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알파 코스 서창원 목사(삼양교회, 총신대 신대원 교수)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전 세계적으로 교회성장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알파 코스에 대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학부의 요청에 따라 필자는 합동측 교단이 지향하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본 알파 코스의 성경관과 구원론을 살펴보았다. 이번에 호남지역 교회 협의회 주최에서 요청한 것 때문에 교회부흥에 목말라하는 목회자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초청해 주신 회장님과 임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여기에 참석한 분들 중에는 교회 성장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던 끝에 알파 코스를 도입하여 실시하고 있는 분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실제 그 과정을 도입한 교회들 중 상당한 교회들이 좋은 효과를 보았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쏠린 분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총회 신학부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자 혹이라도 문제가 될 소지 때문에 포기하거나 무시하고 진행하거나 둘 중에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알파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입장에서 점검하고 교회성장에 대한 개혁교회 입장이 어떠한 지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오직 성경!’ 이라는 16세기 종교개혁의 기치는 지금도 변함없는 개혁교회의 소중한 모토라고 믿는다. 그리고 한국교회 설립 초기 때부터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칼빈주의 정통 신학과 청교도 신앙의 보배로운 유업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사명이 우리 교단의 모든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만일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아니 시대적 사명이 다한 유물이며 이젠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할 골동품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전혀 새로운 성경과 교회를 설립하도록 몸부림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진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유형의 사람들에게 다 적용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들이 성경 진리에 기초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일은 진리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입맛에 맞기 때문에 일단 먹어보고 판단하자는 것은 이미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난 다음이기 때문에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고사성어에 이런 말이 있다. 우자암어성사(愚者暗於成事) 지자견어미맹(智者見於未萌). 즉 문제가 이미 발생해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가 싹트기 이전에 이미 예측한다는 말이다. 목사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고가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일군들이다. 그의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로서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들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성도들을 자각케 하는 사명이 있다. 그런 목사가 지혜로운 목사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문제가 발생해도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난 알파를 연구하면서 조금만 보아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어 성도들과 교회에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을 보면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부분의 가담자들은 몰라서 가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런 자리를 맞이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물론 나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선입관이나 어떤 편견을 버리고 공정한 분석과 판단을 통하여 일선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어떤 새로운 전도방법이나 교회성장 프로그램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떤 교리가 가르쳐지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신령한 양식을 공급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로서는 매우 타당한 일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크고 많다는 것이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급한 성경구절처럼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위험성 때문에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규정하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순결성 못지않게 교리적 순결성을 지켜나가는 일에 큰 격려가 될 것이다.
나는 본 논문을 작성해 감에 있어서 먼저 알파코스에 대한 개괄적 설명과 더불어 개혁주의 성경관과 구원론 및 성령론에 대한 입장에서 본 알파코스의 가르침들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이 논문을 위해서 나는 알파코스 본부에 연락하여 그곳에서 발행한 책자를 다 받아서 섭렵하였다. 그리고 알파코스에 대한 비평적인 글들 및 동조적인 글들을 함께 읽고서 발제자로서 그리고 개혁교회의 한 목회자로서 평가하고자 노력했다. 본 글은 신학부 공청회에서 발표한 것을 토대로 그리고 내가 연구하지 아니한 부분이지만 호남지역 교회 협의회를 위해서 따로 삽입한 성령론을 포함하여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개혁주의 성경관에서 본 알파코스
알파 코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의문점을 함께 나누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돕는 전도 프로그램으로서 그 목적 다섯 가지의 첫 글자를 딴 칭호이다.
Anyone can come(누구든지 올 수 있다),
Learning and laugher(배우며 즐기라),
Pasta(음식을 먹으며 교제한다),
Helping one another(서로 돕는다),
Asking anything(의문 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으라).
알파코스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을 가진 사람들, 또는 기독교에 대하여 알고 싶은 자들을 주 타깃으로 삼아서 그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가진 의문점들을 풀어주고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이 되게 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여기에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감동이 없는 형식적 예배에 길들여져 있는 기존 교회 신자들을 일깨워 활력이 넘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역동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단 기존 교회의 예배를 지루하고 재미없고 감동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로 규정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니키 검불이 소속되어 있는 성공회 예배 의식 자체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통적인 장로교 예배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이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성공회 교회가 일 년에 몇 백개씩 문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분석은 지루하고 딱딱한 예배형식에 있다고 하는 것이 틀리지 않는다. 그 결과 알파 코스의 도입은 분명 성도들에게 활력을 심어주고 교회 생활을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만든 성공적인 면이 많이 있다.
