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식.정보.시사.역사.과학.건강 等

중국공산당의 대약진운동과 대기근참상 - 박기수 연변대 교수

by 설렘심목 2019. 5. 10.

중국공산당의 대약진운동과 대기근참상

프로파일 박기수 2019. 5. 8. 14:45   / 번역보기


대약진운동과 중국의 대기근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시 수천만명이 기아로 죽는데 1959년부터 징조가 나타나고 정책이나 제도상 대처하지 못한다.

전세계에 정보를 봉쇄하고 착오를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한 것으로 사망자수는 공개하지 않으나 1961년 가계윤과 주백평등 국가통계국의 간부들이 전면조사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보고하였다.

영도들은 통계를 본후 다시 봉쇄하여 진상은 숨겨지는데 수천만명인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신화사의 고급기자인 梁繼繩(양계승)이 홍콩에서 墓碑(묘비)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이 전국을 돌며 수집한 것을 책으로 펴낸다.

그중 귀주성을 비롯한 10여개성의 자료를 통해 비정상사망을 인재라고 확신하는데 대약진의 공산풍이 만든 비극이라 결론을 내렸다.

인민공사화로 전국적으로 대면적의 한재로 정부의 무관심과 비공개로 사태는 더욱 엄중해진 것이다.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1958년부터 시작되는데 대기황은 3면홍기에서 비롯되는데 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정책으로 대약진은 경제성장의 속도개념이며 초월식발전을 추구한 것이다.

중공영도집단의 조급함으로 혁명의 성과를 바란 것인데 미소와 영국도 추월하려 한 것인데 모택동은 경제건설과 노동자의 영도인 후루시쵸프를 능가하려는 욕심을 가진다.

총로선은 속도문제로 신속굴기로 人民公社(인민공사)는 조직문제로 공산주의천당건설의 교량이라 주장하고 공산주의 실현의 원경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삼면홍기는 전국을 혼란과 기아로 몰아 경제규율을 모른 무모한 것으로 후에 대후퇴를 초래한 것이다.

1958년 5월 중공8전인대회에서 사회주의노선이 확정되어 삼면홍기라 하고 대약진운동이 일어나 강철과 양식의 대생산운동을 대대적으로 추구하고 세계제일국가로 비약을 천명한다.

1959년 식량생산은 15%가 줄고 1952년의 수준으로 돌아가고 대약진운동이 끝남 1962년 식량생산량이 다시 회복기미를 보인다.

대약진은 다음해인 1959년 사실상 실패하고 여산회의이후 1960년 다시 억지로 실시하지만 대기황은 1958년 겨울부터 시작되는데 수확후 두달이 지나 모두 없어지고 산동 안휘 귀주성등지에서 점차 폭로되는데 1962년까지 3년간 지속된다.

사천성은 1962년애도 대기황으로 사실상 전후로 5년간인데 대약진은 생산체계가 파괴되어 인민공사로 사적재산은 공공화로 생산의욕은 사라지고 집체식사를 하며 강철생산의 독려로 농토는 관심밖이 된 것이다.

더구나 모택동이 작물의 密植(밀식)을 독려하여 8헌법인 水(수) 土(토) 肥(비) 種(종) 密(밀) 保(보) 空(공) 管(관)을 규정한다.

이는 소련에서 학습한 것으로 삽앙등 불합리한 정황으로 모의 비서인 이예가 농민출신이라는 주석이 왜 그러느냐라 말하나 전학삼은 중국청년보에 과학은 역량이란 글로 태양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며 20배의 대증산이 가능하다고 발표한다.

모택동은 중국과학원전람관을 참관하고 모택동은 전학삼에 역학자가 농업을 잘알수있나 하자 전학삼은 농업은 모르지만 태양능의 효율계산이 그렇다라고 말한다.

전학삼은 원자탄과 수소탄을 개발한후 정치적인 위상이 커져 후에 문화혁명시에도 모두를 오도한다.

그는 과학의 우상으로 모두 그의 말을 믿은 것으로 광합작용이라는 도리를 믿은 것이다.

