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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현 장인의 바이올린...

by 설렘심목 2016. 4. 21.

세계적 바이올린 명장 재일동포 진창현씨

"스트라디바리우스 명음 따라잡을 겁니다"

   중앙일보 기자 2004-11-26 16:33:30

<사진1>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 불리는 재일동포 진창현(75)씨가 만드는 바이올린은 한대에 150만엔(약 1500만원), 첼로는 300만엔에 팔린다. 일본제로는 최고가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상품 대접이다. 그는 국제콩쿠르협회에서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보증해 주는 '무검사 제작가' 다섯명 중의 한명이기도 하다.
"필생의 목표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의 이름을 딴 명품 바이올린)에 필적하는 명기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악기가 내는 소리를 따라잡지 못합니다. 내 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80%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경북 김천 태생인 진씨는 광복 이전인 열네살 때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학업을 잇기 힘든 가난 때문이었다. 그는 분뇨 수거 일을 해가며 주경야독했다. 명문 사립대를 졸업했지만 차별대우를 받는 재일동포에겐 변변한 직장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던 어느날, 대학 시절 들었던 한 공학자의 강연이 떠올랐다. 진주만 공습에 동원된 전투기를 만든 일본 최고의 엔지니어가 패전으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자 바이올린 제작으로 돌아섰으나 최첨단 과학으로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악기는 재현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강렬한 도전의식을 느낀 진씨는 당시 일본의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으나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조선인이란 것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었다.
"독학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산 속에 움막을 짓고 나무를 베어 밤낮으로 조각도와 씨름했습니다. 칠하는 것도 혼자 연구했지요. 배가 고팠으니 헐값이라도 많이 만들어 팔아야 했습니다(그가 1950년대에 처음 만든 바이올린은 기계로 찍어낸 대량생산품도 1만엔에 팔리던 무렵에 3000엔에 팔렸다고 한다). 그러기를 한 10년쯤 하니까 악기에서 나만의 소리가 나오더군요."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76년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 나가 6개 부문 중 5개 부문을 휩쓸면서부터다.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이후 세계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남들은 재일동포란 사실이 큰 약점이라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운명과 맞서 싸우는 힘의 원천이 됐으니까요.역경이 오히려 인간을 성장시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진씨는 "바이올린 한대의 제작 원가가 얼마쯤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1만엔쯤 됩니까"라고 답하자 "정확하게 7000엔이 든다"며 "수백배 값을 받고 파니 이만큼 부가가치가 큰 산업이 어디 있느냐"며 웃었다.
"일주일 일하면 1년 먹고 살 만한 수입이 됩니다. 돈은 더 안 벌어도 되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작업대에 앉습니다. 16개의 부품으로 이뤄진 바이올린이란 소우주, 거기에 아직 내가 이르지 못한 경지가 있거든요."
명장(名匠)이란 말은 진씨와 같은 사람을 일컫는 단어일 것이다. 그의 삶은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이란 제목의 3시간 분량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오는 27일 일본 후지TV의 창사 40주년 특집 작품으로 방영된다. 일본 최고의 연출자로 꼽히는 스기타 시게미치(杉田成道)가 메가폰을 잡았다. 주인공인 진씨 역할은 '초난강'이란 예명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구사나기 쓰요시(草剛)가 맡았다.      //  도쿄=예영준 특파원

 


천상의 선율,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 바이올린 제작의 세계적인 거장 진창현 이야기 -

 

진창현(陳昌鉉:1929.10-2012.5)은 널따란 모래밭 길을 지나면 은어떼가 노니는 감천(甘川)이 흐르는 곳, 경상북도 김천의 이천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어 일제의 치하에 있을 때, 14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사숙으로 바이올린 제작의 1인자가 되었다. 그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세계 최고의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 : 17-18세기 이탈리아 크레모나 지역의 스트라디바리Stradivari 가문에서 제작한 바이올린)의 신비스런 제작기술에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47세 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총6개 부문 중 5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세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바이올린 ‘무감사(無監査)’ 제작자로 인정을 받아 세계 최고의 장인이라고 부르는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한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가 일본에 건너갈 당시 일본사회에서 조선인은 매우 하찮은 존재였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조센징으로 살기를 고집하며, 오직 바이올린에만 일생을 걸었다.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집념과 욕망은 마침내 그를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는 세계적인 명성의 장인으로 만들어 내고 말았다.

국제 콩쿠르 시상식장에서 그는 졸고 있었다

1976년 12월, 미국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는 제2회‘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가 열리고 있었다. 이 행사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에 대한 세공과 음향의 두 부문으로 나뉘어 총 여섯 개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거장을 가리는 큰 대회였다. 행사장인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대학 강당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작자들이 모두 초청되었고, 거기에는 진창현도 초대되어 직접 만든 악기를 출품하고 있었다. 진창현은 시상식이 거행될 대회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한 부문에도 해당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진창현은 오랜 여행의 피로 때문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 시작했다.

그가 단잠에 빠져들어 꿈속을 한참 헤매고 있는 그 순간에 행사장의 무대에서는 콩쿠르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영예의 금상 수상자가 호명되고 있었다. 이때 진창현은 꿈속에서 일본의 도쿄(東京) 문화회관에서 개최는 바이올린 연주회의 콘서트마스터 자리에 앉아 연주회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 연주자의 연주가 끝나고 다음 연주자가 소개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지휘대를 바라보니 지휘자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비아바Biava씨였다. 그리고 진창현 자신은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일어나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닌데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참으로 난감한 처지였다.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어요!”

아무리 크게 소리를 쳐도 박수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나는, 나는 할 수 없어요.”

그는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허우적거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이게 또 어인 일인가. 대회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수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얼떨결에 그도 따라 같이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도 시상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가는 이가 없었다. 행사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청중들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미스터 췡쒠 찐! 미스터 챙휸 찐!”

단상에서는 사회자가 몇 번이고 수상자이름을 반복해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잘 알아듣기 힘든 중국인의 이름 같기도 하고, 한국식 이름인 것도 같았다. 그는 아마도 동양에서 참가한 어떤 기술자인가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자, 사회자는 당황하며 다음 수상자인 비올라 부문의 수상자 이름을 불렀다.