문제는 수치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논지를 펼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등 기독교 이단들도 양적으로만 본다면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큰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분명하다’, 혹은 ‘참여하는 교회들이나 성도의 숫자가 많으면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교회성장의 실용주의 논리에는 언제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교회성장에 사활을 건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작은 펀치에는 관심이 없고 단 한방에 승부를 걸고자 하기 때문에 몇몇 부작용보다는 일단 성공이라는 미끼에 영혼을 송두리째 팔아먹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리고 전도 프로그램이라는 차원에서만 말한다면 알파코스는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을 떠나서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교회의 중심자리에 있어야 할 올바른 신학적 교훈(교리)들이 변두리로 밀려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핵심을 차지하게 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본 연구를 통해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파 코스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과연 성경적이며 올바른 신학적 토대위에 있는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본 논문은 신학적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인 입장에서 성경관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에 따라 신조와 삶이 달라지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관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알파 코스에서도 주 텍스트인 <인생의 의문점들>이라는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제반 의문점들을 성경을 근거로 풀어가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상관없이 일방적인 주장이 아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실망스럽게도 그들의 교재에는 특별히 성경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은 거의 없다.
그러나 특히 네 번째 질문인 ‘왜 그리고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에서 알파코스가 견지하고 있는 성경관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다른 도서들에서 간간히 언급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진술은 그들의 성경관이 어떠함을 추측하게 한다. 그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변을 통해서 개혁주의 입장을 밝힌다면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는 성경이 무엇이냐에 대한 그들의 진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개혁파 장로교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다루고 있는 성경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러하다:
‘지어진 피조물들을 통해서는 사람이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 뜻을 충분히 깨우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선언하신 뜻을 전부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성경은 신구약 성경 66권으로 되어 있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다. 여기에는 성경의 독특성과 무오성과 완전성 및 충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저자들이 있지만 신적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독특성과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받아 적은 것이라는 측면에서 무오성 및 죄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완전성과 충분성을 말하는 것이다’(필자의 요약 설명임).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과 신앙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 도모가 성경에 명백히 적혀있거나,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해 그의 경륜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이 성경에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 계시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유전에 의해서나 아무것도 추가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에 계시된 것들을 구원에 유효하도록 이해하는데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하여는 항상 지켜야 될 말씀의 일반 법칙에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조정되어야 할 인생의 행동과 사회의 공통한 어떤 사정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이태릭체는 저자의 것)
기본적으로 이 부분은 개혁주의 입장이나 알파코스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과 성도의 삶의 척도로서의 말씀을 그들도 동일하게 믿고 있다.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니키는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며 하나님이 그 저자이시다. 따라서 성경은 흠이 없는 것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은 모든 신조와 행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우리의 입장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경의 자의적 혹은 주관적 해석의 길을 열어놓고 있는 말이다. 전형적인 알미니안주의적 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알파 시작하기(Telling others)라는 책에서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르는 광경을 자의적 해석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는 사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작업을 언급하고 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민 행위를 가리켜 우리가 취해야 할 하나님과의 협력적 행위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황당한 해석은 구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를 내민 것이 없이는 홍해를 건너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리를 견지한다. 그래서 ‘성경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가고 멈추라 하는 곳에 멈춘다’는 말을 쓴다. 칼빈이 주장한대로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는 것은 성경이 금하고 있는 법만큼이나 금지의 법’임을 개혁파 교회는 신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규범’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은 듣는 귀도 없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곳에서는 우리도 침묵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언제나 주 텍스트이지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참고문헌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을 보충자료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완전성과 성경의 충분성을 도외시하는 것이 된다. 칼빈은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 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 외에 자신의 말씀을 첨가 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보다 더 정확하고 보다 더 확실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밑줄은 필자의 것임)
물론 니키도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심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성경의 충분성을 의심케 한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즉 예언, 꿈, 환상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의 이 말은 성경 말고도 하나님은 다른 방식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충분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오순절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직통계시를 사모하게 만들 수 있다. 실지로 성령 수양회라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성령론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성도들이 언제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계시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 도리어 성령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조정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성령에게 부탁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이다. 그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다루면서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이나 느낌이 성경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을 뛰어넘는 기발한 생각이나 느낌을 반드시 성경에서 검증되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있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인지(고전 14:3),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것인지(골 3:15)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령과 상식과 성도들의 조언과 환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주장은 개혁주의 성경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인류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모두 성경에 명백히 적혀 있거나,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로서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성경과 따로 구분해서 성령홀로, 그리고 상식과 성도들이 조언과 환경 등으로 구분해서 인도함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성경의 충족성과 명료성 및 신적 권위의 규범성에 있어서 올바른 성경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실 때 성령께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깨우치시며, 상식이나 성도들의 조언 및 환경을 통한 이 모든 것들도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로서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개혁주의 입장인 것이다. 더구나 성령은 기록된 말씀을 떠나서 따로 역사하시는 법이 없다.