수재가 가장 큰 지역은 11개성으로 하남성이 신양 허창등이 엄중하고 최초로 인민공사가 하남에서 가장 먼저 생긴 것으로 밀을 묘당 300근에서 3000근으로 증산하는 위성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인민일보는 하남과 호남의 증산소식을 매일 보도하고 격려하는데 1958년 6월 8일부터 한묘당 3530근의 격동의 수확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신양은 곧 양식부족으로 시장마져 중단되는데 홍기잡지의 보도에 모택동은 흥분한다.

모두가 가짜보도로 실제로 2/10의 생산량으로 모두가 황당해하는데 여덕홍은 최근 모두가 거짓으로 희망사항이었다 한다.

하남에서 비교적 부유한 신양시에서는 최근 105만명의 기아사망자수가 확인되는데 공산풍이 만든 결과였다.

모든 것이 공응제여서 모두가 아무런 근거나 책임감은 없는 허풍을 떤 것으로 비료도 없는 시비로 당연한 결과였다 한다.

명령의 강박과 간부들의 허풍으로 고도집권의 관료제가 빚어낸 것으로 간부들만 풍족했던 것이다.

인민공사의 공공식당이 먹을 것을 해결해주니 아무도 책임감은 없었는데 농망식당이 전민식당으로 변하고 서로 절약정신은 사라진 것으로 인간의 속성을 간과한 것이다.

산의 목재를 모두 배어 낭비하고 양식의 허비나 집안의 취사구는 모두 철강으로 만들어 나중에 도구가 없어 굶어죽기도 한다.

1958년 전국적으로 340만개의 공공식당이 운영되고 하남성의 간부가 최초로 건의한 것으로 생산대의 학습과 선전광고에 유리하여 모택동은 크게 동의하고 확대를 독려한다.

귀주성은 90%이상이 동의한다고 보고하나 1959년 곧 문제가 발생하고 여산회의후 폐지하기로 한다.

평균주의사상으로 주민들은 공짜여서 비교적 동의한 것이나 곧 폐단은 노출되고 곧 정지되는데 여산회의후 전국적 우경화현상으로 노선투쟁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다시 2차공공식당이 생겨나는데 류소기 팽덕회 이예등이 크게 지적하고 농민들의 거부로 당간부들이 운영을 시작한다.

그런데 공동식당은 간부들의 사익추구의 부패현상의 온상이 되어 공공물자를 간부들이 착복하여 질량이 크게 저하된다.

그러나 여산회의후 전국적으로 50만개소이상이 증가하고 팽덕회의 반발로 전국적인 우경화운동이 벌어지고 다시 반동분자색출을 시작한다.

산나물을 사용하여 중독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 가는데 간부들의 착복으로 인한 것이다.

고대중국에서는 기황시 진재제도가 발달하여 다른 부유한 지역으로 보내거나 정부가 출연금으로 죽통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도황이라 하는데 이제 그러한 상황도 어려워진 것이다.

중공중앙은 문건으로 도황을 금지시키는데 1959년 3월 국무원의 연합통지로 관우제지농촌노동력맹목외류적긴급통지라는 문건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막는다.

목적은 기황의 상황이 외부로 전해지는 것을 막은 것으로 간부간의 정보교류자들도 모두 처벌받는다.

각역참에는 경찰을 배치하여 외부여행이나 외출은 금지된 것으로 중앙정부의 조사시에 간부들이 농민들의 발언도 막아버린다.

배고픈 모습을 보이는 이들은 모두 몽둥이로 맞고 정보유출은 철저히 금지된다.

이제 상황이 긴급해지지만 모두가 거주지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타지로 간이들도 원적지로 강제로 귀환하게 한다.

당시 영도층들이 통지한 목적과는 달리 지방관료들은 더욱 강격하여 농민들이 토지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연좌제를 실시한다.

이제는 서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데 노동력이탈과 사회안정을 제일로 하는 것이 목적으로 동북지역은 철저히 구금하여 죽는 이가 늘어난 것인데 조선으로 도주를 막으려 한 것이다.

구금후 식량공급을 중지하여 죽게된 것으로 광동성은 비교적 부유한 곳인데 홍콩과 마카오로도주하는데 국민당시 채정계장군은 고향의 사람들을 구출한 것으로 이후 부녀들의 출산을 금지하기 시작하고 부인들의 자궁적출이 시작된다.

이시기부터 중국의 산아제한이 시작된 것으로 생육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광동성에서는 1961-1962년에 대도망으로 전국의 간부 1000만명을 하향조치하자 간부들이 주로 홍콩이나 바다로 도주한 것이다.

