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김대중은 빨갱이'란 말 오버 아니다. | |||||||||||||
간첩잡는 전문인력 581명을 일거에 '학살'한 김대중 조영환 편집인 | |||||||||||||
비판을 가했다. “김대중을 빨갱이라 한 지만원을 극우요 오버한다는 언론들에게”라는 글을 통해 지만원 박사는 “김대중은 23살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한민통 사건 등을 통해 이미 북한을 위해 싸우는 북한의 전사로 판명 났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저지른 반역행위들은 너무도 많이 있고, 본(시스템클럽) 홈페이지에도 매우 게시돼 있다”며 “국민 몰래 적장에 핵자금을 대주고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진다’는 등의 말로 간첩 이상의 행동을 했고, 죽기 전까지도 광화문 촛불 폭동을 부추기며 북에 충성하다가 죽었다”며 '김대중 빨갱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재강조했으며, 한국의 언론들이 김대중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도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월간조선 2005년 01월호에는 게재된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요원 장혜영의 폭로를 들이댔다. “386 주사파는 통전부의 정규군이고, 우리는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거나 “통전부-친북단체-남한 정권이 김정일 지령하에 3위1체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대북지원금은 대남공작비로 돌아간다”거나 “김정일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지시했다. ‘김대중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라는 등 월간조선에 게재된 장혜영의 폭로를 열거하면서 지만원 박사는 김대중의 종북성향을 강조했다.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김정일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고 지만원 박사는 추려냈다. 그리고 “정상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적국의 괴수를 「수령님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도 주목했다. 오랜 동안에 걸쳐 양성된 간첩잡는 전문인력 581명을 일거에 '학살(해고)'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대공전선이 와해됐다. 이와 더불어 기무사(900명), 경찰(2000명), 검찰에 설치된 대공전선이 모두 와해됐다”며 “북한 최고급 간부들의 사정을 잘 아는 위치에 있었던 상좌 출신 필명 다윗에 의하면 김대중은 1998년 10월에 박정희 시대로부터 북한 군부에 심어놓은 우리측 애국자들 300여명에 대한 명단을 김정일에 보내 이들 300여명 모두를 하루아침에 숙청케 했다”며 김대중의 안보기관 해체 작업을 지적했다. 북한 상좌출신의 ‘김대중은 1948년부터 김일성이 고용한 북한 간첩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김대중의 종북성을 비판했다. 김대중의 종북성을 지적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는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라거나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쪽 10줄-166쪽 2줄)”라는 증언도 있다고 지만원 박사는 열거했다,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57쪽 하1줄-258쪽 11줄)”라는 탈북자의 주장도 재록했다. [조영환 편집인: http://allinkorea.net/]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저지른 반역행위들은 너무도 많이 있고, 본 홈페이지에도 매우 게시돼 있다. 국민 몰래 적장에 핵자금을 대주고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진다’는 등의 말로 간첩 이상의 행동을 했고, 죽기 전까지도 광화문 촛불 폭동을 부추기며 북에 충성하다가 죽었다. 내년에는 이희호 재판이 본격화될 것이다. 이희호와 검찰은 필자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추출한 아래 4호에 있는 개의 글들을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행위가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희호와 검찰은 그 내용들이 허위사실이라고 판단할만한 근거가 없다. 내년의 재판에서는 이희호와 검찰의 얼굴들이 뜨거워 질 모양이다. 대북지원금은 대남공작비로 돌아간다” 자신들이 국보법 처벌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를 캐자는 것은 그들의 현재를 감추기 위한 것이고, 그들이 친일을 캐려는 것은 그들의 친북을 감추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성동격서 전략인 것이다.”