물론 니키의 가르침에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영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한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보여주신 당신의 의지와 성품에 어긋나는 것은 말씀하지 않고 행동하지도 않으신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령은 언제나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성경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할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히 그의 저의가 뭔지 모르겠지만 로마 가톨릭에서 교황과 교회의 전통에 의한 가르침도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뜻 발견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든다.
니키의 성경해석도 개혁주의 성경해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는 ‘지식의 말씀’을 해석할 때 병 고침의 은사로 귀결 짓는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다. 소위 연민의 고통(Sympathy Pain), 즉 자기 것이 아닌 고통을 몸에 느끼는 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보면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가르쳐 보여주는 수단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오순절 교회들이 오랫동안 이단사상에 휘말린 가르침 중 하나에 속한 것이다. 즉 좀 더 치우치면 예수이름을 빙자한 무속신앙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이 받들고 있는 신이 내려서 상대방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족집게로 찍어내는 기이한 신 내림 지식과 성령의 은사인 지식의 말씀과 구분하지 못하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지식의 은사를 사용하여 그런 사람을 찾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아픈 부분과 동일한 신체 부위에서 자신도 그렇게 아픔을 느낀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식의 은사는 치유의 은사와 더불어 치유를 실행하게 하는 은사인 것이다.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말씀을 받게 됨으로 그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에 방불케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기록된 계시에 무게를 두기보다 예언이나 지식의 은사를 가진 사람의 말에 더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성경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것임으로 이단성이 농후한 가르침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지식과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사역과 관련 있는 것이지 병 고침을 위한 기도사역과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지식의 은사와 깨닫는 말씀을 삶 속에서 잘 적용하는 지혜의 은사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 사역과 관련된 이 은사를 어떻게 다른 사람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기도하게 하는 일종의 투시력과 관련지을 수가 있는가? 지식의 말씀은 거룩한 일들과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지혜를 말한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혜는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은밀한 비밀과 고차원의 본질까지를 깨닫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의 잘못된 성경해석은 동성애에 대한 교훈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성경해석이 얼마나 자의적인 왜곡인지를 알 수 있다. 니키는 ‘성경 어디에도 동성애 경향이나 동성애적인 느낌, 동성애의 유혹을 책망한 구절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신 것이지만 죄는 없으니라는 히브리서 4:15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도 마음으로는 그와 같은 경향을 가진 존재였지만 실제로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경에서 책망하는 것은 동성애의 경향이 아니라 동성애의 구체적인 행위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성적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도 완전한 인간이 아님을 부정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은 죄성을 지닌 존재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28절에서 예수님께서 간음의 행위만 정죄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 그 자체도 간음죄로 간주하신 말씀을 보면 그런 성향을 지닌 예수님도 회개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이단적 가르침이다. 그리고 로마서 1장에서나 고린도 전서 6장 및 구약의 레위기 18:22, 20:13 등에서 분명 동성애는 죄악된 행위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면 된다. 그것을 굳이 생각 자체는 죄가 아니고 구체적인 행위만 죄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니키는 이 부분에서 성경을 분명히 왜곡하고 있다.
이처럼 알파 코스의 성경관은 어느 교단이나 교파가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장을 할뿐 개혁주의적 성경관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그리고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니키가 말한 성경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신구약 성경 66권을 말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성경을 언급하고 있고 성경의 권위를 말하고 있으며 성경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은연히 깔고 다른 요소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라고 한 말씀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보다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믿는 자들에게 따른다는 마가복음의 주장(막 16:15-20)은 지금도 얼마든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일들’(works)이라는 단어가 없다. 직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것들보다 더 큰 것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물리적인 기적현상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보다 더 장엄한 일을 행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복음 선포의 일이다.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을 말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오는 놀라운 일이야말로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의 일들보다 더 큰 일이다. 죄 사함을 받고 예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하는 일은 신유의 은사보다 더 큰 일이다.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도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했다(마 12:39).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 외에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적과 기사는 이교도들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는 현상들이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능히 지적한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심이니라”(살후 2:9-12).
따라서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며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여주기 위해 안달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사건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없는 유일한 것이다. 병 고침을 받는 이적이 없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경 진리는 구원함을 얻게 하는 참 지혜에 있어서 여전히 유효한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있어서 그리고 성도로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하다는 신조는 옳다. 그러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모이는 숫자가 줄어들고 성장세가 퇴보현상을 보이면서 어떻게 하면 교회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모색으로 성경 밖의 일들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마치 1907년 평양 대 부흥을 맞본 한국교회가 그 힘을 더욱 가속시키고자 무리한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전개된 것과 같이 한국교회 성장세를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이 비성경적인 방법론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더욱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논리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고 본다.
2. 개혁주의 구원론 입장에서 본 알파의 구원론
개혁주의 구원론은 일반적으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양자, 성화, 성도의 견인 및 영화이다.