“The Winner is Mister 챙휸 찐!”

그런데 이번 수상자도 같은 이름인 것 같았다. 사회자가 또 계속 이름을 불러도 단상에 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박수소리는 계속되었다. 여전히 수상자가 나타나지 않자, 사회자는 다음 첼로 부문 수상자의 이름을 불렀다. 계속해서 또 같은 이름이었다.

“The Winner is Mister 챙휸 찐! Where is 챙휸 찐!”

그때서야 그는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챙휸 찐’은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부르는 미국식 발음이 아니던가. 사회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린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더욱 열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 속에 다리를 휘청거리며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간간히 들리던 박수소리는 뇌성과 소나기처럼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게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그의 앞에는 꿈같은 현실이 실재로 펼쳐지고 있었다. 첫 번째 수상을 하고 돌아서려는 그를 자꾸 붙들며 계속 상을 안겨주는 바람에 무슨 상을 어떻게 탔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창현은 이 콩쿠르에서 총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의 음향부문을 제외하고 무려 다섯 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 사회자가 수상 소감을 이야기 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너무 감격해서 대회장을 제대로 들러보기도 어려운 상태였고, 수상 소감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서투른 영어로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지금부터 30년 전, 저는 바이올린 제작에 뜻을 두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최선을 다해 바이올린을 제작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유감스럽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바이올린 제작에만 몰두해 있던 저를 그늘에서 지탱해 준 아내와 가족, 그리고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한국은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이고, 일본은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이며 그리고 미국은 저의 은인입니다.”

“사실, 저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의 요코하마라는 곳에서 인력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동포인 미군 병사를 만났고, 다시 그 병사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어야 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 그 병사는 더 이상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가지고 있던 달러 지폐를 모두 저에게 건네주고 떠났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병사, 톰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 미국의 국민여러분, 건국 2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를 끝내자 대회장 안에서 ‘부라보!’라는 함성이 크게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국전에 참가한 톰의 이야기에 공감한 사람들로 인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도 새어 나왔다. 진창현은 이때만큼 바이올린 제작을 해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동했던 순간이 없었다고 했다. 자리로 돌아와 수상의 감격에 젖어 있으려니,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수도 없이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던 시절과, 밤을 지새우며 미친 듯이 바이올린을 만들던 시절들이 한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상의 기쁨을 알렸다. 그리고 사흘 후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행사가 끝난 다음날 그는 일본의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한국의 고향땅에 누어계신 어머니 묘소로 향했다. 어머니는 그가 이 수상을 하기 6개월 전에 돌아가셨다. 마중 나온 누이동생과 함께 묘소에 올라 나란히 어머니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가방에서 다섯 개의 금메달을 꺼내서 어머니의 묘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제가 큰 상을 받아 왔어요. 기쁘시죠? 어머니!”

그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묘소를 눈물로 참배하고서 금메달 2개를 어머니 묘소 앞에 묻었다. 그리고 금메달 하나는 동생에게도 걸어 주었다.

여섯 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만나다

진창현, 그는 1929년에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김천군 이천마을(일명 배시내/ 현재지명-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태촌3리)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천마을 앞에는 폭이 1킬로미터 정도나 되는 감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김천시를 북동류하여 마을에서 10킬로미터 정도 아래쪽에 있는 낙동강과 합류한다. 창현은 어린 시절에 그 강에서 멱을 감고 은어 잡이를 하면서 자랐다. 창현이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만난 것은 어느 날 두꺼비기름을 팔러 마을을 찾아온 떠돌이 약장수에게서였다.

손님을 끌기 위해 약장수가 켜대는 바이올린 소리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하루 종일 약장수 뒤만 따라다녔다. 처음엔 그 이상한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무슨 악기인지도 몰랐다. 어깨와 턱으로 악기를 괴고 톱 같은 이상한 것으로 비벼서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신비스러웠다. 그리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그 매혹적인 소리는 어린 나이에 잊지 못할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때 창현은 6살박이 어린 소년이었다. 그 후로도 창현은 바이올린 소리만 들리면 집을 뛰쳐나갔다. 이때는 일제 강점기 아래서 조선인이 한참 핍박을 받고 있던 암울한 시기였다.

사실, 대한민국에 서양문화인 바이올린이 들어오게 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음악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조선이 서양문화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이때 음악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양가집 도련님으로 한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양가집 자녀라 해도 여자아이는 입학할 수가 없었다. 여자 아이한테는 바이올린을 가르친다는 발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때였다. 당시에 바이올린은 주로 무성영화가 상영될 때 스크린 옆에서 연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바이올린을 잘 연주할 수 있다 해도 무성영화의 반주자가 되지 못하면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약을 비롯한 다른 물건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그때 약장수는 향로장수라고도 불렀는데, 효과도 없는 가짜 약을 파는 사기꾼이라는 이유로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창현은 이런 약장수가 올 때만을 늘 기다렸다. 창현이 약장수 뒤만 따라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는 창현에게 호된 야단을 쳤다.

“이리 좀 와라. 너, 그 사기꾼 녀석의 뒤를 따라다닌다면서?”

“너도 장래에 그런 녀석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집에서 나가거라.”

“아니에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악기 소리가 재미있어서 그냥 듣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런 악기에서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지 궁금했어요.”

소학교 2, 3학년이 되어서도 동네에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뛰어나가 끼니때가 되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고 약장수를 끝까지 쫓아다녔다. 호기심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좋아했던 창현은 약장수가 올 때마다 미끄러지듯 현위를 움직이는 약장수의 손가락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은커녕 축음기도 라디오도 구경하기 힘든 시대였으니 창현의 눈에는 그 약장수가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 (러시아 태생의 미국 비이올리니스트)나 유디 메뉴인Yehudi Menuhin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과 같은 명연주가로 보였을 것이다. 대체로 보통 사람들은 소리가 좋은가 보다 하고 그냥 지나치게 되는데, 창현은 어린나이에 바이올린 소리에 매료된 것부터가 타고난 인연인 것 같았다. 훗날, ‘이것이 나와 바이올린의 첫사랑 같은 만남이었다’고 진창현은 회고했다.

