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라사랑.시사.

故노무현 전대통령 자살전날 비화

by 설렘심목 2010. 6. 28.

 

 

2009년 5월 28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에서 헌화하는 권양숙 여사.

ㅁ 임종규 뉴스메이커 선임기자 / 최영수 뉴스메이커 서울주재 기자

           

 노무현 前 대통령, 자살 전날 권 여사와 큰 부부싸움 벌였다”

정부고위관계자 본지에 밝혀…

“노무현은 줄담배 피며 잠못자고 권양숙은 만취상태서 잠들었다”..

[노무현x-파일] 권양숙, 비서관이 깨워도 못 일어나…

노무현 시신 안치된 병원에 뒤늦게 도착,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한 배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노무현이 자살하던 2009년 5월 23일, 부인 권양숙 여사(이하 권양숙)가 왜 노무현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뒤늦게 나타났을까 라는 점에 대해 궁금증과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상식적인 계산으로 볼 때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한 것이다.이에 본지는 그 동안 노무현 측근들을 상대로 취재를 하면서 노무현이 자살한 시간을 전후한 권양숙의 행적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해 측근들 대부분은 입을 굳게 닫아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웬일인지 한국 언론에서도 노무현의 자살과 죽음에 대해서만 부각시켰지 권양숙의 이날 행적에 대해선 별다른 보도를 하지 않았다.남편이 유고(有故)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권양숙은 뒤늦게 병원에 나타났을까.

이를 두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소문만 갖고 기사를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당시 노무현은 오전 6시 40분경 사저(私邸)가 위치한 봉하마을의 뒷산으로 경호원 한 명과 함께 산책을 나섰으며 오전 6시 50분경 속칭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투신한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한 경호원은 즉시 인근 김해 세영병원으로 노무현을 긴급후송 했다. 이때가 7시 5분경이었다. 의식을 잃은 노무현은 이 병원에서 5분가량 머물렀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세영병원 측은 자신들 보다 시설이 좋은 부산대병원으로 노무현을 후송했다.하지만 심한 전신골절을 당한 노무현은 세영병원으로 옮겨질 때부터 소생 가능성이 없었다.권양숙이 부산대병원에 나타난 것은 노무현이 사망한 지 한참 뒤인 오전 10시 30분께.

 

일부 언론이나 노무현 측은 이 부분에 대해 권양숙이 오전 9시 25분경 병원에 왔다고 애써 도착시간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본지 확인결과 그녀는 오전 10시 30분경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도착했으며 노무현의 시신을 확인한 후 혼절했다.여기서 갖는 의문점은 정상적인 상태의 부인이라면 남편의 투신사실을 보고 받자마자 오전 7시께부터  ‘버선발 차림으로라도’ 승용차나 구급차에 동승했어야 마땅하다.만약 이때 동행을 못했다면 비서관이나 경호원과 함께 세영병원을 거치지 말고 막 바로 부산대병원행을 택해 최소 오전 8시 30분 이전에는 병원에 도착했어야 마땅하다.그러나 권양숙은 10시 30분이 돼서야 초췌한 얼굴로 병원에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노무현이 죽은 후 최소 3시간이 지나서야 자살한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왜 그랬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엉뚱한데서 풀렸다.한국을 방문하고 돌아 온 A 씨(전직 뉴욕한인단체장)가 지난 1월 본지에 전화를 걸어 와 한국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던 중 “한국정부 고위층(차관급 이상) B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던 날의 권양숙 여사 행적과 관련 해 상당부분 알고 있으니 취재를 해 보라”는 제보를 해 왔다.하지만 본지의 B 씨를 상대로 한 취재는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전화시도와 측근을 통한 접촉 끝에 어렵게 B 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다음은 B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왜 권양숙 여사가 시신이 안치된 부산대 병원에 뒤늦게 나타났나.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먼저 익명을 보장해 줄 수 있나.

--물론이다.

▲ 이것은 기자 대 취재원의 부탁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부탁이다.

--알았다. 약속을 지키겠다. 먼저 당시 상황을 누구한테 들었나.

▲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말 할 수 없지만 노 대통령 자살 당시 사저에 근무하던 사람에게 들었다.

--비서관인가. 경호원인가.

▲ 그것은 말 할 수 없다.

--직접 만나 들었나.

▲ 그렇다. 내 측근 C 씨와 함께 들었다.

--당시 노무현 사저에 근무하던 사람은 사건 당시 노무현부부의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 얘기하던가.