죄인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누구든지 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며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키심을 통하여 마침내 영화로운 자리에 이른다는 것이 개혁파 교회의 일반적인 구원론이다. 이 구원론이 알파코스의 가르침 속에서도 들어가 있다. 크게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은총을 설명하고 있기는 하다. 그의 책들이 신학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체계적인 교훈들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니키 검불의 주 저서인 <인생의 의문점들>이라는 책에 나타난 구원론에 관한 것을 살펴보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고자 한다. 그는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거의 망가지고 없어지기도 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선함과 악함, 강함과 약함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최고의 선하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희미한 것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키가 말하고 있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선이 어느 정도인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으나 그가 솔제니첸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 적어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선한 의지의 사용으로 얼마든지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죄를 짓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죄악 중에 출생한 인생을 언급하고 있는 시편 51편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성경은 모든 인간이 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고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들이었음을 가르친다(엡 2:1-3). 그러한 인간에게 찾아질 수 있는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솔제니첸이 지적한 ‘선과 악의 경계선이 인간의 마음에’ 있음을 니키도 믿는다면 그는 “만물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한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더러움 자체일 뿐이다.
니키의 이같은 사상 때문에 왜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절박성을 크게 부각시키는 인간의 곤궁한 상태, 비참함 및 전적 부패와 타락 그리고 그 결과로 지옥의 형벌에 대한 강조점이 거의 없는 것이다. 알파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 아니라 유쾌하고 행복한 삶의 방식으로의 변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파 코스에서의 회심은 사실 그리스도께 향한 회심이라기보다 크리스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회심을 뜻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니키 검블의 인식은 죄의 오염성, 죄의 권세성, 죄의 형벌성, 죄의 분리성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도덕적 윤리적 잣대에 의한 부조리를 더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실지로 죄를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목사는 단지 종교적인 도덕선생으로서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니키도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다. 그러나 대속적 죽음이 왜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죄가 어떻게 사해지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죄가 사해질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소유하게 된다’ 라고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죽음이 인간에게 왜 찾아왔는지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는 삶을 가장 풍성하게 사는 방법이라고만 말한다. 이 말은 풍성하게 사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 기독교가 가장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죄악된 상태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동시에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니키는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성령께서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전에 성령은 우리가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며 비참한 죄인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그러나 알파코스에서는 이와 같은 강조가 없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어지럽힌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즉 기독교인의 라이프스타일로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중생의 은총에 대한 니키의 설명은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거듭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단지 거듭난 자가 가지는 특권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중생은 고장 난 부분을 쓸만한 것으로 수리하는 정도가 아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중생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다(고후 5:17).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죄와 허물로 영적 생명을 상실했던 우리가 새 생명으로 다시 살림을 받는 것이며,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요 3:3,5, 엡 2:5).’
구원론에 있어서 개혁교회 신앙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의 죽음은 우리 때문이며 그가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와 형벌을 친히 담당하신 것임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단지 인간의 지적 결단과 동의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진리를 받아드리는 것은 개개인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심령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사도 요한이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형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변화시키시는 은혜의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엡 2:5).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니키의 가르침에는 이 부분이 아주 의심스럽다. 그는 이른바 ‘자동이동벨트’(Conveyor belt) 기독교를 전파한다. 즉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은 자동으로 기독교인이 된다. 여기서 구원이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심령의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기보다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잘 부합한 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즉 교회 생활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자들도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수가 거짓된 가르침에 빠져들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끄는 강력한 죄책감에 대한 강조가 빠져있는 곳에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일은 일종의 감정적 느낌으로 전락되어 버린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인간의 선행에 대한 강조가 이어진다. 그것이 곧 기독교인의 풍성한 삶에 대한 증거, 즉 기독교인의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니키는 금식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금식을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를 금욕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언급하였다. 