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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시사.

이런 분들이 나라를 운영했다. 경부고속도로에 누워버린 DJ(펌)

by 설렘심목 2010. 8. 1.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에 들어누어 데모하는 김대중.

 

DJ
"경부고속도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차 있는 사람들만 팔도 유람하고 다닐 것 아닌가?
쓸데없는 돈 낭비다." 

아래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면을 쓰고 고속도로 공사현장에 드러누워 고속도로건설을 방해하는 모습.
고속도로 건설반대 데모 선동으로 유명세를 탄 김대중은 불과 3년 만에 1971년 대선 후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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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하겠다고 해도 16차선(왕복 8차선)은 절대 안 된다.
뭣 하러 그렇게 넓게 짓는가? 우리나라 1년 예산보다 많은 건설비를 조달할 수도 없다."

박정희
"절대로 16차선을 해야 하지만... 김대중이, 김영삼이가 너무 반대하니 할 수 없다.
경부고속도로를 완성하면 우리나라는 중진국이 될 수 있다. 8차선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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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경부고속도로 예정지를 순찰하고 있다. [도로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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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이 직접 스케치한 고속도로 구상도. 

 

왕복 4차선
"내가 야당 반대 때문에 양보하지만, 미래에는 반드시 도로가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왕복 4차선으로 하더라도 반드시 경부 고속도로 양옆으로 50m는 남겨 두라.
건물 신축을 금지하라. 미래엔 더 확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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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집념은 조국근대화와 맞물려 직접 챙기고 공사를 독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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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도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  <천안 - 신사리>구간중 천안 삼거리 부근에서. (1968.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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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중 휴식시간에 건설 현장 인부들의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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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현장의 박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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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의 박정희-육영수-정주영

 
경부고속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했다. 전후 잿더미 위에서 경제부흥에 성공한
라인강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서독에 차관을 요청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서독 방문 중 박 대통령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기반시설이 하나 있었다.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아우토반(Autobahn)이 바로 그것이었다. 1932년 쾰른과 본을 잇는
도로가 처음 개통된 이래 아돌프 히틀러 치하를 거치면서 아우토반은 독일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국가 대동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우토반을 본 이후 고속도로 건설은 박 대통령의 꿈이 됐다.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인프라 스트락처(Infra-structure), 그중에서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가 대동맥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굳게 믿었다.

1967년 재선에 도전한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 공약으로 내놨다.
공약에 환호성을 올린 사람은 아마도 한국에서 정주영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유사 이래 최대 규모가 될 역사(役事)는 박정희, 정주영의 합작품이 된다.

언론과 학계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공사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과연 조달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설사 재원을 확보한다 해도 그로 인해 빚어질 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 마침 세계은행은
한국의 교통량이 경부고속도로를 뚫어야 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언론과 학계는 이 보고서를 금과옥조처럼 활용했다. 세계은행과 같은 권위 있는 기관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자 여론도 부정적으로 돌았다. 당장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쓰는 길도
끊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박정희, 정주영이 아니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단둘이 만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 사장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드는 최저 소요 경비를 좀 산출해 봐주시오."

박 대통령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조차 파악이 안 돼 답답하던 중이었다.
대통령의 말을 들은 정주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2년 전 태국에서 익힌 공사 경험을
한국에서 써먹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정주영은 즉시 5만분의 1 지도를 들고 한 달 가까이
서울과 부산 사이의 강과 산, 들판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주판을 두드려보니 380억 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건설부는 650억 원, 서울시는 180억 원으로 추산했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제시한 금액에 가까운 400억 원에 예비비 30억 원을 추가해
총 430억 원으로 공사비를 책정했다. 이 돈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3년 안에 완공하라는 게 현대건설을 비롯한 17개 건설회사에 맡긴 지상과제였다.

마침내 1968년 2월 1일, 흥분과 감동 속에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현대건설은 서울~오산, 대전~옥천 등 전 구간의 5분의 2가량을 맡았다. 공사비 책정이
워낙 빠듯했던 만큼 애초부터 큰돈을 벌기는 어려운 공사였다. 그렇다고 기업인이
이익을 포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기업가는 이익을 남겨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지 국가를 위해 또는 사회를 위해
거저 돈을 퍼 넣는 자선사업가는 아니다. 기업가들이 사회에 주는 기업의 열매는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면 된다. 어떤 경우에도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이 기업가에는
번번이 절체절명의 명제였다."

이익에 집착해 탈법 또는 부실공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공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 이자와 노임을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 정주영, 아니 모든 건설회사
경영자들에게 공기단축은 곧 돈이었다. 그렇다고
정주영이 무작정 공기 단축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로써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랄 수 있는 800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
낙동강 고령교 공사(1953년 착공) 때 20t짜리 크레인 한 대만으로 무리하게 덤벼들었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은 뒤 장비 확보는 정주영에게 최우선 과제였다.
그는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중장비 1천900여 대를 들여왔다.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중장비가
모두 1천400대 정도였으니 장비에 대한 정주영의 집착을 읽을 수 있다.

'호랑이' 정주영은 현장에 간이침대를 갖다 놓고 작업을 독려했다.
공기 단축이 부실 공사로 이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겼다. 잠잘 시간에는 일하고,
대신 덜컹거리는 44년형 지프를 타고 가면서 잠깐씩 눈을 붙였다.

차에서 자는 습관은 나중에 울산 조선소 건설 때까지 이어져 결국 목 디스크의 원인이 됐다.
심지어 어떤 때는 지프에서 잠을 자면서 지프는 공사장을 빙빙 돌도록 했다.
직원들은 '호랑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노동력을 착취한 가혹한 자본가라는 비판을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약 40년 전 정주영은 현장 노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또 한 명의 노동자였을 뿐이다.
그는 노동자가 일할 때 자기만 편하게 쉬는 전형적인 자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나 자신은 나를 자본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기반시설을 확보한 박 대통령 시대의 자본주의 산업화는,
우리 사회를 오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단숨에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1960년 64%이던 농어민은 80년에 31%로 감소했으며,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에는
2차 산업이 1차 산업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추었다.
그 근간에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국내로 송금한 달러가 기반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료출처 / 월남전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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