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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개혁주의 신학자가 바라본 예배 개혁 무엇이 성경적인 예배인가?

by 설렘심목 2012. 6. 2.

개혁주의 신학자가 바라본 예배 개혁 무엇이 성경적인 예배인가?

출처: 목회와 신학

개신교 예배의 바람직한 방향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예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깊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예배 개혁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목회와 신학> 2012 4월호 특집예배, 예전과 문화가 만나다에 게재된 기사와 세미나 보도 등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이 땅의 예배가 시급히 개혁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를 포함한 여러 대안 예배나 성찬과 같은 예전적 요소를 강조한 예배가 개신교의 예배 개혁 모델이 될 수 있는가?

필자는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해 예배를 고찰함으로써 개신교 예배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예배 개혁의 기본 원칙: 진리와 영 안에서의 예배

예배 개혁이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다.

종교개혁이 이뤄졌을 당시 사람들은 새롭게 변화된 예배를 경험하며 이제는 더 이상 예전 방식대로 예배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만큼 예배 개혁은 종교개혁의 가장 놀라운 결과(산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예배가 개혁되면서 교회 전체가 개혁되고 그에 따라 삶과 문화도 개혁되기 시작했다.

개혁자들은 무엇보다성경에 따른 예배를 원했다. 성경에 따라 예배하는 것을 예배 개혁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종교개혁 정신에 따르면 전통을 고수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물론 개혁자들이 무조건 전통을 배척했던 건 아니다. 전통 중에도 성경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 누구보다 이를 중요하게 여기고 지켜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전통이어서가 아니라 성경의 원칙에 부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시대의 예배를 개혁한다고 할 때 이 원칙을 천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성경에 따른 예배가 돼야 한다.

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성경에 따른 예배가 곧진리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truth)라고 생각했다. 또 진리 안에서, 진리에 따라 드리는 예배는 반드시 성령님 안에서 이뤄진다고 봤다. 진리 안에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4:24)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Spirit)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개혁자들의 모범

이 원칙에 따라 예배 개혁을 어떻게 이뤄가야 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일단 개혁자들의 모범을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개혁자들의 주장이 완전한 건 아니다. 저마다 견해가 다르고 성경에 충실한 정도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조차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후대라는 유리한 역사적 고지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여러 개혁자들 가운데 가장 성경에 충실했던 예를 생각해볼 수 있고 이에 근거해 우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예배의 방식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진공 상태에서 시작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신약적 변화를 의식했음에도 유대교 회당 예배를 기초로 하여 이를 변용하고 초대교회의 예배 방식을 정립해갔던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주어진 신약 계시에 따라 예배 방식을 변화시킨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계시는 구약적 제사에서 감사의 예배로, 우리의 예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와 유사하게, 중세 가톨릭 방식대로 예배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경에 따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도 성경 계시를 따른 예배 변혁의 하나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현대 가톨릭의 예배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데) 중세 가톨릭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예배와 같지만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예배에 유용할 것으로 보이는 요소를 전부 넣어 사용한 형태였다. 특히 구약 시대 성전 예배의 요소들을 상당 부분 가져왔다. 예를 들어 성소에서 등대로 빛을 비췄던 것처럼 촛대를 동원하고, 성소에 특별한 향을 피웠던 것처럼 예배 중 향을 피우고, 시편에 나오는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따라서 여러 층계송(올라가는 노래)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예배 인도하는 사람을 사제(司祭), 즉 제사장(祭司長)이라고 하면서 그가 하는 행위를제사’(피 없는 제사)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개혁자들도 본래 가톨릭 교도들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오랫동안 예배했었다. 루터 역시 그런 방식으로 제사를 집례하던 사제였다. 하지만 그러던 중 오랜 관습처럼 굳어진 예배를 신약성경의 빛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모든 것을 검토하고 바로잡는 모범을 보여줬던 개혁자들과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오랫동안 해왔으니까, 그냥 은혜가 되니까아무 생각 없이 종래의 예배 방식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속 예배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루터는 신약의 예배가제사(sacrifice)’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루터는 1520년 발표한 논문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교회의 바벨론유수)”에서 성찬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반복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했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려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10:12) 것과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케 하신”( 10:14) 사실을 생각하고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0:18)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에 동의하면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와 이 일을 함께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지 결코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은 이와 같이 예배가제사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데서 시작됐다.