육체에 심한 고통을 가하는 그들의 태도가 세 가지 잘못된 태도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는 하나님을 엄한 분으로 보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구원이 선한 일에 의해서 성취될 수 없다고 믿는 태도요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금욕주의자들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고 있는 니키는 구원이 선한 일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또한 같은 책 ‘생명을 발견하는 법’이란 장에서는 테레사 수녀의 인터뷰 기사를 적었는데 선행이 구원의 길이라고 보는 것인지 묻고 싶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년 타임지에 실린 테레사 수녀의 비밀이라는 기사처럼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그녀의 고민에 대해서 니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부재는 저의 일생에 가장 부끄러운 비밀입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 된 자들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이 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실천하며 행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선행은 구원에 있어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선행은 그들 종교에 있어서 구원의 조건으로 간주된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선행이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신학이 있다. 가톨릭교회가 그러하며 알미니안주의 사상이 그러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선행으로 자신의 삶이 의롭다는 것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누구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떠난 우리의 의란 넝마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선행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열매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알파의 하나님 사랑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절대적 완전한 성품에서 나온 사랑이다. 알파코스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지 않고 부분적인 그것도 인간이 받아드리기 쉬운 측면만 강조할 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하나님을 성경에 꿰맞춰서 믿고자 하는 비성경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키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통한 구원의 확신 문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물론 그도 코스 과정 3주 때에 ‘어떻게 나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 하에 적어도 세 가지 길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서, 둘째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서 마지막으로는 성령님이 주시는 증거를 통해서 알 수 있음을 말한다. 그의 주장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여기엔 우리의 행위가 끼일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의 증거들 외의 것을 추구한다. 그 핵심이 성령주말이다. 알파 코스의 성령론이 더더욱 개혁교회가 수용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이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니키의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영접하고 믿는 성도들이 누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 문제를 특히 지적하고자 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서너 장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한 칭의에 관한 것을 그는 단 두 쪽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그는 구원을 받지 않았을 때 죄인이 받을 형벌에 대한 것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그저 한 두 마디로 지나가고 만다. 나는 이 부분에서 니키의 신학적 기조가 의심스럽다. 특히 로마 가톨릭과 개혁파 신학의 차이점 핵심은 칭의 문제이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감리교와 일부 장로교를 포함하여 가톨릭의 칭의 교리와 화해하고 새로운 칭의 교리를 확립하기로 했다는 선언이 있었다. 사실 그 내용은 은혜 플러스 인간의 의지적 결단으로 되어지는 로마 가톨릭의 칭의에서 한 발작국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알파코스에서 이른바 ‘기독교에로의 개종자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교훈들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적 결단에 의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뿐 그리스도의 공로는 전혀 배제된 다른 무엇이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종교개혁 사상이요 성경의 핵심 사상이다. 그러나 니키의 주장은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성도들과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가톨릭교회로 연합하자는 보편적 교회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알파코스를 지지하는 자들 중에는 제이 아이 팩커와 같은 자들이 성공회와 가톨릭의 통합 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어도 가톨릭교회가 신학적 차이점이 없기 때문에 수용할 수 있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면 가톨릭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개혁파 교회에 속한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이 알파코스를 대대적으로 수용하고 따르는 일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더구나 <알파 시작하기>라는 책에 실린 6개의 간증문을 보라. 간증자들 중 4명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다. 나머지 둘도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증거가 희박하다. 그들이 알파코스를 발견하고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나 로마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다. 단지 니키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지루하고 감동이 없이 의식에 젖어 있었던 그들의 시각에 변화가 온 것이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이지 심령의 변화를 통한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교회가 참 교회인가? 아니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 중에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다.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다. 개개인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은 분명 이단사상이다. 이단들이 듣고 선호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면 개혁파 교회들이 선호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단지 교회성장이라는 피상적 수치 때문에 수용하고 있다면 개혁파 교회의 특질을 사라지게 하고 오순절은사주의로 모든 교리적 장벽을 허물고자 하는 보편적 교회관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은사주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최종 계시인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위험성을 지닌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신학이 온당한 것인가? 아니다. 칼빈주의 신학을 추종하고 있는 우리 교단은 결코 받아드릴 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근거로 하고 있는 알파코스를 아무런 여과과정이 없이 단지 교회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해도 개혁신학의 교리적 순결성을 지킬 수 있는가? 성례전에 대한 교리적 차이 때문에 루터교와 개혁파 교회가 통합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연합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알파코스는 어느 종파든지 상관없이 성찬을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들이 성찬에 참여시키는 자격을 보면 고린도전서 12장의 주의사항이 전혀 없다. 니키는 이렇게 말한다. ‘성찬에 대한 가르침의 경우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주류 교단이 동의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교단이나 전통적인 입장이 더욱 추가할 것을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그들에게 알파코스의 과정 동안에는 자제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물론 알파코스 후에 그들 자신의 교회 교인들의 과정에서는 자유이다.’
그는 성경이 뭘 말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듯 오로지 교단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알파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성례전에서도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와의 신학적 통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은사주의 활동을 통해서 그 모든 장벽을 허물고 새로운 교회의 ‘맥도날드화’ 하는 사업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종착점은 가톨릭과의 하나된 운동은 아닌지 저의가 의심스럽다.
니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 부흥의 본질은 사랑이 아니다. 부흥의 본질은 성경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며 그 하나님을 인하여 더욱 즐거워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부흥의 본질인 것이다.