그 후 소학교 4학년 때, 창현의 집으로 하숙을 하러온 아이카와 기쿠에相川喜久衛 라는 일본인 선생님이 가져온 바이올린이 두 번째 인연이었다. 어머니는 처녀시절 돈을 벌려고 일본의 도요하시(豊橋)시에 있는 방적공장에서 2년간 일을 한 적이 있어서 일본어 소통이 가능 했기 때문에 일본인 선생을 하숙으로 들일 수 있었다. 이때 창현은 선생님이 바이올린을 가지고 온 걸 보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선생님이 약장수인가?”

어머니 그냥 웃기만 하셨다. 호기심이 발동한 창현은 선생님 방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고 좋으신 분이셨다. 창현은 선생님 방에서 바이올린의 연주를 듣기도 하고, 직접 만지기도 하였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학교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면 저녁을 먹은 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바이올린을 들고 마을 앞 감천 강가로 나가 바이올린을 켜곤 하였다. 무더운 여름날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바람을 쐬러 강가에 모여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선생님의 바이올린 소리를 즐겨 들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도 다 떠나고 없는 강가에서 창현은 바이올린을 연주해주던 선생님께 굳게 마음을 먹고 물어 보았다.

“선생님 저도 그걸 연주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한번 해볼래? 그렇지. 여기를 잡고, 왼쪽 턱으로 가볍게 누르고….”

그날이후, 선생님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창현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창현은 하루하루가 천국 같은 기분이었다. “사쿠라(벚꽃)” “고조노 츠키(황성의 달)”라는 곡도 이때 배웠다. 이렇게 아이카와 선생님과의 만남은 창현에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바이올린 인생을 결정짓는 시작점이 된 것이었다. 그 당시 창현에게 선생님은 현실의 사람이라기보다는 꿈과 같은 존재였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그저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청년 일뿐 아니라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한번은 선생님이 공책을 산더미처럼 사서 자전거에 싣고 들어오셨다. 그렇게 많은 공책을 어디에 쓰려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님! 이 많은 공책을 어디에 쓰실 건가요?”

“공책이 없어서 흑판만 멍하니 보고 있으면 어떻게 공부가 되겠니?”

“뭘 써볼 수 있게는 해줘야지.”

선생님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자기 주머니를 털어 공책을 사서 주시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 그래서 창현은 이다음에 크면 반드시 아이카와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되겠다고 그때부터 결심하게 되었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창현의 집에서 기거한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징집을 받아 중국으로 출정을 가게 되었다. 선생님이 마을을 떠나던 날, 아이들은 현수막을 들고 선생님을 배웅했다. 선생님은 북중국에서 기마병으로 있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후, 전쟁이 끝나고서도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아이카와 선생님은 초라한 농촌 마을에 찾아와 바이올린으로 어린 창현에게 한줄기 빛을 심어준 특별한 사람이었다.

훗날,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창현을 살려낸 것은 바로 이시절의 기억이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희망이 없는 깜깜한 어둠속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바로 그 한줄기 빛의 기억이 창현을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카와 선생님은 창현에게 인생의 은인으로 남아 있었다.

14살에 현해탄을 건너다

창현이 김천중학교에 다닐 때, 태평양 전쟁(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일본에서는 대동아 전쟁이라고 함)으로 인하여 시국이 불안해지자 농민들은 수확한 쌀의 3분의 2를 공출해야 했다. 그래서 농민들은 쌀로 죽을 쑤어 근근이 생활을 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더구나 젊은 사람은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군대에 끌려가 일손도 부족했다. 체력이 좋은 인부나 소작인 등 가난한 사람들은 일본의 탄광으로 보내졌다. 이때 조선에서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점차 일본의 패색은 짙어지고 있는 때에 창현의 아버지(진재기陳在基)는 폭음으로 간이 손상되어 빚더미만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창현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때 14세 이상이면 강제 징용을 당하는 때여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언제 붙들려 나갈지 불안한 상태였다. 창현에게는 이복형들이 셋이나 있었는데, 모두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이제 중학교도 다닐 수 없는 형편인 창현은 그 이복형들로부터 일본의 야간 중학교는 학비가 공짜나 다름없이 매우 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형들은 창현더러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말도 했다.

꿈 많은 소년 창현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형들을 믿고 야간 학교라도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1943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행을 결심하고 홀로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 건너간 창현은 트럭 운전을 하는 큰형을 따라 조수역할을 하면서 후쿠오카(福岡)에서 야간 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어렵게 학교를 다니면서 늘 고향의 어머니(천대선千大善) 생각에 밤마다 울었다. 창현이 고향집을 떠날 때, 먼발치에 까지 따라 오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며 이별을 슬퍼하시던 어머님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지냈다. 창현에게 어머니는 아주 특별한 분이셨다.

창현이 어머니에게 일본으로 건너가겠다는 결심을 털어 놓자 어머니는 매우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린 아이가 스스로 일본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어머니 입장에서는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이었다.

“너는 나에겐 외아들이니까 멀리 떼어 놓고 싶지 않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겠지?”

“알아요, 엄마. 하지만 내가 여기에 있으면 엄마가 너무 힘들어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요.”

어머니는 창현이 떠나던 날 이웃 사람에게 부탁하여 수레까지 준비를 해 주고 이불도 새 것을 만들어 커다란 보자기에 싸서 주먹밥과 함께 건네주었다. 창현은 어머니께 큰 절을 올리고 달구지에 올랐다. 창현은 달구지가 출발해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그대로 앞만 보고 있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솟아나오는 눈물 때문에 앞을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보니 어머니가 논과 논 사이 길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구지를 멈추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숨이 차서 괴로워하시면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이건 공작용 칼이다. 어려서부터 네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칼이다.”

어머니는 보자기에 싼 칼을 창현의 손에 쥐어 주셨다. 창현이 어렸을 때 장난감을 만들려고 부엌칼을 훔쳐 달아나던 그때부터 어머니는 이런 고급 공작용 칼을 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칼에 담겨진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을 위로 했지만 그도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갈게요. 어머니, 이번엔 정말 따라오면 안돼요. 내가 괴로워요.”