또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근거하여 주께 드릴 진정한 제사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루터는 예배당 안에 있는 수많은 성상(聖像)에 대해서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20:4~5; 5:8~9)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반하는 것임을 천명하면서 예배당 안에서 상들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현한 사람들은 츠빙글리에게서 비슷한 설교를 들은 스위스 취리히시의 성도들이었다. 말씀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던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그들은 이전까지 수많은 상()들이 놓여 있었던 예배당에서 예배를 계속하며 그곳 십자가상을 비롯해 여러 상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예배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외 나머지는 이전처럼 하게 했다. 예배 때 촛불을 켜고 향도 피우는 가톨릭의 예배 방식을 허용한 것이다. 루터는 제사와 상 문제를 제외한 예배의 여타 요소들은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는,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라고 봤다. 그래서 루터파 교회는 오늘날에도 이런 입장을 견지하며 예배 때 촛불도 켜고 향도 피우고 사순절도 지킨다. 또 상당수의 성공회 교회들, 특히 예전을 중시하는 소위 고교회(高敎會, high church)도 이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 개신교 예배지만 개신교 예배와 사뭇 다른 형태를 띠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들 교회는 성찬식 때 무릎을 꿇고 떡과 포도주를 받는다(원하면 서서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고, 화체설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개신교 예배다. 하지만 예배를 집례하는 방식과 분위기는 종교개혁을 도중에 멈춘 듯한 인상을 준다.

개혁파는 루터파보다 더 성경적인 예배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향과 촛불을 켜는 것, 예배 중에 무릎 꿇는 것, 특히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것, 예배당 안에 십자가 상을 놓는 것, 사순절을 지키는 것 등은 신약성경에서 예배에 관한 지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배제했다. 이들은 예배와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침을 내리시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신약성경에 제시된 요소들만으로 예배하기를 원했다. 성경에 기록된 예배에 대한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에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했다. 칼뱅은명령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단언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에 완강히 반대했다. 사람이나 교회가 자의적으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침해하는 것이라 여겼고, 예배와 관련해서도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제도들만 시인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칼뱅의 후예들은명령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는 원칙을 준수했다.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도 하나님이 성경 말씀 가운데 정해주시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을 단호히 금했다.

이처럼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에 있는 요소들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예배 중 성경적 근거, 특히 신약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제거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예배 현실과 우리의 과제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배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 의무감으로 그저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 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과거 종교개혁자들도 자신들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예배하기를 원했고 그 결과 예배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한다. 예배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 예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참된 예배자로 변화시키는 게 우리의 과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참된 예배자로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첫째로 할 일은복음을 순수하고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이 바로 그렇게 했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solus Christus)와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만으로(sola fide) 구원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했기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 예배를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을 개혁하기 원했고 그 결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soli deo gloria)을 위해 예배하고 살아갔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고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이 일을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참된 예배가 이뤄지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잡다한 동기를 일소(一掃)하고, 우리를 구원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분의 백성으로 세워주신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예배할 때 바른 예배가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예배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개혁자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순수한 복음을 다시금 이 땅에 강력히 선포해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왜곡이 결국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를 방해하고 있다는 각성도 크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신칭의의 복음이 우리 가운데 올바로 이해되고 선포되고 믿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바른 예배가 시작될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과 함께하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께 제대로 된 예배일 수 있는지,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으로 이뤄진 것임을 제대로 믿지 않는 예배가 과연 바른 예배가 될 수 있는지 숙고해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바른 복음에 대한 순수한 선포를 교회의 근원적 표징으로 강조했던 이전 교회를 먼저 본받아야 한다. 참된 교회가 참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교회가 아니라면 아무리 장중한 예전을 집례하더라도 그것은 바른 예배가 아니다. 순수한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여 바른 교회가 되는 것이야말로 참된 예배의 선결 조건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교회가 과연 바른 교회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둘째, 복음에 근거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성령님 안에서 예배하는 일을 회복해야 한다. 십자가 공로에 의한 예배를 위해서는, 시공간을 넘어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예배란 성령님에 의해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창조와 구원의 주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경배는 영적인 경배요, 하나님을 향한 바른 예배는 신령한 일이다. 참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순종할 때만 우리의 예배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있다.