▲ 노 대통령이 자살하기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부부싸움이 있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갈 정도였다고 한다. 화가 난 노 대통령이 집기까지 집어 던질 정도였단다.

--당시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말해 줄 수 있나.

▲ 내용은 당사자들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노 대통령이 뇌물수수혐의로 ‘치욕적인’ 검찰수사를 받고, 앞으로 수사망이 권 여사에게로 조여 오는 데에 대한 불만과 서로에 대한 원망이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갈 정도였으면 두 사람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했다는 얘기인데.

▲ 그렇다. 권 여사는 만취상태였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소리가 크게 났으면 사저 근무자들이 알았을텐데.

▲ 부부싸움이 워낙 격해 비서관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부부싸움은 언제 끝났나.

▲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지만 새벽녘이 돼서야 끝났다고 한다.

--부부싸움 이후의 상황은.

▲ 노 대통령은 줄담배를 피우며 잠 한숨 못 잤고, 권 여사는 만취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부부싸움 직후 유서를 썼다는 얘기인데.

▲ 시간 정황상 그렇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유서를 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 대통령이 투신한 사실을 권 여사에게 언제 알렸나.

▲ 투신사실을 경호원을 통해 전해들은 비서관이 즉시 권 여사에게 알리려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전 7시 전후라는 얘기인데 권 여사의 반응은.

▲ 권 여사가 만취된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비서관이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비서관이 깨운 지 얼마 만에 권 여사가 일어났나.

▲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으나 대략 한 시간이상이 지난 후 간신히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권 여사의 반응은.

▲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고 한다.

--이후의 상황은.

▲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이다. 이게 권 여사가 부산대병원에  뒤늦게 나타난 이유이다.

--결국 그날 밤의 큰 부부싸움이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 이끌고 간 이유 중 하나가 는 셈인가.

▲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평생 동고동락한 부인으로부터 모진 소리를 듣고 노 대통령의 심정이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은 위험부담을 안고 왜 이번 취재에 응했나.

▲ 노 대통령 자살사건이후 별의별 루머가 다 떠돌았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한 음모론까지 나왔다

부부싸움 얘기도 루머에 속해 있었다. 노무현은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역사에 바르게 기록돼야 한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내게 말을 전해 준 사람이나 나나 확실한 신분의 사람이다. 

내가 이명박 정부 내 고위층의 한명인데 허튼 소리를 하겠나. 나 역시 개인적으로도 노 대통령 자살 당일의 상황이 궁금했었다.

--당신의 얘기를 같이 들은 C 씨에게 확인해 볼 수 있겠나.

▲ 그렇게 하라.

 

이후 본지는 C 씨를 서울에서 만나 B 씨의 얘기를 전해주었다.C 씨는 “모두 사실”이라며 “오히려 B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얘기 안 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C 씨는 “두 사람의 정확한 부부싸움 내용은 알 필요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사실 노무현 부부의 싸움은 자살 사건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문 비서관이 봉하마을을 방문하여 권양숙과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노무현은 부인의 금품수수사실을 알게 된 후 대노했으며 이후 잦은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부패한 가족과 측근이 “청렴결백만큼은 자신 있다”고 강조한 노무현을 자살로 이끌었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대한민국에 있어 매우 불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까지 떨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선 원인을 밝혀내고 재발방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만 한다.

 

먼저 노무현의 죽음은 본인의 잘 못이 제일 크다.한편으로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가족관리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 준 점도 있다

본인이 아무리 청렴결백해도 부인이나 자녀들이 자신 모르게 ‘나쁜 일’을 벌이면 알 길이 없다.

대통령 부인의 문제점을 대통령 면전에 대 놓고 보고할 만 한 인물이 대한민국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이순자 여사와 처가의 문제점을 지적한 측근들이 줄줄이 청와대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대통령들은 자식관리에 실패했다.

4.19혁명 직후 자신의 친부모인 이기붕 부통령 부부를 죽이고 자살한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을 필두로 하여,

마약에 손 대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

육영재단을 두고 아직도 분쟁에 휘말려 있는 박근혜와 박근영은 모든 이의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하다.

이후 전두환 비자금 조성에 일조한 전재국,

그리고 ‘소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큰 권력을 행세한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 또한 김대중의 아들들은 어떠한가.

