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라사랑.시사.

김정남몰락사 - 조선 강철환기자

by 설렘심목 2010. 12. 9.

베일 벗는 김정남 몰락사    2010/11/15 15:55 추천 7    스크랩  2
http://blog.chosun.com/nkch/5099622
베일 벗는 김정남 몰락사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3남 김정은(27)이 확정된 이후 사실상 중국에 망명 중인 장남 김정남(39)의 움직임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는 최근 일본 아사히 TV와의 인터뷰에서 “3대 세습을 반대한다”며 김 위원장을 자극해 신변안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는 왜 해외에서 떠돌며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계속하고 있을까?

김정남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김정남이 한때 김정일의 유력한 후계자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총명한 두뇌와 리더십을 갖춰 김정일이 그를 인정한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김정남이 아버지와 형제들을 등지고 해외를 떠돌게 된 데는 후계자 내정을 둘러싼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게 된 숨겨진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김정남이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온 것은 1987년경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 북한 고위층 자녀와 함께 어울렸던 고위 탈북자 오영남씨는 “김정남을 처음 본 것은 그가 16세이던 1987년 전후”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정남은 평양 고려호텔에 자주 나타났고 또래 친구들이 없어 상당히 외로워 보였다고 한다.

당(黨) 조직부 간부들과 늘 함께 다니느라 지루해 했던 김정남은 평양시를 주름잡던 같은 또래의 황태자 그룹과 놀고 싶어했지만 이들이 김정남을 피했다.

황태자 그룹은 김일성의 외척 집안인 강진우·강정모와 장성택의 형 장성우의 아들인 장영철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인물인 김정남과 함부로 놀다가는 어떤 정치적 보복을 당할지 몰라 김정남을 의식적으로 피했다고 한다. 한창 민감한 나이에 소외감과 따분함에 시달리던 김정남은 고려호텔에서 총기난사소동을 벌이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평양에선 총기난사소동을 벌인 김정남이 김정일한테 가죽벨트로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한 고위탈북자는 “김정남이 청소년 시절에는 어머니 성혜림이 김정일로부터 외면받고 자신도 아버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자 성격이 과격해지고 거친 행동을 보였지만 차츰 안정을 되찾아 1990년 초부터는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고 말했다.

후계자 수업을 받을 당시 김정남 주변에는 15명 이상의 호위병과 당 조직부 간부들이 늘 함께 다녔다. 김정일은 김정남에게 특별히 학자들을 붙여줘 후계자 수업을 받도록 했다.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주변 간부들의 김정남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아 김정일도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마음을 굳히는 단계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생전에 “김정일의 세 아들 중에 김정남이 가장 우수하고 그가 집권하면 북한은 더 오래갈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특유의 배짱과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결국 많은 사람과 사귈 수 있었고 특히 호기심이 많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북한 전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북한의 현실을 현장에서 소상히 지켜봤다고 한다.

한 군인 출신 탈북자는 “김정남이 1992년경에 김정일과 함께 한 군부대를 방문할 때에는 인민군 대장복을 입고 나타났다”며 “당시 많은 군 간부들은 김정남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주장했다.

개혁·개방 소신이 결국 몰락 불러

그런 김정남의 후계자 지위가 흔들리게 된 것은 김정일에게 대든 게 화근이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절대 권력을 쥐게 된 김정일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 김일성 시대에는 그의 라이벌인 최용건 전 국가 부주석 등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었다.

한때는 동료였던 그의 입에서 “일성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일성과는 허물없이 지냈다. 하지만 김정일 등극 이후에는 아무리 나이 든 간부들이라 하더라도 최고지도자에게 함부로 입을 뗄 수 없게 됐다고 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김정일이 등장하고 나서 혁명 원로들도 바짝 긴장할 정도로 김정일이 기강을 세웠는데 그는 독재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김정일에게 대드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김정남이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 김정남은 전국을 다니면서 북한의 현실을 목격했다. 그는 주변 간부들과 함께 다니면서 “조선은 개혁·개방하지 않으면 큰일난다” “아버지의 정책은 잘못됐다”고 거침없이 떠들고 다녔다.

이런 김정남의 발언들은 결국 그의 주변에 배치된 보위부요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김정일에게 보고됐고 이때부터 김정일은 장남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정남은 김정일을 찾아가 직접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 문제로 부자(父子)간에 언성을 높인 일도 있었다고 알려졌다.

이런 김정남의 소신 때문에 당시 주변 간부들은 오히려 김정남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고위탈북자는 “당시 평양에서 김정남을 아는 고위간부들이 워낙 많고 그가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개혁 성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고 말했다.