셋째,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을 따라 예배하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겠다”( 16:13)고 하셨으니 그분이 우리를 올바른 예배의 방법으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으며 성경의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해야 한다.

구체적인 제안

지금껏 논의했던 바에 비춰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 특히 예배 갱신이나 개혁과 관련하여 새롭게 제안할 점을 간단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예배가 의식화(儀式化)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전이 복잡해지고 의식화할수록 타락한 예배라고 했던 우리 선배들의 조언을 잘 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약성경에 있는 요소들만 갖고 예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말씀과 성례 중심의 예배는 개혁자들이 항상 강조해온 것이다. 종교개혁파 교회는 언제나 말씀과 성례를 중심으로 예배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이때에도 성례가 항상 말씀을 필요로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례는 복음을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내고 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가 모두 중요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말씀이다. 복음이 가려지면 아무리 성례를 열심히 해도 그 공동체는 교회가 아니다.

3. 성찬을 행할 때 무릎을 어떤 순서로 꿇어야 하는지 등의 논의는 정말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과 성령에 의지하여 피를 흘려가면서 폐지했던 것을 어찌 되살릴 생각을 하는가?

4. 마찬가지로 성찬의 떡과 잔을 높이 치켜드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다. 중세에 이런 상징적인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떡과 포도주에게 절을 한다거나 숭배할 목적으로 높이 치켜들거나이는 예식의 성질에 반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이 예식을 제정하신 본래의 뜻에도 어긋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9 4)고 명시한 사실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5. 성찬상을 마치 제단 같은 의미로 전달하기 위해 예배당 중앙에 놓는 것, 성찬상에 촛불을 놓는 것 등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선배들이 피 흘려가면서 폐지한 것들을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도입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예배당 앞부분을 제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고쳐야 할 잘못된 습관이다.

6.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놓는 것도 심각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 선배들이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반응하며 폐지한 것들인데, 이것을 슬그머니 용납해서는 안 된다.

7.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독특한 복장을 하거나 가운을 입는 것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평상복을 입고 자연스럽게 예배를 인도하는 방식이 좋다. 일상생활에서도 목사들이 독특한 성직자복을 고집하는 것은 애를 써서 성직자복을 폐지한 선배들의 노력을 무위화(無爲化)하는 것이다.

8. 예배 중 찬송은 예배에 적합한 곡으로 고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과 태도로 잘 연습하여 부르도록 한다. 누군가의 대표 기도는 우리 모두가 속으로 같이 기도하는 것이며, 누군가의 특송도 우리가 드리는 찬송을 대표로 부르는 것이기에 모두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따라서 특송이 끝난 후 청중이 박수를 치는 것은 함께 찬송한다는 의식이 결여된 것이다. 예배 중에는 사람에게 박수를 치는 등 사람을 높이는 일을 피해야 한다.

9. 예배 가운데 성경을 연속해서 읽는(lectio continua) 순서의 부활이 필요하다. 중세에는교회력에 따라 선택된 본문 읽기(lectio selecta)’가 행해졌는데, 개혁자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차례로 읽어가며 공부하고 묵상하는계속적인 읽기(lectio continua)’와 강해를 강조해왔다. 오늘날 상황에서 교회력을 강조하는 것은 개혁자들의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10. 주일 아침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수요 기도회 등 공예배에 모든 교우가 참여하도록 강력하게 권면해야 한다. 또 문화적 적응이라는 명목하에 예배를 이상한 것으로 변질시키거나 소멸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요소를 너무 생각한 나머지 참된 예배가 사라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말한 후에 우리가 다시금 강조해야 할 것은 참된 예배란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다해 예배에 힘썼고, 놀랍게도 예배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으며, 그 힘에 의존하여 매일매일 예배하는 사람으로 살아갔다. 우리는 그런 귀한 선배들을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돼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 회복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실것이다( 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