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의 원인, 他山之石 삼아야..
1954년 7월 21일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월남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권인 월맹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60년 12월 공산 월맹의 지원으로 월남 내 공산조직인 월남민족 자유전선이 설립되어
월남 정부에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본격적인 월남전이 시작되었다.
신생독립국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미국은 1964년 이후 연간 500억 달러를 퍼부으며
53만 여명을 파견, 전사자 5만 8256명 부상자 20만명이라는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악화된 여론 및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발을 빼기 위해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월맹과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한다.
당시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100만톤의 식량을 비롯한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대남적화 공세를 멈추지 않았던 월맹이 평화협상에 나선 목적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 봉기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세우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측에서 평화협상을 제의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결국은 미국을내쫓기 위해서 한 거였거든요.
미국을 내쫓으면 공산화 시킬수 있다.
평화회담을 하기전에도, 할때에도 , 한 다음에도 무력남침 공산화 전략은 변함이 없었거든요.
겉으론 변한것 같아서 거기에 속았죠. 그래서 월남은 망한 거죠."
월남의 정치 상황은 이러한 월맹의 치밀함과는 대조적이었는데,
전쟁이 치열했던 1967년 9월3일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난립했다.
이 선거에서 패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 변호사는 외세 배척및 우리민족 끼리를 내세우며
동족 살상,월맹에 대한 폭격금지, 미군철수, 조속한 남북 평화회담등을 주장했고
이같은 발언은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여론을 자극했다.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내 종북세력들처럼...
"우리끼리 싸움을 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외국군까지 불러들여서
여기가 피바다가 되었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안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평화 협정을 맺어서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해 나가겠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이렇게 자꾸 주장을 하는데 공산당 당원이었던 거야. 몰랐죠."
파리에서의 비밀협상 진행이 알려진 후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5년여 협상끝에 월맹에 40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등 12개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월맹이 심리전, 월맹내 사회불안,미국내 반전 분위기등에 시달리던 미군은
월남 야당의 철군주장을 빌미로 1973년 3월 전면 철수하게 된다.
미군 철수의 결정적 원인은 택토 공세때문이라고 할수있다.
택토 (월남의 구정 연휴) 공세란 월맹의 기습공세로 미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다시 미군의 반격으로 9만명이상의 월맹군이 사살됨
"미국이 발을 뺀 근본적인 원인은요. 미국 대사관이 점령을 당하니까 말이야
앞으로 아무리 싸워도 끝이 안나겠구나.그들이 미국을 내쫓기 위해서한거죠.
월맹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그건 전부 외면하고 신문에서는
미 대사관이 점령당했다. 미군이 몰살당했다 하니까 정말 이쪽이 사실은 크게 이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배하고있는 것으로 인식 되어 버렸습니다.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
다 평정하고 월맹군이 산악지역에 조금 남아있었는데 월남 통일을 못하고 미군이 나가버렸죠."
13만 군사중 9만명 이상을 잃은채 미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 지역으로 피했던 월맹군.
하지만 미군은 월맹군을 완전 섬멸하지 못한 채 반전여론에 의해 철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장비도 훨씬 우월한 적을 대면해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면이든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려 했죠.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전선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철수 당시 미국은 월남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면서 월맹이 평화협정을 파기하면 해군및 공군력을 동원하여
월맹에 대한 폭격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장갑차 400대 항공기 700대등 1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함으로써 그무렵 월남의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의 남북의 경제력 차이와 미군의 철저한 유사시 지원 약속은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 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미국은 그럴 것이라 판단했다.
"(평화협정 채결 후) 티우 대통령을 만났어요.
월맹이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죠. 월맹은 전쟁할 능력이 없다.
너무 가난해서 하루 두끼도 못먹는다. 그것도 소금 반찬으로 연명하고있다.
미국이 4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협정을 깰수 있겠는가?
10년 동안은 못 나온다. 그 기간동안 석유개발 등을 통해 월맹과 격차를 벌여 놓으면,
월맹은 끝내 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월남에서는 파리에서 채결된 평화협정을 완전히 믿고 있었죠.
협정을 통해 모든게 해결될것이라고.."
이같은 믿음은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이 월맹을 과소평가하고 총체적 안보불감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리고 신부, 승려, 언론인, 학생 등 좌익인사들은 이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티우정권타도를 외치며 반정부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또 월남 정부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만에 반정부 게릴라 단체인 베트남 임시혁명 정부청사에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까지 많은 공산간첩이 침투해 있었다.
1967년 대선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를 비롯해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와 대통령 비서실장,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경찰장관이었던 창반만, 대통령궁을 폭격한 월남 공군 대위 구엔타인충 등 많은 정치인과 관료,
군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공산간첩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수있다.
그리고 이러한 월맹의 치밀한 정보수집과는 대조적으로 월남의 대공 정보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못했다.
"우리는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모는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타고
부유한 자본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드러내놓고 왕래하며 상황을 염탐했습니다.
혹시라도 계획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이었죠."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면 정보기관들이 또 바뀌고 이러다 보니 정보기관들이 완전히 무력화 되어
이북(월맹)의 정보가 많은데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 거죠."
공산세력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십개의 언론사를 통해 정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익 인사들을 '무식한 전쟁광'으로 매도하는 한편 무자비하게 암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 중산층,언론인 등 다수 우익들은 침묵을 선택함으로 결국 소수의 조직화된 좌익들의 공세에 당할수 밖에 없었다.
1975년 3월 10일 월맹은 파리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월남에 이미
오래전부터 침입해 있던 간첩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18개 사단이 총공세를 감행했다.
즉각 전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해서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는 티우대통령의 호소를 외면하고
짠후탄 신부와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분열과 총체적 부패 그리고 의욕상실에 빠져있던 월남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 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1975.3.26 월남의 제 2도시 '다낭' 함락
1975.4.21 티우 대통령 하야. 해외 도피
1975.4.30 월맹의 총공세 50여 일만에 사이공 함락
1975.4.30 자유월남 패망
군사, 경제력 및 인구등 모든 면에서 월맹을 압도했던 자유 월남은 결국
월맹의 총공세 이후 50여일만인 4월30일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이공 함락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 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 운동가 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졌고
대부분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처형, 학살되었다.
"베트콩으로 활동한 월남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해 제거해 버렸습니다." 리 라닝 ('베트콩과 월맹의 내막'의 저자)
이렇게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인사들까지 처형된 이유가 우릴 놀라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일이 뜻밖이라고 생각하냐구요? 강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정도의 일에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지킬줄 몰랐고, 진실을 알면서 침묵하기만 했고, 외면하기만 했기에
자유의땅 사이공은 함락이후 너무나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결국,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월남 국민들에게 평화 협정과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 조각일 뿐인 것...
공산화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이어진 보트피플들의 월남 탈출.
약 106만명으로 추정되는 보트 피플중 11만명이 배가 전복되어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것으로 추정되고있다.
당시 공산 월맹이 구사한 전술
'통일 전선전술'
약 6000여명의 정예 공산당원들을 월남에 침투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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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내세워 월남의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등을 배후 조종,
반정부. 반미 시위를 주도(남한의 종북세력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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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월남은 공산당의 목적대로 내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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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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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적계념, 경계심 무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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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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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전투기조종사는 자기가 지켜야할 대통령궁으로 기수를 돌려 맹렬한 폭격을 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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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은 이미 전투의지 상실.
↓
자유월남은 1975년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짐.
<펌 註 : 지금의 대한민국과 너무나도 흡사한 공산화의 진행이라고 본다면 기우일까? >
출처: http://inthink.tistory.com/26 [인씽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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