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14 02:43posted by napaj
지금 일본의 역사학계에서야 임나일본부설을 믿는 사람들이야 없겠지만, 고대사 팬 가운데에는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근거를 갖다 대더라도 그림 2장만 들이대면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한다. 바로 양직공도.(梁職貢圖)이다.
양직공도란 훗날 양의 원제로 즉위하게 되는 태자 소역(蕭繹)이 형주자사로 재임하던 기간(526- 539), 양과 조공관계를 맺은 35개국의 사절을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남경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북송 때 그려진 모사본이며 여기에는 백제, 왜국 등 12개국 사신의 그림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그림이 그려진 6세기는 일본의 왜5왕이 자주 중국남방의 여러 왕조에 사신을 보낸 시기와 겹친다. 왜5왕이란 진서(晋書)와 송서, 남제서 및 양서에 나오는 왜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과 무(武)의 다섯 왕을 말한다. 5왕은 413년으로부터 502년까지 90년간 중국에 조공을 하며 책봉관계를 유지하고 칭호를 수여 받곤 했다. 478년 왜 5왕 중 무(武)가 조공의 대가로 송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칭호는 다음과 같다.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 6나라를 아우르는 대단히 거창한 칭호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의 한반도 남동부와 일본은 자기들이 다 먹었다는 이야기이다.
칭호대로라면 당시의 왜는 대단한 나라이다. 따라서 국가체제도 물론 제대로 정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국사시간에도 배웠듯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에는 관제의 정비와 복색의 마련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6나라를 아우를 정도의 대국이라면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의 옷차림 역시 세련되고 품격이 있었을 것이다. 외국에 파견하는 사신의 의복에는 어느 나라나 신경을 쓰는 법이다. 일부러 비루하게 차려 입어 업신여김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옆그림은 중국에 나타난 일본 사신의 모습이다. 헝겊조각을 머리에 두르고 각반을 차고 있다. 더구나 맨발이다. 하반신에도 천을 두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나라의 사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차림이다. 수염이야 기를 수 있으니 그건 그렇다고 치자.
이러한 차림으로 나타나 지금의 일본과 한국을 다 자기들이 먹었다고 허풍을 쳐대니 중국으로서도 황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남조의 중국들은 주위나라를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신들의 주장을 그대로 들어주고 있던 시절이었다. 북방민족들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면 백제사신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옆의 그림이다. 관을 쓰고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다. 가죽으로 만든 신도 신고 있다. 예복의 디자인도 뛰어나고 색깔 또한 일품이다. 하의의 색깔 또한 화려하기 짝이 없어 왜국 사신과 차이가 나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이 양직공도를 처음 접한 일본 역사학계는 적지 않게 당황했던 모양이다.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이론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주장하던 학자들에게 이러한 사신들의 복장 차이는 어처구니없기까지 했었으리라. 사실 왜국 사신의 차림은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지배는 커녕 과연 국가로서의 기본이나 갖추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럴듯한 설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학자들은 고심했던 모양이다. 가령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같은 저명한 역사학자는 이 그림은 사신을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상상해서 그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6세기의 한참 전인 야요이 시대 때의 왜인상을 상상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직공도에 그려진 왜국 사신의 모습은 위지 왜인전에 나타난 왜인상일 뿐 6세기의 왜국 사신의 모습은 이와는 전혀 달랐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알 수있지만 상상으로 그렸다기에는 너무 묘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더구나 중국이 왜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왜국사신만 상상으로 그려야 했을까? 양직공도에 나온 다른 나라 사신들 역시 격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이 그림은 페르시아의 사신이다. 제대로 된 나라들이라면 이 정도의 차림은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우에다의 주장은 물론 다른 역사학자들도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력한 주장으로는 이 사신은 야마토 조정이 아니라 지방정권이 마음대로 파견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 어느 지방정권의 사신이 중국에 와서 자기 주인이 왜를 다 먹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의 학자뿐 아니라 고대사 팬들도 이 문제는 별로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 야후에서 양직공도라고 검색해봐야 47개의 문서밖에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47개도 태반이 백제에 관한 이야기일 뿐 정작 왜국에 관한 문서는 몇개 되지도 않는다.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고대사 팬이 대단히 많은 일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한국사람이 보면 괜시리 뿌듯해지는 그림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