참된 부흥은 그가 주장하는 토크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식은 복음 전파의 미련한 방식이다. 그것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 1:21). 그는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 공동체의 목사인 빌 하이벨스와 돈 커슨스의 말을 인용한다. ‘설교만으로는 사람들을 영향력 있는 기독교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수 없다.’ 그는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온전한 성도가 되도록 귀하게 사용한 설교사역을 과소평가하면서 ‘테이블 건너 적용되는 진리’ 즉 토크를 중요시하게 만든다. 이것은 믿음은 들음으로 말미암는 것을 부정하고 믿음은 토론으로 말미암으며 보는 것을 통해서 확정된다고 주장하는 비성경적 가르침이다.
설교는 선포이지 스토리텔링이거나 토크쇼가 아니다. 변론을 통해서 복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포를 통해서 죄인들이 회개한다. 화려하고 감동적인 분위기와 열정적인 음악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3.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알파의 성령론
알파의 10주 과정 중 제 5 주에 해당되는 기도와 6주의 하나님의 인도하심 7주의 악에 대한 대항, 8주의 전도 9주의 하나님의 치유사역 그리고 마지막 10주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성령의 사역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처럼 알파 코스의 승패는 어떤 의미에서 성령의 체험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체험을 위한 주말 수양회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은 삶을 최대한 선용할 수 있을까?’ 등의 주제들이 다루어진다. 이 주말 수양회는 ‘성령 수양회’ 혹은 ‘성령의 날’로 불린다.
그들은 다른 오순절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언을 최초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은사주의 자들의 방언과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혼동한데서 비롯된 거짓된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 그대로 고린도 교회에 있는 방언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중 하나로 방언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 방언이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최초의 은사는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있는 은사를 서열로 말할 수 없지만 굳이 순서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방언은 마지막 순서에 배열되어 있다(고전 12:4-10).
더구나 방언을 가르친다는 주말 수양회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은사는 무엇이든지 성령의 주권적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지 수요자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령 수양회를 알파 코스 10주 과정 중 6주차에 진행된다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를 자신들이 정해 놓은 과정에 매이도록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리기보다는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이빨 사건이나 방언 가르치기 등에 대한 지적을 받을 때 수정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만일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와 치유 사역의 하나로 간주한다면 그만 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취소한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인위적이거나 혹은 의도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전도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르쳐서 배우고 나누게 함으로써 믿음에 이르게 하고 기이한 현상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게 한다는 것 자체는 문병호 교수의 발제에서처럼 빈야드 교회의 총수인 존 윔버의 ‘성령의 제 3 의 물결’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빈야드 은사주의 운동과 직결되는 것이다. 니키 검불은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에 참석하여 소위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을 체험하고 돌아온 싸우스웨스트 런던 빈야드 교회의 엘레아노르 멈포드(Eleanor Mumford)사모가 개최한 집회에서 성령의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이 때가 1994년이었다. 합신의 김병훈 교수가 지적한 것에 의하면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한 알파코스는 니키 검불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 동일한 현상을 경험케 하면서 점점 은사주의로 전환되어 갔다고 한다. 윔버와의 개인적 관계를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는 알파의 성령 체험운동은 빈야드 교회의 성령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알파를 수용하여 실천하고 있는 교회 목회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불신자를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나름대로 효과적이며 유용하다고 인정한다할지라도 알파 코스가 전하는 복음 자체는 빈야드 운동으로 이어지게 될 성령의 은사주의와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면 개혁교회에서는 결코 권장될 수 없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즉 불신자 접촉을 위한 동기나 방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성령론에 관한 문제가 제일 심각한 것이다.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구원을 확신케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영적 중생을 통하여 선포된 복음 앞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아온 죄악들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깊은 자각과 믿음을 기초로 한 구원에 이르는 개혁신앙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이다. 체험적 신앙은 기독교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체험으로 복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체험을 교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방언이나 예언 및 신유의 은사들을 경험한 자들은 신앙의 정서상 신사도 개혁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그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 주말 수양회에서 방언과 치유의 사역을 강조한 이후에 마지막 날 밤인 토요일 밤에 거의 카바레 수준의 분위기와 비슷한 잔치를 열어서 어떤 노래이든지 제한을 두지 않고 부르게 하며 거의 기독교적인 색채를 갖지 않는 매우 자유분방한 분위기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도록 한다는 점이다. 성령이 임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언어의 변화와 아울러 삶의 점진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성화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거룩한 것과는 상관없는 노래들을 불러대는 것이 옳은 성령의 임재인지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 진리는 우리를 거룩케 한다(요 17:17). 노래를 불러도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라면 주님을 찬양하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그들이 모른다면 그러한 찬송을 가르쳐서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거룩한 영의 역사를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파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다.
