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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추억

회상 - 누이들의 한가위 귀성참사

by 설렘심목 2010. 2. 13.


1974년 9월28일 밤 용산역에서 일어난 "귀성객 압사사건"을 잊을 수 없다.

나는 현장에서 사건의 시작과 끝을 지켜봤다. 세월이 흘러 기억들이 많이 지워졌지만 한가위가 돌아오면 생각이 난다. 그렇다고 악몽과 같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분노와 무서움으로 온 몸을 떨었지만 이제는 시리고 아플 뿐이다. 그 자리에서 숨진 여인들, 우리 시대의 가장 가엾은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그 영혼은 한가위 달빛을 타고 고향집 부근을 서성거릴 것이다. 추석을 이틀 앞둔 용산역 광장, 열차를 기다리는 행렬은 길고 길었다. 나도 그 줄에 서 있었다. 개찰이 시작되자 귀성객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갔다. 남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러 구름다리 위로 올라가 밀고 밀렸다. 순식간에 사람과 사람이 뒤엉켜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비명이 비명을 삼켰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사람들이 쓰러졌다. 사람을 사람이 밟았다. 고향열차를 타러가는 구름다리가 저승으로 가는 죽음의 다리가 되다니…. 그렇다고 고향에 빨리 가는 것도 아닌데 오죽 가고 싶었으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죽은 사람을 그 때 처음 보았다.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시체와 부상자들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현장에는 선물 보따리와 가방, 신발들만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당시 신문은 4명 사망에 38명이 다쳤으며 `사상자는 거의 여공(女工)이나 가정부(家政婦)"라고 보도했다.

여공과 가정부, 지금은 사라진 호칭이다. 하지만 한 시대를 적신 물기어린 직업이었다. 시골서 올라온 우리네 누이들이 가장 쉽게, 가장 많이 들어간 곳이 공장의 단순노무직이요, 부잣집 식모였다. 그들은 거의 기계였다. 단순 작업을 쉴새 없이 반복했다. 그들의 젊음은 서울이라는 낯선 도회지에서 이렇게 야위어갔다.

그래, 그때는 객지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너나 없이 고향하늘을 보며 눈물 지었다. 시골의 젊은이들은 `서울하늘이 보고 싶어" 무작정 상경했다. 그만그만한 직장을 얻어 그만그만한 보수를 받았다. 휴일이면 고향친구끼리 서울 구경에 나섰다. 그들은 뿌리가 없이 떠다녔다. 흡사 요즘의 외국인노동자와 다를 바 없었다. 서울생활이 낯설고 고달플수록 고향이 그리웠다. 그들 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고향만이 있었다. 밤이면 머리를 고향쪽으로 돌리고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던 누이들,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어떤 기술이라도 배웠던 지극히 가난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추석은 명절 이상의 것이었다. 고향엔 언제나 자신을 품어줄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이면서도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고향가는 길은 아무리 힘들어도 벅차고 설?다. 추석은 풍요로운 축제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확인이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달려갔고 서로 쓰다듬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객지 설움은 쏟아내고, 고향의 정은 들이마셨다. 고향에서는 구로공단, 청계천, 영등포가 서울에서도 가장 붐비고 번듯한 곳인 줄 알았다.

고향을 찾는 일이 가장 행복했던 그 누이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역동적인 아줌마부대였다. 정 많고 힘 세고 일 잘하는 시대의 일꾼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야학이나 산업체 학교를 다니면서 기어코 공부를 했던 우리들의 누님과 여동생들.

어머니 젖처럼 고향도 이제 마르고 쪼글쪼글해졌다. 그래도 우리는 고향에 간다. 우리네 누이들은 지금도 어머니 빈 젖을 빨며 울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 누이들은 누구 품에서 울 것인가. 40, 50대로 시대의 비탈에 서 있는 여인들에게 아, 보름달이 떠오른다.

-김택근 산문집 `뿔난 그리움"에서-

출처 : Tong - 생명전달님의 50-70, 흘러간 세월..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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