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갈때면 버스전쟁의 공포속에 다닌 학창생활 6년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시절....
사투? 맞다 사투라는 말이 맞다.
새가방사면 가방끈이 하루도 못간다는...
몸따루 가방따루..
그렇게 힘들게 핵교가서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밤낮으로
쏘다니기만 했다는....
힘들었던 그 옛날의 추억들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선 시간은 오전 6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걸음이 바쁘다.
아니나 다를까. 정류장을 가득 메운 인파. 버스가 올 때마다 100m 달리기 경주가 시작된다. 차 안은 이미 발 디딜 틈 조차 없다. 낯선 사람들과의 어색한 부대낌도 이력이 났다.
짐짝처럼 실려 가길 50여 분. 파김치가 돼 사무실에 들어서면 책상 위에 서류가 가득하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오전이 후딱 가고 나면 점심시간. 각자 싸 들고 온 도시락을 꺼낸다. 사무실엔 김치 냄새가 나직이 번진다.
오후엔 거래처 방문. 온갖 구실로 골탕을 먹이는 거래처 박 계장 얼굴에 언젠가는 계약서를 던져버리고 돌아서리라 골백번도 다짐한다. 축 처져 돌아온 사무실에선 과장님이 기다린다.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발길이 닿는 곳은 회사 앞 대폿집. 못된 김 부장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인다. 2차, 3차로 이어지다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택시를 못 잡으면 꼼짝없이 여관 신세다.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통금이 지나자 포기하고 잠을 청한다."
20만 명, 하루 평균 지각하는 회사원 숫자... 상사 질책 겁나 회식때 빠지는 것은 상상도 못해
197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 일과이다. 매달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이 중산층을 형성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와서다. 그 전만 해도 농민이나 자영업자가 많았다. 경제개발이 본격화하면서 도시에 일자리가 빠르게 늘어나자 샐러리맨이 중산층의 주류로 떠올랐다.
샐러리맨의 일상은 고달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 서민은 서울 외각에서 통근해야 했다. 지금처럼 도로나 교통수단이 잘 갖춰지지 않아 매일 출퇴근 전쟁을 벌였다. 특히 신흥개발지 였던 경기도 시흥ㆍ안양과 서울 화곡ㆍ영동ㆍ잠실ㆍ천호동은 물론 상계ㆍ면목ㆍ미아ㆍ불광ㆍ영등포는 고질적인 교통난 지역이었다.
1976년 버스를 이용해 서울 도심으로 통근한 사람은 194만 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5,000여대 버스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사람은 135만 명이 고작이었다. 40만 명은 '콩나물' 버스를 감수해야 했고 20만 명은 지각을 밥 먹듯 했다.
1971년 봉급 생활자의 월급은 평균 2만 2,441원이었다. 소비자물가지수를 감안해 현재 돈 가치로 환산하면 33만 1,500원 남짓. 80kg짜리 쌀 세 가자 정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용돈이 궁한 건 당연했다. 학생 뿐 아니라 대다수 샐러리맨도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닌 것은 이 때문이다.
2만 2,441원, 71년 봉급쟁이 평균 월급 액수
취직이 어려웠던 탓에 상사의 호된 질책이나 폭주하는 업무에도 불평하기 어려웠다. 부서 회식에 빠진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통근에 지치고, 상사에게 들볶인 샐러리맨의 안식처는 퇴근 후 대폿집이었다. 막걸리나 소주가 가장 대중적인 술 이었다. 군대식 폭탄주 문화가 퍼지기 시작한 건 1980년대다. 전두환 정부의 '3S(Screen, Sex, Sports)' 정책과 기업의 접대문화, 부동산과 주식시장 호황이 어우러져 새로운 밤 문화를 낳았다. 1982년 1월 5일부터 해제된 야간 통행금지도 유흥업소의 범람을 부채질했다.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 는 샐러리맨의 의식을 바꿔놓았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로 일어난 6ㆍ10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샐러리맨은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진보적인 시민단체가 다양한 분야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도 샐러리맨의 지원이 한 몫했다.
