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인간의 낙관적 진보를 비웃는다
악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1)
2008년 08월 25일 (월) 00:00:00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최근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사건 중에 하나가 강화도 모녀 살해사건이다. 살해범은 이웃 청년이었다. 범행 동기는 유흥비 마련이었다. 자신의 유흥을 위해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것도 사회적 약자인 여자를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모습은 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악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계시면 왜 그런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악한 일은 쉬지 않고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항변과 질문은 적절한 것일 수 있다.
21세기의 악
21세기의 지구에는 매우 경악할 만큼 엄청난 악이 저질러지고 있다. 수단의 경우 대통령이 국제범죄재판소에 기소될 만큼 다른 부족들을 잔인하게 살상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은 그런 악행에 대해 이렇다 할 제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중국은 수단 정부에 무기를 비밀리에 판매하여 살상에 일조를 하고 있다. 인류 평화의 제전이라는 베이징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중국 정부는 뒤로는 무기 판매를 통해 악에 동참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 정부의 이중성은 중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라들과 모든 인간은 이 이중성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인류는 이 악에 대한 고통에 치를 떨면서 그 근원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제거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악의 근원을 밝혀내는 일이란 쉽지 않다. 오히려 악의 근원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악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보다 악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할 것인가가 더 현명한 처신일 수 있다.
악이 인류에게 끼치는 해악은 끔찍하다. 자연재해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비참함은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절규로 바뀐다. 최근에 있었던 쓰나미나 미얀마의 재해, 중국의 쓰촨성의 지진은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을 그대로 방치하는가에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자연재해에 대한 악은 불가항력적이라는 측면에서 그냥 바라볼 수 있지만, 인간이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저지르는 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았던 시대, 그리고 인디언들을 축출하고 땅을 차지한 미국의 개척시대나 킬링필드의 역사는 인간의 잔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유태인 학살은 악의 전형이다. 관동대지진 역시 자연재해와 함께 인간의 악이 자행된 역사다. 인간이 선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선함과 동시에 그 본성의 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증거를 댈 수 있다. 20세기 한반도에 일어난 민족 간의 전쟁은 이데올로기의 열매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가 살상의 이유가 되는 것이 인간이다. 사회주의라는 악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만이 악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악도 마찬가지다. 북한군의 부역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을 살상한 것은 정당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선한 것은 결코 아니다. 즉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악은 사회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항상 존재한다.
인간의 본성
오스 기니스는 인간의 악에 대한 관점이 바뀐 것은 두 가지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는 <고통 앞에 서다>(생명의말씀사)에서 악에 대한 인류의 관점을 이렇게 분석한다.
“1755년의 리스본 지진은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약화시키는 한편, 계몽주의 시대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이 더욱 고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즉 신은 죽었고 인류의 미래는 인간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신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2001년의 9.11 사태는 인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계몽주의 신념의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렸으며, 하나님에 대한 문제와 인간에 대한 문제를 서로 통합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리스본은 18세기 중엽의 포르투갈 제국의 수도로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은 지진이 몰고 온 세 가지 재난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지진과 15미터의 해일, 그리고 지진여파로 발생한 화재로 인해 6만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1755년 리스본 사태 이후 유럽 철학은 새로운 전환점을 시도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흉악 범죄와 테러)의 구별이다. 또한 볼테르, 루소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나 칸트, 헤겔의 사상 체계는 악에 대한 반응이었음을 발견한다. 마르크스나 니체 등 20세기 사상가들(특별히 유대인 사상가들은 유대인의 대학살의 의미에 대해 분석하려 시도했다)은 우리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서의 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 했던 철학적 시도들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낭만적 기대 파괴
서구 전체와 미국 등은 계몽주의 사상 가운데 나온 진보주의 사고방식의 특징을 갖는다. 헤겔은 이것을 변증법적 과정을 통한 진보라고 주장했다. 인류의 진보는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서구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인류의 진보는 19세기 제국주의적 경제 팽창에 정당한 믿음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맬세스 철학이 그랬다.
이런 가운데 찰스 다윈의 연구의 대중화는 기술발전, 의학발달, 낭만주의적 범신론, 진보에 대한 헤겔식 이상주의 기대,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결합은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사상을 체계로 한 교육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이 1차 세계대전이다.
9.11사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생긴 사건이다. 전 세계 텔레비전에 고스란히 중계된,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엄청난 사람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은 인간의 잔인함이 얼마나 악한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에 한 쪽에서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는 사실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악의 원인을 더 이상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악의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암브로스 비어스는 남북전쟁이 있은 후에 <악마의 사전>에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비인간성이다”고 말했다.
인간의 비인간성, 혹은 악의적인 본성이 악을 발생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성향 때문에 노아 때 물로 심판하신 뒤에 계속적인 악의 번성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더 이상 종말의 최종적인 심판이 있기 전에는 전 인류를 심판하는 대대적인 심판을 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가항력적인 악
자연적인 재해나 재앙, 쓰촨성의 지진이나 쓰나미 해일은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것은 아무런 저항력이 없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변한다.
이런 재앙을 두고 어떤 이들은 “우상의 죄가 가득한 이유다”라고 그 원인을 분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전형을 염두에 둔 분석이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재앙을 이분법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스런 접근이다.
악의 문제는 철저하고 근본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악의 현실을 둘러싼 우리의 해석에 관한 의문은 인간 발전을 믿는 진보주의 사상과 유토피아적인 견해에 정면 배치된다. 인간의 진보와 역사의 발전은 사실상 문명적인 발전만 가져왔을 뿐 인간의 도덕성이나 인격, 그리고 사고의 정결이나 고귀한 진보는 없었다. 옛적의 인간의 죄성과 지금의 죄성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다.
즉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어쩌면 인류가 판단한 가장 그릇되고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의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항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철저한 비관주의를 배경으로 두고 있으면, 삶은 비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세뇌된 이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미래에는 분명한 낙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병도 정복되고, 완벽한 사회 보장제도가 낳은 행복한 미래가 있을 것으로 예견한다.
심지어 인류는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류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예단한다. 또한 우주기술의 발달로, 지구 외에 지구 환경과 같은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꾼다. 정말 그럴 듯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런 사상과 배경에는 무신론과 진화론이 있다. 인류는 철저하게 창조주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제시하는 길을 절대로 가지 않으려고 한다.
톰 라이트는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IVP)에서 인류가 악이 번성할 때, 하나님은 극에 달한 악이 더 이상 번성하지 않도록 어느 시점에서 일부 악을 제거하신다고 진단한다. 그의 진단은 매우 정확하다. 인간의 악행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이상 브레이크가 고장난 열차가 될 수 있다. 가속도가 붙은 기차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지구상의 악은 날마다 마른 장작불처럼 인류 가운데 자행되고, 그 범위와 강도가 세진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다면 노아 홍수 이후에 인류는 얼마 가지 않아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악이 번성함을 보고 시기와 때를 따라 간섭하시고 악이 번성하지 않고 주춤하도록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악이 아닌 선한 이들에 대한 악의 발생은 그리스도인들을 당황시킨다. 분명히 우리 처지에서 보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장애를 갖게 되거나 이유 없는 난치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부재나 섭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철학자이든 신학자이든 악의 근원을 밝힌 이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악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악을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고 볼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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