김홍일, 홍업, 홍걸 삼형제는 비자금 조성에 큰 몫을 했으며 그 돈으로 지금도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의 경우는 아들 건호가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2천만 달러가 넘는 골프장을 매입하러 다녀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으며, 딸 정연은 불투명한 방법으로 뉴저지의 고급주택을 사들여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노무현은 결국 본인만 깨끗했지, 측근들이나 가족은 부정과 비리의 중심에 서 있었다.

노무현은 이점을 못 마땅해 하고 분개해 했을 것이다.

비록 인기 없고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청렴결백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지...

결국 그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뇌물수뢰혐의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김해 봉하마을에서

서울 검찰청으로 출발하기 전 취재기자들을 향해 머리숙여 사과하고 있다.

  

노무현은 측근과 가족이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본지가 이런 기사를 게재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바로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지면 이명박 음모론, 노무현 타살설 등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본지의 심층 취재결과 그 같은 루머는 그냥 헛소문에 불과하다.

자존심 강한 노무현은 가족과 측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물론 그들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던 권양숙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기도 했을 것이다.

오는 5월 23일은 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위 : 노무현 가족들과 측근들의 비리에 성난 국민들이 노무현에 대한 구속수사를 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아래 : 비리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권 여사와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 노 대통령 아들 건호 씨.

- 가족과 측근들의 비리는 결국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날을 기해 노무현 지지자들이 어떤 발언을 한다 한들 그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한명숙 전 국민총리가 영결식장에서 “당신을 지키지 못 해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노무현 측근들은 “우리의 잘못으로 당신을 죽게 만들어 죄송하다”고 말해야 한다.

 ㅁ 임종규 뉴스메이커 선임기자 / 최영수 뉴스메이커 서울주재 기자 2010년 03월22일 11:26분 53초

================================================================

<글 올린 이의 所見>

 

최선을 다했으나 늘 한계를 느꼈고 그 때마다 정직 청렴결백 하나로 버텨왔던 故노무현 전대통령은 결국

이 정도쯤이야 했던 어리석은 자신의 비리와 한편,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작고 큰 비리를 저지른 측근과 가족으로 인해 심한 좌절을 느끼고 울분은 쌓여갔다.

 

아내의 검찰출두가 코앞에 닥쳐왔고 국민들은 자신의 비리를 엄정히 수사해서 구속하라고 날마다 시위를 해서 점점 조여오는 수치의 날이 다가올수록 하루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

더욱이 노사모의 순수한 애정은 더욱 그를 아프게 조여들어왔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의 순수한 많은 사랑하는 젊은 무리들앞에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청렴결백이 먹칠을 하면서 수치의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삶의 의미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심한 정신적 탈수상태에서 자신이 과연 대통령재목이었던가에 대한 극도의 열등감과 아울러,

자존감에 대한 회의에 깊이 빠져들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추앙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한낱 환상이었노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버려주세요.."라고 절규했지만 험한 상황은 코앞에 닥쳐왔고 때는 이미 늦었다.

어떻게 추스를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구속되면 무조건 자신을 두둔할 노사모가 나라에 끼칠 해악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가난했던 지난 날,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자살 외엔 다른 어떤 방법도, 길도 없는 사면초가에 갇혔다고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가난해도 떳떳했던 그의 정체성이 법원의 판결봉 소리와 함께 무참하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죽음으로의 calling 이요, 전 세계에 퍼질 國恥의 signal 이었다.

청렴하나로 달려와 "맞습니다. 맞고요.." 대통령이 된 사면초가의 가난한 법학도청년, 변호사..그는...

죽음으로서 노사모에게 사죄의 뜻을 그리고 아내에게 가족과 측근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답답함을 호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강직하고 한없이 여린 심성의 소유자,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 서민 대통령...

그는 아내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주변단속과 자식단속을 해야 할 아내에게 거액을 자신모르게 받은 과정과 이유를 추궁하고 나무라는 가운데 그들은 여늬부부처럼 다투게 되었고 그 좌절은 잘 참고 있던 노무현 故전 대통령에게 해선 안 될 결단을 하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1. 자살로 책임을 진다고 잘못 생각한 당사자를 우리는 나무라기 전에 그의 고통을 헤아려야 한다.

 

2. 나라의 역대 대통령마다 측근과 가족친지의 비리로 후유증을 피하지 못하는 이 나라 국정쇄신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바른 소견을 지닌 국민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죽은 자를 불쌍히 여기되 그 범죄는 단호하게 말함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 2010.06.28.07:48.글 올린이 B.solleim. 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