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어머니 ♡
어머니의 사랑
한 어머니가 처음으로 유치원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다. 유치원 선생은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아드님은 산만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단, 3분도 의자에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병원에 데려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말했다.
"선생님이 너를 무척 칭찬하셨단다. 의자에 앉아 있기를 1분도 못 견디던 네가
이제는 3분이나 앉아 있다고 칭찬하시던걸. 다른 엄마들도 모두 엄마를 부러워하더구나."
그날 아들은 평소와 달리 먹여 달라는 투정도 않고 밥을 두 공기나 뚝딱 비웠다.
시간이 흘러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학부모회에 참석했을 때, 선생이 말했다.
"이번 시험에서 아드님 성적이 몹시 안 좋아요.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아 보세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너를 믿고 계시더구나. 너는 결코 머리 나쁜 학생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번에 21등을 한 네 짝도 제칠 수 있을 거라고 하시더구나."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 어두웠던 아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날 뒤로 아들은 놀라우리만큼 달라졌다.
훨씬 착하고 의젓해진 듯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갈때도 아들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담임선생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드님 성적으로는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건 좀 어렵겠습니다."
어머니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너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더구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어."
아들은 끝내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명문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아들은 대학 입학 허가 도장이 찍힌 우편물을 어머니의 손에 쥐어 주고는 엉엉 울었다.
"어머니...제가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세상에서 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신 분은 어머니뿐이세요."
-[아들은 아버지에게 맨 처음 낚시를 배운다]에서 발췌-
어머니의 한 마디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6.25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 째 되는 날,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 젊은 청년이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라고 하였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쌀자루는 어디 갔니?"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는 한참 있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라고 하시며 우셨다.
그 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또 우셨다.
그런 위기 상황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 되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학교 박동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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