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4개(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 통전부), 그것도 모자라 인민군 무력부 안에 정찰국이라는 것을 또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인원을 다 합치면 무려 3만여 명에 이른다.”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폭파」, 1992년 10월6일 「남조선 노동당 사건」, 1996년 9월15일 「강릉해안 잠수함 침투」, 1998년 12월17일 「여수해안 간첩선 침투」,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해상 교전」, 2002년 「서해교전」 등이 반민족·반통일의 원흉 김정일이 저지른 사건이다. 이 모든 것들을 발기하고 총지휘한 악한의 직접 지휘체계下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대남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김정일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적국의 괴수를 「수령님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오랜 동안에 걸쳐 양성된 간첩잡는 전문인력 581명을 일거에 '학살(해고)'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대공전선이 와해됐다. 이와 더불어 기무사(900명), 경찰(2000명), 검찰에 설치된 대공전선이 모두 와해됐다. 김대중은 1998년 10월에 박정희 시대로부터 북한 군부에 심어놓은 우리측 애국자들 300여명에 대한 명단을 김정일에 보내 이들 300여명 모두를 하루아침에 숙청케 했다. 우리 정보기관은 김신조 소대의 방차대 출신 2명을 전향시켜 북에 가서 출세하여 대한민국에 충성하라, 북으로 보냈는데 1998년 10월까지, 림태영은 3성장군, 우명훈은 2성장군으로 승진해 중요직책들(총참모부 2전투훈련국장 등)을 맡고 있었다. 남한에 충성을 맹세했던 림태영(3성)과 우명훈(2성)이 있었고, 우명훈의 처남 리상일(저격여단장)도 끼어있었다한다. 이들 300명 정도의 고급간부들은 남한에 협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김대중 시대에 숙청된 것은 남한의 김대중이 이들의 명단을 북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라는 소문들이 고위직 사회에 파다했다한다. 하나원 원장인 김중태가 다윗에 와 “청와대 홍보수석 등 40여 명이 증인과의 인터뷰를 원하니 응하겠느냐”며 의사를 타진해 왔고, 그는 이에 응하겠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나는 북한의 중상류층에서 인식하고 있는 김대중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데 그걸 그대로 말해도 되겠는가” 확인했고, 홍보수석은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 했다. 이에 다윗은 거침 없이 “김대중 대통령은 1948년부터 김일성이 고용한 북한 간첩”이라는 북한 중상류층의 인식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 (165쪽 10줄-166쪽 2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224쪽6-12줄)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57쪽 하1줄-258쪽 11줄)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421쪽 하3줄-422쪽 1줄) 대북 공작’ 南 3000명, 北 250명 숙청된 98년이 분수령[중앙선데이] 입력 2011.12.25 11:31 / 수정 2011.12.25 11:34김정일 사망과 한반도 대북 휴민트 붕괴, 그 내막"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국가정보대학원에서 특강을 마친 국가정보원 신입 요원들이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원훈(院訓)이 걸린 복도 계단을 오르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 고위 간부를 지낸 A씨는 본지 기자와 만나 “국정원에 가 보니 대공 분야에는 쓸 사람이 거의 없어 깜짝 놀랐다”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몇 년 전 일이지만 최근 김정일 사망을 까맣게 몰랐던 요즘 ‘국정원 무능론’의 역사가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최고의 정보 기관은 언제부터 이런 지경이 된걸까. 남한이 먼저였다. 그해 3월 말 당시 안기부 대북공작국 소속 간부 A·B씨는 ‘재택근무’ 명령을 받았다. 4월 1일부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휴민트(인적 정보)를 맡은 대북 공작국과 대공 수사국이 조직 개편으로 없어졌다는 게 명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한 달 조금 지난 때였다. 새 대통령은 안기부에 대대적 물갈이 폭풍을 일으켰고 북한 파트도 휩쓸렸다. “4월 1일은 국정원 581명 직원들이 당한 날”이라고 표현한다. 중앙정보부 때부터 29년6개월째 근무해왔고 이때는 제주도 부지부장이었던 그에게 새 지부장은 3월 31일 ‘면직 및 재택근무’를 통보했다. 사유는 ‘한나라당 서청원 사무총장과의 친분’이었다. ‘국내 정보·정치 파트의 직원과 북풍 사건 개입자들이 다 잘렸다’ ‘경상도 70%가 쫓겨났다’ ‘북한국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말들이 난무했다. 