문병호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성령과 성자는 동일하다. 성령은 사람과 같이 인격이다. 그러므로 성자도 사람과 같은 인격이다. 그 결론이 이러하다면 이제 성자에 관한 모든 기사는 성령의 현상으로 대체될 뿐이다.’ 이같은 주장은 양태론의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으며 성령의 주된 사역인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는 일을 배제하는 것이 된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진리이다(요일 5:7). 성령은 물과 피로 임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분이시다(요일 5:6). 성령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의 구속의 은혜와 대속의 죽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 찬송하게 하는 열매를 맺게 하신다. 현상적 성령의 역사는 기록된 말씀 안에서만 판단되어야 한다. 성령의 현상은 진리의 영을 받음에 대한 표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사랑하며 섬기게 한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는 사도행전의 시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이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주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대한 가르치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해야 사도행전의 성령의 현상적 역사가 무엇을 목적한 것인지 그리고 목회서신에서 강조하고 있는 성령의 충만함과 열매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 교수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는 표이어야 한다(롬 8:17).’ 이것이 개혁주의 성령론이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복종함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그 안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영적 기쁨이 넘쳐나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야말로 성도들이 전 생애를 통해서 추구해야 할 신앙여정이다.
소위 능력 기도라고 하여서 우리의 의지대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성취하신다는 말씀과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 보아도 하나님이 신자들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대화를 나눈다는 가르침이 없다. 복음은 고난 속에서 그 꽃이 활짝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대로 고난을 변경할 수 있는 능력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굴복케 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뜻을 접어야 할 만큼 지혜롭지 못하거나 무능력한 계획을 가지시고 일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능력 기도 혹은 능력 신학은 고난의 섭리를 부인하는 왜곡된 신앙이다. 고로 알파의 성령론은 성도들을 속이는 거짓된 가르침이다.
맺는 말
알파를 금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알파는 철저하게 체험위주의 신앙관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계시의존 사상이다. 단지 전도의 한 방편일 뿐인 것을 신학적인 잣대로 비평하는 것은 결코 옳은 자세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체험에 기초한 증거주의를 따르는 알파는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어버리는 것이다. 종교를 무속주의 혹은 신비주의화 할 경향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기독교는 기록된 계시 중심의 종교이다. 체험을 통한 진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김병훈 교수의 지적처럼 ‘뉴에이지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알파 코스는 사도시대의 은사들이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사도들의 복음 전파가 계속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복음 전파는 체험 위주의 진리 이해가 아니라 성경 말씀에 대한 강론을 기초로 한 논리적 설득에 의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간 것이다. 체험은 자랑할 것이 아니다. 자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뿐이다. 그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자랑할 뿐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일지라도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고전 1:24).
둘째로 알파를 금해야 할 이유는 교리적 체계를 마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뭐 중요하냐?’ ‘신학이 밥 먹여 주냐?’ ‘많이 모이면 되었지!’ 하는 생각이 있는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다.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종인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선배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을 뒤흔들어도 아무런 번민도 고통도 없는 목회자들을 보며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수없이 왜곡시키고 있는 그들의 가르침에 속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3-17).
혹 <목회성공>이라는 미끼에 속임을 당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사기꾼은 누가 보아도 거짓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사기 치는 법이 없다. 일확천금을 따고자 하는 것 때문에 투자하는 자들이 있듯이 많이 모인다는 것 때문에 뛰어들어 한몫 잡겠다는 목회자들이 그들의 사업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코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업체가 되었다. 스티븐 헌트가 지적한대로 복음을 맥도날드화한 것이다. 알파의 서적들과 교육용 비디오와 카세트, 포스터, 티셔츠, 카 스티커 및 찬양집 등으로 올리는 판매 수입금이 엄청나다. 그들의 전략지침들은 마치 다단계 업체가 운영하는 교육과정과 유사하다. 다만 그들과 차이는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들의 사람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알파코스가 교파와 신학적인 장벽들을 쉽게 넘나든다는 것은 진리가 타협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 가톨릭과 앵글로 가톨릭과의 어떤 장벽도 없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무시하는 것이요 가톨릭적인 보편적 교회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장벽 허뭄을 은사주의에서 찾고 있다. 교리의 실제적인 결과는 겉치장에 불과할 뿐 알파코스의 은사적인 내용들이 다양한 교파의 교회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공통적인 끈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앵글리칸과 로마 가톨릭의 통합 추진위원회가 오래전부터 가동되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 지금 가톨릭에서 알파코스를 자신들의 교리적 가르침과 전혀 위배되는 것이 없는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니키 검블의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조로 삼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단 교회가 전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과 배치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한 알파코스를 이단성이 없다고만 항변하겠는가?