이를 통해 샐러리맨은 중산층의 중추로 자리를 굳혔다. 1990년 봉급생활자의 평균 월급이 현재 돈 가치로 처음 100만 원을 넘었다. 쌀 5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생활에 여유도 생겼다.
1989년엔 해외여행이 자유화됐고, 1992년 서울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 대를 돌파했다. 지하철이 속속 개통하면서 출퇴근 시간대의 교통지옥도 개선됐다. 2007년 월급 평균은 212만 7,400원으로 쌀 14가마에 해당하는 금액이 됐다.
근무시간에도 변화가 왔다. 2004년 7월 공기업ㆍ금융업ㆍ보험업 및 1,000명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주5일 근무제가 전면 도입됐다. 주5일 근무제는 프랑스가 1936년, 독일은 1967년, 일본은 1987년부터 도입한 제도였다. 캐나다ㆍ오스트레일리아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ㆍ벨기에ㆍ중국도 주당 근무시간이 40시간이 넘지 않는 걸 감안하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주말 연휴가 생기면서 샐러리맨의 생활리듬도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금요일 저녁 술자리가 확 준 대신 주말 가족여행객은 급증했다. 직장 동료와 주로 어울리던 밤문화도 동호회나 가족 모임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50년대 전차운전사·전화교환원·공장노동자 인기...
60년대 신발·섬유 기능공… 은행원 최고 신랑감...시대에 따라 달라진 선망의 직업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 시절에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가 최고 인기직업이었다. 자원과 물자가 부족하다 보니 고물상이나 광산개발업자도 수입이 괜찮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교사는 매달 현금으로 월급을 받는데다 스승을 존경하는 유교적 전통 때문에 각광 받는 직업이었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시기다. 전차ㆍ전화ㆍ라디오 등 새로운 서구 문화가 물밀 듯 들어왔다. 자연히 전차 운전사ㆍ전화 교환원ㆍ라디오 조립원ㆍ공장 노동자(고무ㆍ가발ㆍ섬유)가 떠오르는 직종이었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군인ㆍ경찰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는 직업도 다양하게 분화했다. 엔지니어나 섬유ㆍ합판ㆍ신발 분야의 기능공이 인기 직종이었다. 섬유ㆍ가발 공장의 여공은 서민 여성의 대표적인 직업이었다.
대기업엔 일자리가 귀했던 시절이라 사무직을 선호하는 엘리트는 은행으로 몰렸다. 은행원은 손꼽히는 최고 신랑감이었다. 여성 공무원이 드물던 시절 우체국ㆍ경찰서의 전화 교환수는 신부감 0순위였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이 중심 산업으로 부상했다. 그 덕분에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종합상사맨은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고 월급도 많아 인기가 많았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 스튜어디스는 젊은 여성이 꿈꾸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민항기 조정석 둘째 줄에 앉던 비행기 항법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공군 출신자만 넘볼 수 있는 자리였다. 자동 항법장치가 도입되면서 지금은 직종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
삶에 여유가 생긴 1980년대는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 댄서인 인순이의 '리듬터치'가 첫선을 보인 것도 이 무렵이다. 생활 수준이 나아지면서 연예인ㆍ운동선수에 젊은이의 이목이 쏠렸다. 증권ㆍ금융업의 발전으로 펀드매니저ㆍ외환딜러가 선호 직종으로 부상했고, 반도체ㆍ컴퓨터ㆍ광고 분야에서 일자리가 많이 나왔다.
1990년대에는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프로그래머ㆍ벤처기업가가 각광 받았다. 인터넷과 컴퓨터가 빠르게 확산함에 따라 웹마스터ㆍ프로그래머도 젊은이들이 도전해 보고 싶은 인기 직종이 됐다.
2000년대는 직업 혁명이 시대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이색 직업이 속속 나오고 있다. 손님처럼 매장을 방문해 직업의 서비스 수준을 평가하는 '미스터리 쇼퍼' 나 인터넷 학습사이트 교사인 '사이처(Cyber 와 Teacher의 합성어)' 가 대표적이다. 앞으로는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환경ㆍ에너지 분야의 실버산업에서 많은 일자리가 새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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