이런 김정남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김정일은 1999년 봄 김정남의 최측근인 ‘태권도 전당’ 관장인 박억련을 체포해 보위부에 연행했다. 평양 출신의 한 탈북자는 “대남공작부서 고위간부 출신인 박억련은 비상한 두뇌와 사교성을 가진 사람으로 김정남에게 충성을 맹세한 최측근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김정남은 당 조직부 등 공식적인 측근그룹 외에 사(私)조직도 갖고 있었는데 박억련이 사실상 김정남의 사조직 총책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박억련은 김정남의 막대한 비자금을 관리했고 예체능계 여성들을 선발해 김정남에게 바치기도 했다. 김정남과 하룻밤을 잔 여자들은 3000달러의 현금을 받았다. 박씨는 김정남을 위해 소위 기쁨조를 대동한 파티까지 열었고 이 모든 것은 김정일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고 한다. 김정일은 아들이 기쁨조 파티를 하는 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지만 개혁·개방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것에 대해서는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박억련은 보위부에 연행된 후 한 달도 안돼 모진 고문으로 사망했고 다른 측근들도 차례로 보위부에 소환돼 모두 다시 나오지 못했다. 사실상 박억련 사건은 김정남의 종말을 예고한 사건이었고 김정일은 이때 김정남을 후계자에서 제외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2001년 일본 입국 중 체포는 고영희 작품?

북한 내 고위층들 사이에서 외로운 존재였던 김정남이 유일하게 정을 나눈 사람은 자식이 없는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로 알려져 있다. 북한 내 고위소식통에 따르면 지금 중국에서 김정남이 북한을 비방하고 다녀도 북한 정권이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김경희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출신의 고위탈북자는 “김경희가 당 대회나 큰 행사에 나올 때 어린 김정남을 데리고 나온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희는 김정남이 어릴 때 쫓겨난 성혜림을 대신해 김정남을 키우며 많은 정을 줬고 그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도 했다. 따라서 김정남은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과의 관계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관계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권력의 속성상 김정남의 빠른 등극이 자신의 몰락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점을 직감한 장성택이 김정남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후계자를 밀고 나서 가장 먼저 숙청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과 함께 강력한 후계 라이벌이었던 김영주는 유일하게 김정일을 훈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 가정교사 출신의 탈북자 김현식 교수(미국 조지메이슨대)는 “한때 김정일이 김영주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정일은 아버지를 대신해 호통치는 삼촌 김영주를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김일성에 의해 권력이 아들에게 넘어가자 김영주는 김정일을 데리고 다니며 사실상 후계자 수업을 시켰고 당 조직부 등 조직관리에 대해 실무경험을 체계적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하지만 1974년 2월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등극하자마자 김영주는 곧바로 자강도 산속으로 추방됐다. 아버지 김일성이 “다시 불러오라”며 여러 번 부탁해도 김정일은 끝내 말을 듣지 않다가 자신의 권력이 완전하게 다져진 1993년이 되어서야 김영주를 다시 평양으로 불러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산송장이 된 상태였다. 김영주는 지금도 김정일에 대해 대놓고 욕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갇혀 있던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김영주의 전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장성택은 ‘김정남 시대’가 되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김정남 후계구도가 빠르게 형성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 있다. 전 북한 외교관인 현성일 박사는 “사실상 김정남을 제쳐놓고 김정은을 세운 것은 어쩌면 장성택과 김경희가 살아남기 위해 미리 손을 쓴 결과”라고 말했다. 이들이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와 손잡고 김정남을 밀어내는 데 일조했고 결국 김정남은 비운의 왕자가 된 것이다.

2001년 이후 사실상 해외 생활

김정남이 2001년 4월 일본에 불법 입국했다가 체포돼 북한에 송환된 사건은 그가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생명이 완전히 끝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북한 내부에서는 ‘고영희 일당이 김정남을 김정일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기 위해 일부러 역(逆)정보를 외부에 흘려 김정남이 체포되게 만들어 망신시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김정남은 아버지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북한 내 고위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은 그래도 김정일에게 충성한다는 명분으로 해외비자금 관리와 외화벌이를 하겠다고 나섰고 김정일은 중국과 마카오에서의 비자금 관리와 외화벌이를 김정남에게 맡겼다고 한다. 김정남은 일본과 중국을 잇는 무역거래를 독점하면서 막대한 외화를 벌었고 마카오의 김정일 비자금도 일부 자신이 관리하면서 독자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을 들락거리며 중국 내 ‘태자당’과도 깊은 연계를 맺고 있어 중국의 보이지 않는 힘이 김정남을 보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중국 정부는 3대 세습에 대해 겉으로는 침묵하면서 인정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이 북한을 감싸고 돌수록 국제적 망신을 자초할 뿐 아니라 글로벌 리더십도 상실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결국 북한 정권을 변화시켜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압력 카드로 김정남을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