간부들이 주민들과 대규모로 대륙에서 이탈을 시작한 것인데 50여만명이 홍콩으로 도주한다.

이는 군체성도주로 1957년부터 대기황시기에 가장 많아 보안현주민들은 250리의 도로를 가득 채운 도주자들은 변경으로 향하고 생산대들은 서기등 간부들이 집체로 도주를 시작한 것이다.

12개성의 60개성시의 간부와 주민들이 홍콩으로 몰려드는데 성의 간부들도 이를 용인한 것이다.

중공광동성위는 홍콩부근의 주강이서의 대기근으로 홍콩 마카오에 가까운 광주 불산 주해등 11개현시의 주민들을 자유선택하도록 선포한다.

명분은 홍콩으로 농산품교역의 허가였는데 5차의 도강이 가능하게 하고 약간의 5원상당의 물품과 채소등을 휴대하게 한다.

광동성장 陶鑄(도주)는 이를 용인하고 주은래도 경제적행위는 용인한다고 국무원령을 발동한다.

간부들은 하방으로 농민이 되자 불만이 커지고 대륙탈출을 선도한 것으로 황당한 일이다.

하남성간부 장수번은 훗날 회고록에서 백성들이 굶어죽었지만 당에 대한 신뢰로 양식보관창고를 탈취한 예가 없었다고 감개하나 공산당의 강압통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1959년 4월-1960년 4월사이 사망자가 가장 많았는데 당시 정부의 비축미는 887.03억근으로 일년의 생산량으로 319억근이최저점인데 1960년 4월 춘황이 가장 엄중한 시기로 양식비축량이 403.51억근으로 무역량으로 원량미의 1.5배로 추산된다.

절반만 풀어도 기아자는 없었을 것이나 1962년 8월 25일 양식부의 게획사령부 통계자료상

1960년 6월30일에는 가장 사망자가 많았던 시기에는301.48억근이 비축량이었다.

북경은 2,3억근 천진 1.5억근 상해는 2.53억근 호북성은 8.26억근 산서는 8.16억근등 각성에 배분한다.

하북성은 25.07억근이 비축량으로 호북성은 13.22억근인데 800만인 신양지역은 개인당 50근이 무역량으로 비축미를 풀었다면 아사자가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약식부는 비축미증가를 추진하는데 모택동은 배가 고플수록 비축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혼용무능한 지도자인데 북의 뚱뚱이들이나 모택동은 비슷한 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식창고의 개방은 불가능해진 것인데 현재 북의 사정도 비슷하여 군량미를 2년분량을 비축해야 하는 것이다.

여덕홍은 당시 신양은 11억근을 고수하여 보관하라는 지시로 긴급한 상황에도 아무도 창고를 열수 없었는데 열면 즉시 즉결처분되게 된 것으로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초목도 모두 먹고 식당은 문을 닫아 부종으로 죽은이가 일반적이라 하고 한없이 걸어가다가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하남성 고시현서기인 석소거는 양식을 만일 개방하면 서기가 채워야 하여 별도조직이 식량을 관리했다고 한다.

혁명전사출신의 노간부도 식량만은 손을 댈 수 없어 식량을 방출한 부현장은 후에 신강으로 끌려간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1960년 1월 모택동은 엄중한 기황에 집정자는 식량을 증가시켜 비축하여 국가에 충성을 거듭 촉구한다.

국가양정부는 보고중 1959년 양식비축에 대해 여름소요량으로 계산시 1959년 10월현재 1142억근의 방출가능량이 있다고 한다.

중앙정부가 요구한 1075억근을 6%가 초과한 수량이라 보고하여 가을기준으로 1959년 12월 25일 수량이 1059억근으로 94%의 비축량을 달성한 것이라 보고한다.

1960년 여름용의 비축량은 초과달성이 확실하다고 보고하는데 1200역근을 비축하기로 한다였다.

모택동은 비준시 생산약진으로 계속적인 모범을 보이도록 격려하고 국가양식비축량의 확보가 매우 중요함을 역설한다.

이는 필요하고 가능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비준하였다.

국가는 진보와 광명의 존재인데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공산세월의 기록이다.

--------------------------------------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매일경제 MBN 중국 경제문화 연구소장

박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