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김우영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아마도 십중팔구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다.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되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만큼 구원에 대해 불확실하면서도 예수 믿는 걸 자신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바꿔 물으면 그 대답은 좀 달라지거나,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건 결국 자신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지만, ‘누구를 위해서 예수를 믿느냐’는 물음엔 ‘나를 위해서’라는 대답은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교리적인 지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자신이 얌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받기 위해서, 혹은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 너무 타산적이라며 비꼬는 사람들의 어설픈 말들을 더러 들어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의례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섬기는 것’이라는 대답을 한다. 세례를 받기 전에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대답만큼 완벽한 대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오면서 우리들이 왜 예수를 믿을까? 라는 물음에는 사람들의 대답이 일정하지가 않다. 그런 문답을 통해 세례를 베푼 교회지도자들조차도 그 정답에 맞는 삶을 가르쳐주기보다는 예수를 믿으면 개인이 축복을 받아 잘되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 초첨에 따라서 격려를 하고 독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기쁨이라는 건 어느 순간에 잊어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나 예수를 믿는 이유나 그 대답은 매 한 가지이다.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섬기는 것이다. 더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예수를 믿으면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우선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영광과 섬김을 받으실 수가 있기에 기뻐하실 수밖에 없다. 혹시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인간과 모든 우주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도 적용되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전제로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창조주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피조물의 목적은 창조주의 목적에 부합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 스스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세울 수가 없다. 이것이 인생의 한계라면 한계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섬김을 받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섬김을 드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그런 목적이 있어서 지으셨다는 말이다. 다른 동식물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창조하셨다. 자연과 자연을 가꾸면서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에덴동산, 바로 그 낙원에서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하나님께 영광 대신 후회를, 섬김 대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오만으로 철저히 배반만 안겨드렸다.
하지만 하나님의 첫 창조가 완벽했기에 또 다시 지으시지 않고 인간을 타락한 그 자리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구원이란 잘못을 그냥 덮어 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 인간은 계속 죄를 짓고 하나님은 계속 덮는 작업만 하시게 될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해 그를 사랑할 때 그 선택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 곧 낮은 자, 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죄인을 하나님의 의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지 않으면 감히 하나님의 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를 섬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과 섬김을 돌려드리는 것을 자신의 인생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첫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대로 되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는 믿음이란 것이 필요치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범죄하고 하나님과 나뉘어졌다가 하나님께서 불러서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만 믿고 따르겠다.’는 다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의심을 불식시키려는 마음에서 ‘믿습니다.’고 다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도 그 믿음을 좋게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떠났던 자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불신을 고백하고 믿고 사랑하겠다니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건 하나님의 첫 창조의 목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빛나는 일이고 우리의 섬김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회복되는 인간의 유일한 삶의 방법이다.
너무나 홀대받는 하나님의 말씀
여기까지 장황하게 다 알고 있을 듯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뜻을 밝힐 차례가 된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기도와 모든 삶의 초점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맞추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잘 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과 행복을 돌려드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과 축복에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해 달라고 날마다 하나님을 달달 볶는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고 자신을 위해 존재하신다. 인간을 비롯한 온 우주만물의 창조까지도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에 초점을 두고 계신다. 말은 말하는 자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 자신을 위한 자신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기쁨을 회복하시려고 부단히 말씀하셨다는 것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조차도 인간을 구원하사 그들로부터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면서 언제나 자신의 유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는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유익이 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고, 더구나 묵상하기도 싫은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좋은 말씀을 골라서 자기 좋을 대로 적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그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은 커녕 사람들에게서 마음대로 홀대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섬김을 받을 수 없게 되면 불행한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자들, 섬기지 못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쁨과 축복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섬김을 받으셨을 때,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가정으로 돌아가 보자. 자녀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부모를 영화롭게 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요즘 같이 가정의 가치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세상에서 이런 말은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더구나 부모가 자신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 자녀들은 물론이고 다른 부모들조차도 뭔가 빗나간, 한 참 잘못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고, 또 섬김을 받기 위해서이다.”란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부모가 자녀를 낳은 것은 “부모의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서이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자녀를 낳는 건 정말 아니다. 낳은 자녀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살아가는 부모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애당초 부모는 자신들을 위해서 자녀를 낳는다. 자녀를 갖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자녀를 위해서라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기 노부모에게 손자를 안겨 주려고 자녀를 서두르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도 자녀를 위해서 자녀를 낳는 것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자녀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회복되어야 한다.
아마도 집에서 개나 고양이나 새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개나 고양이나 새를 위해서 그런 동물들을 키우는가? 아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그런 동물들을 사랑하고 키운다. 결국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은 부모 자신을 위해서이다. 자녀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목숨까지 포기하는 게 부모의 사랑이지만 그것조차도 결국 부모 자신의 기쁨과 영광 때문이라는 걸 진정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사 죽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시겠다는, 애당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게 우리의 기쁨이고 영광이고,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부족하지 않은가? 부모가 잘 되어야 내가 잘 된다고, 부모가 기뻐야 나도 기쁘다고, 부모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자녀의 삶이 어떠할 거라고 생각되는가? 오늘날에 그런 자녀가 있다면, 그런 자녀의 그런 삶은 흔히 말하는 효도의 차원과는 다르다. 자신의 근원을 헤아려 부모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그런 자녀가 진정 복된 자요 참으로 성공한 자녀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며 입으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너무도 자기 중심적이다. 기쁨도, 영광도, 부와 명예와 권력도, 세상에서의 성공도 모두 자기 중심적이다. 내가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도 기뻐할 거라고, 하나님께 축복이 될 거라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거라고 제 혼자 좋아서 희희낙락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실용주의의 영향 때문일까? 예수를 이용해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건강 식품이나 약품(?) 팔아 돈을 벌면서도 예수와 하나님을 들먹이고, 그런 것들의 효과가 하나님을 높여주는 것처럼, 그런 것들의 효과가 사라지거나 유행이 시들해지면 예수와 하나님은 전혀 효과 없는 식품이나 약품처럼 시궁창에 버려지기 일수인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예수께 달려왔던 제자들이 아니라 손 내밀고 달려와 예수 앞에 줄서서 무엇이든 좀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더더욱 부자 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교회당들. 주님의 죽음으로 받은 구원, 영원한 생명은 별로 안중에 없는 것 같다. 예수를 믿으면 오직 예수로 풍성해지고 예수로 만족해야 하는 건데 예수를 이용해 건강해져 오래 살아야 하고, 부자가 돼 배 두들기며 사는 것, 이런 것들이 소원이 됐다. 그래서 예수는 약봉지에나 들어가는 감초가 됐다.
세상에서의 축복과 성공을 격려하는 메시지가 가장 인기 있는 시대, 그런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더더욱 많이 몰려드는 시대, 그래서 하나님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이 커지고 주차장이 넓어지는 시대, 따라서 지도자들의 호주머니가 두툼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부자 되는 사람들도 많아진 시대이다. 교회 안에서조차 빈익빈 부익부를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고 정당화하며 부와 성공을 독려하는 지도자들과 그들의 메시지에 베뢰아 사람들의 신사도가 발휘되기를 기대해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진정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이런 질문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거든 예수 믿기를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도 새롭게 읽고, 새롭게 묵상하고, 새롭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영원 앞에서 너무 늦은 시간은 없다. 정말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해보자. 이것은 진정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엄청난 혁명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재미 칼럼니스트
[출처]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작성자 비전설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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