셋째 알파를 금해야 할 이유는 성경 진리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며 무속적인 현상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알파의 주장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성령 하나님을 능력기도를 즐기는 성도들을 수종드는 피조물로 만드는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니키 검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알파를 그렇게 감격스럽게 하고 결정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성령 사역이다. 그러나 그의 성령사역은 존 윔버가 말하는 빈야드 은사주의 성령 운동이다. 성령은 단 한번도 성령 자신을 말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다른 보혜사의 일이다(요 16:13-14). 성령의 역사는 성도들을 중생케 하고 계시된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을 이끌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끊임없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고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위해서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신다. 따라서 십자가 신학이 아닌 신비주의에 혼을 빼앗기게 하는 것은 성경의 성령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말씀을 인용하며 본 글을 맺고자 한다. 하나는 구약성경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며 말씀을 받는 동안 산 밑자락에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형상을 가리켜 ‘우리를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외치며 그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출 32:4-6).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제사를 드렸으나 그들이 섬긴 신은 금송아지 형상으로 된 하나님이었다.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 앞에서 즐겁고 먹고 마시고 춤추며 뛰놀았다. 그것이 알파코스를 선호하는 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 된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 핸드의 다음의 글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알파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며 알파에서 인간의 곤경은 성경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아니며, 알파의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이 강조한 것처럼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이다(6절). 진리를 거스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다(고후 13:8). 알파 코스가 아무리 불신자 전도를 위한 선의의 목적으로 출발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핵심이 비성경적이고 탈신학적이며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성경이라는 기치를 내건 개혁교회에서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가르침인 것이다. 개혁교회는 신약성경의 사도들 이후로 어떠한 계시적 권위를 지닌 신비적 은사와 체험 위에 신앙의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의 교훈에 일치하는 믿음과 은혜의 신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은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한 대안이 있는가? 있다와 없다가 공존한다! 성경 진리를 선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오직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를 선포할 뿐이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21절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 외에 인간이 고안한 방식은 도리어 진리를 훼손할 뿐이다.
체험적 주관주의에 호소하여 복음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말씀의 진리를 강론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목회의 목적은 교회를 요트클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기잡이 배로 만드는 것이요 구원의 방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 선포와 수호로 가능한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교회가 할 일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 일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개혁교회 목사들이 가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며 본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설교자가 되라. 목사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 심지어 사도 바울까지도 자신의 부르심이 세례를 주게 하려 함이 아니요 복음을 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였다(고전 1:17). 그 일을 위해서 설교자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체계적인 학습을 통하여 성경의 가르침들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존 번연에 대하여 ‘그의 몸의 어디를 찔러도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말씀의 피였다’는 스펄전의 고백처럼 우리 몸에서 흐르는 피 역시 말씀의 피여야 한다. 목사는 말씀의 전문가여야 하지 프로그램의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로 성경의 능력을 믿으라. 말씀의 능력, 로마서 10:17, 히 4:12. 딤후 3:16-17 시 119. 믿음은 기록된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주님의 약속하심이 그대로 성취되어질 것을 믿고 전파하는 것이다. 주님의 일군과 증인으로서 부름을 받았을 때 주님은 부름에 순응하고 나아가면 얻어지는 결과가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사도행전 26:16-18절을 보라.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 역사를 읽으라
유물론 철학자인 헤겔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울 뿐이라고 말하였다. 세상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옛날의 실수를 여전히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성도는 역사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다. 그렇지가 않다면 성경에 역사서를 삽입하실 이가 만무하며 시편 기자는 시편에 종종 이스라엘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상기시키고 있고 스데반도 사도행전 7장에서 그들의 역사를 조명하며 하나님의 교훈을 설파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교리적 논쟁이나 이단 논쟁의 실질적인 내용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과 대동소이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논쟁들을 교회가 어떻게 대체하며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왔는지, 진리를 어떻게 사수해 왔는지를 살펴보며 이 시대에 교회가 갈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알파코스와 같은 내용들도 교회 역사에 보면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존재했던 것들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훼손하거나 사장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노력은 언제나 그 타켓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르쳐서 성도들로 하여금 진리로 무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은사주의를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넷째로 조직신학을 공부하라.
올바른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한 신앙고백문서들을 강론할 때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은혜의 샘물이 솟아남을 경험할 것이다. 성도의 기도와 찬양과 봉사가 다 여기에 기초해야 한다. 김병훈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개혁파 신학은 은사주의자들이 비판하듯이 이성의 논리에 갇혀 있는 합리주의의 포로가 아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말씀과 함께 성령의 신비한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심령을 흔들며 변화시키며 몇 날이라도 회개하며 구원의 기쁨에 겨워 찬양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감사의 순종을 드리는 열정적 부흥을 포괄한다.’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선하시며 가장 지혜로우시고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을 저속한 무속주의 신으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자.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때에도 오늘날 신비주의, 은사주의 체험의 역사는 없었다. 철저한 말씀 중심의 사경회를 통한 회개와 변화의 역사만 있었을 뿐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성령의 강한 임재하심이 있었다. 그 성령은 진리의 영이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라. 교리를 익혀라. 그리고 교회사를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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