흐르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연신 훔쳐내며 애써 눈물을 참고 계시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다시 달구지에 올랐다. 어머니가 사라지자 어머니 앞에서 필사적으로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창현은 경사가 심한 산길을 가면서 어머니가 주신 이불 보따리를 움켜쥐고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었다. 그 시대에는 가문에 대를 잇지 못하면 토지를 몰수해 버렸다. 그래서 조선의 어머니들은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낳아야 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친정으로 쫓겨 가고, 아버지들은 새로 장가를 들어 대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보통 남자들은 아내가 2-3명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점차 사라졌지만 옛날의 이런 풍습 때문에 창현의 아버지도 부인을 셋이나 두었다. 창현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첫째 부인은 아들 셋을 두고 산후 부기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둘째 부인을 맞이한 것이다. 창현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는데, 눈을 감기 전 이런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아들 하나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까 최소한 두 명은 낳도록 해라.”

“만약 결혼해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즉시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도록 해라.”

창현의 아버지는 상속받은 땅을 가지고 소작농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때 조선의 거의 모든 남성들이 그랬듯이 아버지 역시 술고래였다.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고 한번 마셨다 하면 앉은 자리에서 한 말 정도를 마셨다. 먹고 살기도 힘든 당시의 상황에서 남자들의 이 같은 생활방식은 여성들의 고된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가혹한 일이었다. 그래서 창현은 어린 마음에도 늘 어머니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양반집의 3대 독자로서 그야말로 옷자락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귀하게 떠받들려 자랐다. 거기다가 아버지가 아홉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살아서 마치 왕처럼 군림하였다. 창현의 집안은 3대가 외아들이어서 대가 끊기면 큰일이기 때문에 집안 식구들이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래서 창현의 아버지는 몸에 좋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서인지 키가 190센티미터나 되는 장골이었다. 아버지는 당당한 체격 때문에 마을에서 씨름판을 휘어잡는 등 항상 으스대고 다녔다.

창현의 어머니는 조금 늦은 나이에 창현을 가졌다. 아이가 너무 늦은 까닭에 어머니의 젖이 부족하여 늘 걱정이었다. 한때는 아들을 살리려고 이웃 동네까지 젖동냥을 다녀야했다. 아들이 죽는다면 멸시를 당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아이를 살려야 했다. 이렇게 창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전부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창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는 분이었다. 창현이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어머니는 딸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창현의 아버지는 다시 셋째 부인을 들이고 여기에서 2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손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창현은 호적상 여덟 자녀 중 여섯째 이었다. 창현의 순서가 늦어진 것은 창현의 어머니가 일찍 아이를 갖지 못하자 아버지가 셋째 부인을 맞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느지막에 어렵게 태어난 창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어머니는 창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창현을 부를 때에도 ‘너’라는 말 대신 ‘키미’라고 불렀다. (키미는 동년배이하의 아랫사람을 존중해서 부르는 말) 어머니에게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신 것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허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큰 탈 없이 소학교를 졸업하고 김천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한번은 창현이 영어참고서를 사고 싶다고 하니 쌀 한가마니를 아버지 몰래 빼돌려 사 주시기도 하셨다. 쌀 한가마니는 먹고살기도 힘든 때에 어마어마한 큰돈이었다. 나중에 참고서를 다 베끼고 나서 다시 책을 팔아 채워두긴 했지만, 만약 아버지에게 들키는 날에는 초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창현도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항상 느끼고 있어서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이렇게 창현에게 어머니는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별한 분이었다.

이런 어머니와 이별을 하고 일본에 간 창현은 거기에서 먹고살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야간학교에 들어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나갔다. 석탄운반 작업을 하고 비행기 부품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학교는 1주일에 세 번 정도 나갔다. 때로는 분뇨수레를 끌고, 파친코가게에서 청소를 하고, 고철장수 등 힘겹고 고된 노동을 하며 학업에 정진했다.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다닐 때에 후쿠오카(福岡)만이 미군 B-29의 폭격을 받아 시내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그때는 다행히 운이 좋으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어디에 있든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무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중학생까지도 동원이 되어 새까만 숯덩이가 된 끔찍한 시체들을 치워야 했다. 어제 시신을 치우던 사람이 오늘은 시신이 되어 있고, 오늘 그 시신을 치우는 사람이 내일은 시신이 되어 누군가에 의해 치워지고 있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일상적인 죽음 앞에서 목숨에 대한 집착마저도 없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종전이 되자 일본 전체는 가치관의 혼란에 빠졌다.

1945년 8월 고향을 떠난 2년 후 창현이 16살일 때,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창현은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고향에 가 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창현은 힘들기는 해도 여기에는 미래로 가는 빠른 길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항구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나르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갔다. 석탄 때문에 새까맣게 된 학생복을 입고 학교에 가면 지나가던 아이들이 “조센징, 더러워”라며 놀렸다. 창현은 그럴 때 마다 어떻게든 대학에 가야한다고 다짐했다.

창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소년항공병으로 가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선인은 그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서는 육군 소년항공병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준비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는 바람에 그 꿈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창현이 고등학교 때는 화가를 꿈꾸었지만 모두 현실과 맞지 않아 다 포기하고 우선 먹고사는데 몰두해야 했다. 미군 불도저를 따라다니다가 배운 영어 실력으로 미군을 상대로 린타쿠(인력거)를 끌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요코하마(橫浜)에 가서 그 일을 시작했다. 워낙 몸이 허약해서 오르막길에서는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려야 했다. 그래도 영어를 조금하는 바람에 미군들 사이에 인기가 좋아서 좀 더 많은 돈을 벌수가 있었다.

어느 날 일을 끝내고 사장에게 린타쿠를 반납하러 가려고 하는데, 체격이 거대한 흑인 병사가 창현을 불러 세웠다. 다가가서 보니 단골손님인 톰이었다. 슬픔에 가득 찬 표정으로 창현에게 술 한 잔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톰은 창현을 근처의 고급 바(Bar)로 데리고 갔다. 둘이는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뭐 마실래? 진보이 이니까 진으로 할래? 이봐, 진 보이. 사실 나는 내일부터 한국전쟁에 참가해야 돼. 한국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은 이제 돌아 올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야. 내가 인간으로서 보낼 수 있는 밤은 오늘이 마지막이야. 나는 내일 죽을지도 몰라. 내가 가지고 있어도 죽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돈이야.”

“미스터 달러, 이젠 진보이의 사랑을 받아!”