이즈음 파견 근무를 마치고 검찰로 복귀한 권영세 국회 정보위원장(한나라당)은 “당시 살생부가 돌았다”고 기억했다. 거기엔 A씨 등 북한 공작국 소속 간부, 대공 수사국 간부, 보안 과장 등이 들어 있었다. 이 가운데 21명이 99년 3월 30일 면직 취소 소송을 냈다. 소송 과정에서 인사 명령부 같은 자료가 취합되면서 물갈이 광풍의 면모가 드러났다. 동시에 안기부 밖에선 대공 경찰 2500명, 기무사 요원 600여 명, 공안검사 40여 명이 해직됐다. 8개월 뒤 12월의 ‘2차 쇄신’ 내용은 300명의 추가 명퇴였다. 대북 공작국과 대공 수사국이 없어졌지만 면직되진 않아 ‘일 없이 남은 직원’ 들이 대거 나갔다. 당시 안기부 내 북한 분석관이었던 P씨는 “이사관급 이상 간부 수백 명이 당시 쫓겨나는 것을 봤다”고 했다. 99년 1월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쫓겨난 자리를 500명 새 직원이 채웠다. 모두 이종찬 원장-이강래 기획조정실장 때의 일이다. (※21명은 2003년 9월 12일 면직 무효 소송에서 승소했다. 송 대표는 “대북 담당들은 대외 접촉을 꺼린다”고 했다.) 당시 상좌로 총참모부 산하 함경도 무역회사 책임자였던 그는 이때 많은 장성들이 보위부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 친했던 교도훈련 지도총국장 임태영 상장(우리의 중장), 총참모부 2전투 훈련국장 우명훈 중장, 64저격여단 이상일 소장 등이 다 잡혔다. 모두 “남한 정권이 북한 사람을 고용했던 자료를 북조선에 넘겨줘서 잡은 것”이라고 했다. 김씨도 99년 9월 13일 ‘정부 전복 음모’로 체포돼 9일간 감옥 쇠창살에 매달려 고문을 받았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15년 형을 받았다가 ‘힘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나왔고 이어 탈북했다. 사업차 충남 홍성에 있는 그를 23일 찾아갔다. 모두 장군 100여 명, 당 간부 150명 이상이 체포되고 일부는 사형됐다.” 이와 관계없이 과거 남쪽에서 북한 내 첩보망을 일부러 공개시켰었다고 국정원 일각에서 주장한다고 말한 점은 주목된다.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였던 김모씨는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이 되는 기간을 7년에서 5~6년으로 줄였다”고 했다. 이 같은 신구 인력의 대거 교체가 대북 정보 수집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만난 사람 모두가 “위축됐다”고 말한다. “대북 공작을 완화하고 템포를 늦추라”는 것이었다. 이씨는 “그런 일을 전화로 접수 못한다. 문서로 달라”고 했다. 소용없었다. 예산이 뭉텅 잘려나갔다. 그는 “2006년 노무현 정부 때까지 계속 20% 정도씩 줄였다. 예산이 주니 인력도 줄었다. 강제 퇴직은 안 시켰지만 남는 팀원을 야전으로 보내면 적응 못하고 결국 퇴직했다. 그런 상황은 정보 활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유씨는 “활동 내용은 법에 공개 금지돼 있어 말 못하지만 활동이 둔해졌고 정보 소스 개발이 안 되고 정보의 질이 떨어졌다”고 했다. 단계가 복잡해질수록 돈이 더 든다. 휴민트 활동비 삭감은 우선 정보 당국의 활동을 줄이고 이 돈에 의지하던 휴민트 사슬에 타격을 준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을 했던 탈북자들이 다른 돈에 흔들리게 됐다. 이중 첩자로도 돌아섰다. 그래서 2005년에 국정원에서 ‘탈북자 사용 자제’ 지시가 내려왔다. 탈북자 역할이 컸던 북한 내부 첩보망이 크게 위축됐다. “돈이 적은 우리는 정이나 의리로 정보원을 대하는데 아직은 다행히 통한다”고 했다. 그러나 탈북자 박모씨의 말은 다르다. “한국 정보 당국은 너무 짜다. “그런 게 쌓이면 김정일 사망 같은 대형 정보가 일본으로 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 직원은 “조금 위험하다 싶거나 남북 관계를 긴장시키는 대북 공작은 하려 들지 않고 몸을 사린다”고 지적한다. 결국 모든 상황들이 평소 정보의 질을 떨어뜨리고 초특급 정보 수집도 어렵게 만드는 방향으로 향한다. 또 다른 전 국정원 고위 인사도 “사람들은 국정원이 첩보 영화에서처럼 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알고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며 “그러니 그런 기대를 갖고 임명된 새 원장이 브리핑을 받을 때 알려진 것보다 조금 진전돼 있을 뿐인 것을 보고 다 놀라게 된다”고 했다. 권영세 국회 정보위원장도 “종합 분석력을 빼면 국정원의 정보 수준이 시민사회보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송씨는 “2008년 대통령 특명에 따라 김성호 원장이 국정원 과거사 조사에 나서 연인원 3000명이 6개월간 동원돼 1만5000쪽짜리 보고서를 냈다. 이후 국정원은 부흥에서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이다. 최근 국정원 간부들을 만났던 전직 간부는 “이 정부 들어와 대북 업무 조직을 재편하고 경쟁 구도도 만들었지만 ‘몇몇이 인사를 휘두른다’는 불만이 팽배해 있다”며 “ 많은 이가 ‘사고 안 치고 복지부동하며 사는 게 좋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다른 고위 간부도 “국정원 내 5인방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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