 주도한 통일 논의는 민족주의적 관심에서 전개되었고, 북한 인권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보수적 교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을 주도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80년대는 한국 교회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지나친 수적 성장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 ‘말씀 묵상’, 제자훈련, 기독교문화운동,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 특히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교포 목회자를 포함하여 20여 명에 불과했으나 2011년 12월 현재 한국 교회는 2만 3,322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명과 암: 반성과 평가
1980년대 이후의 한국 교회는 밖으로부터의 도전과 내부적 혼란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단군전건립운동에 맞선 건립반대운동, 이단과 사이비 유사기독교의 출현, 신학교의 난립과 교회 분열, 교회의 사회적 신뢰의 상실 등은 교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적극적인 선교운동, 대 사회 봉사활동, 북한동포에 대한 관심과 물적 지원, 통일운동에의 동참, 교회연합운동 등이 이 시대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교회가 이 사회 앞에서 도덕적 윤리적 계도자의 위치에서 한국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기독교 신앙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어떤 시대든지 기독교의 세속화는 본래적 가치로부터의 후퇴나 이탈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 ‘나그네성(性)’의 상실은 교회의 속화를 초래했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지난 100년간의 한국 장로교회사를 뒤돌아 볼 때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가 있다. 대사회 정책의 수립, 이단에 대한 대처, 그리고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과 무자격 목사의 양산에 대한 대처, 신학의 발전, 교회연합 운동, 통일에 대한 대비, 기독교적 가치의 구현 등 실로 많은 난제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장로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숙제는 ‘교회분열’이다. 따라서 연합을 위한 노력은 우리 시대의 과제다. 따지고 보면 많은 문제가 분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피선교지에서 유래가 없는 급성장한 교회지만 동시에 과도하게 분열된 교회로 알려져 있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성장의 역사인 동시의 분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성장하면서 분열하고 분열하면서 성장해왔다. 거듭된 분열을 거쳐 현재는 300여 개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교회연합은 어느 시대나 용이하지 않았고, 분열은 쉬우나 연합은 더욱 어렵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몇 가지 근거, 곧 연합은 성경의 명령이라는 점(요 17:11, 엡 4:2~6)에서, 연합은 복음 증언과 기독교적 가치 실현에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점, 그리고 연합은 개혁교회 전통에서 항상 강조되어 왔다는 점, 그리고 교회연합은 한국 교회 쇄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단간의 완전한 통합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종윤(서울교회 원로목사) 목사가 제시하는 ‘일(一)교단 다(多)체제’ 방식의 연합이 성경적 타당성과 교회사적 실례, 현실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상적인 형태로 보인다. 이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 될 수 있나?”라는 논문에서 하나의 교단으로 일원화하되, 현재 교단이 지니는 각 교단의 특성을 인정하고 치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제도인 ‘일교단 다체제’를 제안한 바 있는데, 이런 방식은 호주장로교회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다.
호주의 경우 전국 규모의 호주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PCA)는 3년마다 총회를 개최하여 범교회적인 의안을 처리하지만 실제적인 주요 사안은 각주별로 조직된 주 총회가 독자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장로교라는 우산 아래 있으나 주별로 교회 행정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체제를 이 목사는 하나의 교단 다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우선 동일한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하나의 교단을 이루고, 잠정적으로 체제의 다양성을 인정하되 점진적인 조직의 연합과 통일을 추구해가면 분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연합은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다. 이런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교회는 분명히 새로운 얼굴로 서게 될 것이다.
'오직예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격 조건, 공로와 무관한 구원 (0) | 2012.06.08 |
---|---|
죄를 인정해야...창골산 봉서방 글 (0) | 2012.06.08 |
개혁주의 신학자가 바라본 예배 개혁 무엇이 성경적인 예배인가? (0) | 2012.06.02 |
접속하라. 열릴 것이다. - 이어령 (0) | 2012.05.06 |
성령으로 인도받는 삶은 아기의 시작과도 같이...-이민아 (0) | 2012.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