톰은 돈을 보며 그렇게 말하고서는 지폐다발을 창현의 주머니에 힘껏 찔러 넣었다. 물론 이 돈은 형편이 어려운 창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몇 년간 인력거를 끌면서 돈이 모이자 창현은 교사가 될 결심을 하고 메이지(明治)대학 영문과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이때가 1951년 창현의 나이 22세가 되는 해였다. 당시 치바(千葉)의 코노다이(國府台)라는 곳에는 일본 육군의 막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부성은 그중의 하나를 집도 없고 잘 곳도 없는 동경 주변의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개방해주었다. 그 숙소에는 창현을 포함해서 가난한 학생들이 30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 다니며 생활하고 있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창현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 3학년 때에 교직과정을 이수해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교사자격을 따자마자 담당 교수에게서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고 앞이 깜깜했다.

“자네는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땄다고 해도 채용이 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자격증은 쓸모가 없는 거야.”

죽을힘을 다하여 배운 공부가 이렇게 허사가 되자 창현은 실의에 빠졌다. 교사의 꿈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허탈감과 상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꿈이 있고 희망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달려갈 목적지를 향에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이겨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달려 갈 곳이 없고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한 목표가 사라졌다. 참으로 앞날이 암담했다.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다

너무나 큰 실의에 빠져 정신이 반쯤은 나가있던 창현은 길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골목에서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2층 양옥집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마치 벼락처럼 한순간에 창현의 머리를 때렸다. 그 피아노 소리는 창현에게는 아이카와 선생님의 바이올린 소리같이 들렸다. 그 바이올린 생각에 창현은 메이지대학 뒷골목의 고물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창현은 고물상에서 중고 스즈키 바이올린 4호를 샀다. 비록 싼 것이지만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자기만의 바이올린이었다. 그때의 추억을 떠 올리며 공원으로 가서 아이카와 선생님한테 배운 ‘고조노 스키’ 노래를 켜 볼려고 하는데 도래미파의 음계마저도 켤 수가 없었다. 창현은 그길로 바이올린 교실을 찾아가 2천 엔의 거금을 내고 수강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날 이후 모든 것을 잊고 바이올린에 푹 빠져 지냈다. 밤중에는 숙소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습한 적도 있었다. 당초에 바이올린으로 밥을 먹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바이올린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어쨌든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아무런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창현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에 어느 강당 앞에서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강연회 간판을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글씨에 끌려 그 강연을 듣게 되는데, 그 강연회는 도쿄(東京)대학의 생산기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이토가와 히데오糸川英夫’ 교수가 세계 최고의 명기로 불리는 바이올린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의 소리는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신비이며,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인간이 로케트를 만들어 달로 쏘아 보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제작 기술은 20세기 최첨단으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300년 전과 같은 재질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제작 기술을 제자는 물론이고 자식에게 조차도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 비법 같은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현대사회에서 이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7-18세기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Cremona) 지역은 바이올린의 명산지였다. 당시에 는 유명 기술자인 아마티Amati, 구아르네리Guarneri, 스트라디바리Stradivari라는 3대 명 장들의 손에 의하여 바이올린이 제작되고 있었다. 이들이 제작한 바이올린은 세계 최 고의 명기로 불리며 4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요즘 이런 명기는 까이에서 보는 것조차도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대학 4학년인 창현은 그 ‘불가능’이라는 말에 온몸에 전율을 느끼는 큰 자극을 받았다. 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꿈은 누구나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다. 그리고 인종을 차별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조선인이 꿈을 철저히 짓밟는다. 꿈을 가로막는 나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창현에게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도전해 보자.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대한 도전이라면 일본도 그 누구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일은 일생을 걸고 착수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후회도 하지 않겠다. 내가 가야할 길은 오직 이 길뿐이라고 마음속에 굳게 다짐을 하였다.

그리하여 창현은 ‘그 세계 최고의 명기를 내가 만들겠노라’는 새로운 꿈을 품게 되었다. 그는 마치 깜깜하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그에게 신의 계시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데에 일생을 걸기로 결심하였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잘못도 없이 꿈을 좌절당하고, 희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신의 운명 앞에 정면으로 맞서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면 이 길이 내가 운명처럼 가야할 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현은 이를 계기로 인생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을 새로이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보다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이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한 많은 제작자들이 너무도 힘들고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해버린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적인 길이라 믿고 되었다.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서자, 그길로 대학 앞의 시모쿠라(石橋) 악기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가 산 바이올린 스즈키 4호는 핸드메이드가 아니고 기계로 찍어낸 바이올린이었다. 거기에서는 레벨이 다른 11호가 가장 고가였다. 그는 조금씩 욕심을 내어 4호를 되팔고 6호를 사는 식으로 점차 레벨을 높여갔다. 그리고 중고 독일제 바이올린을 또 하나 사서 서서히 음감을 채득해 나갔다. 그때 창현은 이미 눈을 감고 한번만 소리를 들어 보아도 어떤 것이 뛰어난 바이올린인지 분명히 식별해 낼 정도로 바이올린소리에 귀가 열려 있었다.

창현의 의지가 굳은 것을 안 악기상은 창현에게 장인명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바이올린 제작자 협회의 회원명부 이었는데, 그렇게 엄청난 제작자들이 있음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악기 상인들은 창현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모르지만, 그 걸로 밥 먹고 살기는 힘들 걸세. 바이올린 장인은 꽤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성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네. 나머지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모두 생활하기도 어려운 형편일 걸세.”

조선인 이라는 벽은 너무도 높았다

그 다음부터 창현은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이타바시(板橋)의 오오야마(大山)에 사는 85세의 장인이었다. 시모쿠라 악기 상점에서 선생님께 찾아가 보라고 추천을 해줘서 왔다고 했다. 사실은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제자가 되어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겠다는 말에 그 나이 든 장인은 매우 반가워하였다.

“그래 실은 제자를 구하고 있었네. 광고도 냈지, 어째든 잘 왔네.”

창현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 노인장인은 아들이 하나있는데 아들이 기술을 배우려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얼마 남지 않았어. 자네가 제자가 되어주면 도구들과 재료를 모두 자네에게 주지. 괜찮다면 내 제자가 되어 주게나, 우리 집에 방이 네 개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런데 자네는 고향은 어디인가?”

창현은 너무나 기뻐서 솔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태어난 곳 말입니까? 태어난 곳은 조선의 김천이라는 곳입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미소가 가득 번져 있던 노인의 얼굴색이 갑자기 흐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구들을 다 주겠다고, 이곳에서 함께 지내면서 일을 배워도 좋다고 흔쾌히 말하던 노인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네, 미안하네.”

노인은 금세 말을 바꾸었다. 이후 이런 일은 다른 바이올린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그는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단지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거절당한 것이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의욕도 점차 잃어 갔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세계도 혹독했지만 그것을 만드는 기술자의 세계 역시 나름대로 혹독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음으로는 최고의 바이올린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그런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기필코 성공을 거두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지만 계속해서 거절을 당하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악기 상점에서는 지방의 몇몇 장인들을 더 소개해 줬지만, 창현은 동경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우선 학교를 졸업해야 했고, 또 연락이 두절된 고향의 소식을 주워듣기라도 하려면 사람이 많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1955년 26살에 창현은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고, 취직자리가 없어서 파친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가끔 요코하마(橫浜)로 찾아가 ‘하와이’라는 다방에서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이 음악은 3부 중 1부는 억압할 수 없는 울분이, 2부는 목메어 우는 애수가, 3부는 집시 특유의 광적인 환희로 돌변하는 스페인 집시들의 선율을 표현한 음악인데,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이 곡을 무척 좋아했다. 영어표기로는 ‘Gypsy Airs'라고 부르는 이 곡은 유랑민 집시 출신인 사라사테Sarasate가 작곡한 것으로 집시들의 애환과 열정을 애절하게 표현한 유명한 곡이다.

그러던 어느 날 때마침 아사히신문(朝日新聞) 3면의 기사를 보고 ‘바로 이거야’ 하며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한 농부가 신슈(信州) 나가노현(長野縣) 나카노(中野)시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이 사람에 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 사람은 징병되어 하얼빈으로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소총을 메고 거리를 걷다가 아름다운 음색이 귓속을 파고들어 발길을 멈추었다. 소총을 맨 채로 소리 나는 집을 방문하자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유태계 러시아인은 무장한 병사가 방문하자 혹시나 체포당하는 것은 아닌지 깜짝 놀라면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저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요.”

“아닙니다. 당신을 잡으러온 게 아니라 당신의 바이올린 음색이 너무 좋아서 어떤 바이올린인지 구경 좀 하려고 왔습니다.”

그가 떨면서 내민 바이올린은 세계적인 명기로 알려져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그 바이올린은 러시아 황제의 궁전에서 사용하였던 귀족의 바이올린이었다. 그 이후 그 병사는 그 집을 자주방문하면서 그 바이올린 형태를 종이에 복사했다. 그리고 그 종이를 기름종이로 싸서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중국 전역을 전전하고 다녔다. 전쟁이 끝나자 그 복사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제 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창현은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기뻤다. 창현은 이런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나를 거절하지 않겠지 생각했다. 그날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배낭과 침낭을 짊어진 채 나가노로 향했다. 무척 큰 기대를 걸고 찾아갔지만, 자기는 농사꾼이라서 농한기인 겨울철에만 만든다고 지금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창현은 하는 수없이, 그곳에서 고철장수를 하며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이 찾아와 눈이 60센티미터 정도 쌓인 어느 날 다시 그 과수원을 찾아가 보았다.

정말 그 사람은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에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 건 그렇게 말하면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창현이 화를 참으며 애절하게 매달려 부탁을 했다.

“그렇다면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그 설계도를 보여주실 수 있나요?”

반년 동안이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했던 듯 설계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그 농사꾼은 이런 충고까지 해주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이런 일을 하면서 먹고살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그만 두는 게 좋아”

창현은 다시 또 다른 바이올린 장인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마쓰모토(松本)지역의 아사히쵸(旭町)에 사는 ‘스즈키시로鈴本四郞’라는 장인을 찾아갔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은 어딜 가나 거절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1년만이라도 좋습니다. 부디 가르쳐주십시오.”

“우리 바이올린은 꽤 고급품을 만들고 있고 오래전부터 일하고 있는 제자도 있네. 제자는 더 이상 받지 않을 생각이야.”

이렇게 말한 그 장인은 지금까지의 사정을 듣고 안됐다고 생각했는지 창현에게 공작용 칼과 작은 대패를 한 개씩 내주었다. 고마움을 표하고 공장을 나오다가 창현은 눈앞의 바이올린 제작용 목재 더미를 바라보며 생각 없이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 재료는 어디에서 구하는 거죠?”

그런데 이 질문은 창현의 인생을 결정짓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 장인의 대답이 훗날 창현이 바이올린 제작의 길을 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창현의 질문에 장인은 숨기지 않고 솔직한 대답을 해 주었다.

“바이올린 안쪽에는 나뭇결이 있지, 이걸 보게.”

“자, 언뜻 보기에도 좋은 나무 같지 않은가. 바이올린 제작은 재료 선택부터 시작되는 거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바이올린의 재료는 이 부근에서는 에치고(越後)의 니가타(新潟), 특히 나가노현과 경계를 이루는 에치고 이쓰카 마치(五日町) 정도야. 신슈 쪽이라면 시가(志賀) 다카하라(高原)에서 니가타(新潟)와의 경계 부근에 있는 이와스게야마(岩菅山) 기슭의 나무가 유명하지. 열림서(營林署)에 가면 많이 있어.”

창현은 이 말을 가슴 깊이 담고 그길로 영림서에까지 가서 나무를 구해왔다. 그리고 다시 시로 장인을 찾아갔다.

“제가 구한 재료로 만들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다시 한 번 간청하였으나 그래도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장인은 창현에게 기소 후쿠시마(木曾 福島)에 있는 스즈키(鈴木) 바이올린 공장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소개장도 써 주었다. 단순한 정보였지만 창현에게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창현은 기소의 스즈키 공장으로 가기 전에 신슈 근처를 유랑하다가 마지막으로 공장 몇 군데를 더 찾아가 봤다. 이다(飯田)의 공장, 스와(諏訪)의 공장, 나고야(名古屋)의 스즈키 공장, 기후(岐阜)현 다지마(多治見)의 스즈키 공장, 그리고 교토(京都)에 있는 바이올린 기술자로 유명한 미네자와峰澤峯三 선생의 문도 두드렸지만 모두 허사였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는 정말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담장 너머로 훔쳐보며 기술을 배우다

1957년 8월 여름 창현은 하는 수 없이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기소후쿠시마로 향했다. 이때 창현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런데 기소후쿠시마에 도착하고 나서도 공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 하면 거기에서까지 거절을 당한다면 이젠 더 이상 두드려 볼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바이올린의 꿈을 완전히 접는 것을 의미했다.

사흘이나 기차역에서 잠을 자고 방황하며 망설이다가 마침내 공장을 찾아갔다. 시모죠 보우노스케下條 房之助라고 하는 사장에게 스즈키시로 선생의 소개장과 명함을 내밀었다. 채용 여부는 공장의 간부회의에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틀 후에 다시 찾아가니 공원들마저도 조선인을 싫어한다고 했다. 이 공장에서도 결국 거부를 당했다.

이제 장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길도, 바이올린 공장에 취직하는 길도 모두 막혔다. 하지만 창현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머릿속엔 바이올린이 떠나지 않았고, 자신의 손으로 바이올린을 만들게 될 날만을 기다렸다. 일단 그는 특별한 방법이 없으므로 역전을 배회하며 그곳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고마운 경찰의 도움으로 공장 근처에 있는 미다께(三岳)의 임도(林道)공사 현장에 일자리를 구하고 바이올린 공장 바로 옆에 처소를 마련하였다.

임도공사장에는 벌목한 단풍나무 가문비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토목공사 일을 하면서도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많이 모아 두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겨울이 되어서 토목공사가 중단되면 바이올린을 만들어 볼 심산이었다. 그래서 좋은 나무를 발견하면 회사의 트럭을 이용하여 그것을 운반하고 회사에서 운영하는 제재소에서 바이올린 제작에 적합한 두께로 잘라서 창고 한 모퉁이에 모아 두었다.

창현은 산을 내려올 때마다 한 달에 한번정도 공장을 찾아갔다. 그럴 때에는 항상 선물로 바이올린 재료가 될 나무를 가지고 갔다. 공장 사장은 정말 좋은 재료라고 좋아하면서도 창현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 대신 재료를 사주어 꽤 괜찮은 장사가 되었다. 단풍나무는 2천 그루에 한그루는 나뭇결이 좋은 아름다운 것이 나온다. 이런 것은 보통 단풍나무보다 30배나 더 비싸다. 이런 목재 조달은 그에게 일석이조의 재미있는 일이었다.

겨울이 되어 쉬는 동안에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으로 가서 창가에 붙어 서서 공장 안을 들여다보며 바이올린 제작과정을 눈 여겨 보았다.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눈으로 훔쳐보고 배워야 했다. 이렇게 눈으로 훔쳐보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담장너머로 몰래 훔쳐보고 있기만 해도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의 동료처럼 느껴져서 고독을 달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창현에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공장에서 누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잘 봐 두었다가 퇴근할 때 선물을 주며 말을 걸고서 친분을 쌓은 뒤에 그 사람의 집을 방문하여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기술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 시기에 대부분의 공원들은 공장에서 받는 급료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집에서도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집에 찾아가면 어떤 도구로 어떤 식으로 만드는 지를 어께 너머로 배울 수가 있었다.

창현은 궁금하여 공원들에게 수제 바이올린 제작을 위한 책 같은 건 없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아마 그런 책은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창현은 속으로 일본어로 된 책은 없더라도 영어로 된 책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나중에 중고 서점에 찾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기술자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어쨌든 바이올린 제작은 직접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책을 이용해 아무리 공 부를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어요. 실재로 몇 개, 몇 십 개를 만들어 보아야 비로소 비 결을 파악할 수 있죠. 무슨 일이든 기술은 이론 보다 경험입니다. 한두 개 만들어 보아 서 설사 꽤 쓸 만한 소리가 난다고 해도 바이올린을 팔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한두 개 로 갑자기 상품 가치가 나오는 일은 있을 수 없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많이 만들어 보 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술자의 이 말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경험을 쌓지 않고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수많은 실수를 경험하면서 초보자의 냄새가 사라져야 세련되고 멋진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말이었다. 창현은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언젠가 나도 바이올린을 직접 만들어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와 도구도 하나씩 마련해 나갔다. 그런데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봄이 되자 산속에 나무기둥을 세워 오두막집을 만들었다. 오두막을 지은 땅은 회사 소유지였다. “자네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니 그냥 눈감아 주겠네”하면서 허락을 회사간부가 해주었다. 회사에서는 다른 인부들에 비해 창현이 정직함을 알고 현장 인부들의 야간작업 관리장부까지 맡겼다. 나중에는 측량하는 일을 돕다가 현장 감독까지도 맡게 되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료와 도구들을 가지고 밤새 씨름을 했다. 주로 여름철에는 일을 하며 돈을 모으고 겨울철에만 바이올린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렇게 만들고 부수기를 수십 번, 각고의 노력 끝에 1958년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첫 번째 바이올린을 탄생시켰다. 주먹구구식으로 익힌 부분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만들어낸 것이다.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담장너머로 기술을 훔쳐보며 바이올린을 만들어 낸 자신이 너무도 대견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들고 첫 음색을 내보았을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극히 작고 미숙한 출발이었지만 매우 뜻깊은 첫걸음이었다. 토목공사판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제1호를 탄생시키자 바이올린 제작에 붙은 그의 열정은 쉽게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바이올린을 만들어보겠다고 벼르기만 할 때는 잘 몰랐었는데, 일단 한번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나자 도저히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공사장에 나가는 일을 줄이고 바이올린 제작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바이올린 제작에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해 그는 회사에서 일손이 모자라 급하게 부탁할 때만 겨우 나가서 일을 거들었다. 그는 대신에 댐에서 물을 방류할 때 쏟아지는 자갈을 채취하여 돈을 벌었다. 그 일은 적은 시간으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문이 열리고 난후 시간이 되면 자갈채취장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가능한 짧은 시간 동안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더 많은 시간을 바이올린 제작에 쏟아 붙기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일반 인부의 일당이 450엔인데 자갈은 1입방미터에 500엔에 매입해 주었다. 자갈을 많이 모을수록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 그는 여기에 목숨을 걸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죽어라 자갈을 채취했다. 하루에 무려 20입방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퍼내기도 했다. 체구가 크지도 않은 그가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을 보고서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그래서 한때 그는 ‘100마력’ 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렇게 돈을 벌면서 그는 빠르게 제2호, 제3호 바이올린을 만들어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상한 취급을 받든 말든 혼자서 오두막집에서 바이올린을 만들며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았다.

새로이 바이올린을 만들 때마다 날로 소리가 좋아지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 벅찬 흥분도 느꼈다. 한 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밥 먹는 일도, 잠자는 일도 잊고 미친 듯이 바이올린에만 매달리게 되어, 한때는 동네에서 이상한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도 했다. 혼자서 바이올린을 만들다가 잘 안 되면, 기차역에 진열된 바이올린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히 봐두었다가 집에 돌아가서 그대로 해보곤 했다. 이곳 기차역에는 바이올린 고장답게 항상 바이올린을 기차역에 전시해 두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린이용 바이올린에서 성인용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10여 개의 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전시된 바이올린이 아무리 기계로 만든 것이라고는 해도 그가 만든 바이올린보다는 무척 세련되어 보이고 훌륭해 보였다. 그것은 창현의 입장에서는 참고서 대용으로 상당한 도움이 되는 교재였다.

11살 연하의 아내를 맞이하다

창현은 어떻게든 최고의 바이올린을 만들려고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했다. 어떤 때는 이삼 일을 잠을 안 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늘 고민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세공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생각하고 바이올린 진열장 앞에 주저앉아 수없이 고민했다. 이렇게 훌륭한 바이올린 제작을 꿈꾸던 청년 창현은 좋은 도구를 사기 위해 기소 후쿠시마 이웃에 있는 아게마쓰마치(上松町) 마을의 골동품 상점에 가게 되었다. 그 가게에는 일본도, 투구, 갑옷 등도 진열되어 있는데, 꽤 멋지게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처음엔 쓸 만한 도구를 찾지 못해서 그냥 돌아왔다. 대패가 필요해진 창현은 오랜만에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날은 상점에 들어가 말을 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인가 주인을 부르자 한참 후에 뒷문 쪽에서 20세 정도의 아리따운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 골동품가게 주인(제일교포)의 딸이었다. 이때 그 처녀는 손으로 기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운 옷을 입은 처녀의 모습이 창현의 마음에 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수줍어 하는 그녀가 정말 귀여워 보였다. 창현은 그때가 그녀를 여성으로 의식하게 된 첫 순간이었고, 처음으로 그녀를 보고 가슴이 설레었었다. 잠시 머뭇거린 끝에 창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이없게도 자기의 이름이었다.

“저는 진창현이라고 합니다.”

“어머, 중국인이세요?”

“아뇨,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이남이(李南伊)라고 해요.”

창현은 그날 그녀의 아버지가 외출중이라서 덕분에 그녀를 만났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후 창현은 자주 그 집에 드나들면서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무려 32차례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어느 날 자갈을 퍼 올리는 일을 끝내고 집에 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 봤더니 문 앞에 그녀가 와있었다. 그녀는 창현의 방에 바이올린 제작을 위해 마련한 재료와 도구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보고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창현이 만든 바이올린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기도 하였다. 창현은 그녀에게 ‘내가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이후 둘이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때 이들이 사랑을 전하러 다니던 이 길을 훗날 기소시에서 “사랑의 길”로 명명했다.

이렇게 오두막을 오가며 정이 쌓이자 창현은 마음씨 고운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바이올린에 미친 정신병자로 통하고 있던 창현과의 결혼은 아버지의 반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창현은 32살의 나이에 11살이나 아래인 옥녀와 1961년 3월 3일 기소 후쿠시마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오두막으로 시집 온 그의 아내는 ‘미친놈한테 시집온 이상한 여자’라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생활이 나아질 것은 없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수문이 열리면 부부가 함께 댐에 가서 자갈을 퍼 올려야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도망가리라고 생각했던 아내는 도망은커녕 불평 한마디 없이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집안에 틀어박혀 가게 일만 돕고 지내던 그녀가 댐에 나가 큰소리로 떠들며 자갈을 퍼내는 일은 색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즐거운 일인 듯 했다.

그들이 사는 오두막집은 무허가집이라서 수도가 들어올 수가 없었다. 여름이 되자 물에 문제가 생겨 아내는 설사로 한 달 넘게 고생을 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한 창현은 뭔가 대책을 강구하여야 했다.

처음으로 작품 하나에 3,000엔씩을 받다

결혼 후 거의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창현은 그때까지 40개 정도의 바이올린을 완성하였다. 초기의 작품이라 완성도가 떨어져 부셔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그의 아내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부수지 말아요. 괜찮은 것만 골라서 도쿄에 가서 팔아 보는 게 어떻겠어요?”

아내의 말에 공감한 그는 괜찮아 보이는 10개 정도를 골라 골판지 상자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도쿄 아사쿠사(淺草)와 간다(神田) 등의 악기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악기점은 모두가 냉정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이름도 없는 그의 악기에 관심이 없고, 외면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 한 개만이라도 팔고 오기를 기다리는 아내 생각에 많은 곳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악기 브로커인 다카기高木 씨를 만나 당시 일본 바이올린계의 3대 거장중의 한명인 도호가쿠인(桐朋學園) 대학의 ‘시노자키 히로쓰구篠崎弘嗣’ 선생을 소개받게 되었다.

시노자키 선생을 만난 것은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안고 찾아간 시노자키 선생은 그의 바이올린을 들고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멀리 떨어져 보기도하며 표면의 칠과 광택을 확인하고, 실제로 연주를 해보면서 소리를 점검했다. 창현은 시노자키 선생이 바이올린을 살펴보는 동안 침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바이올린 열점을 세심하게 살펴 본 시노자키 선생의 평가는 간단했다.

“소리가 꽤 좋군! 한 대에 3,000엔씩 좋다면 전부 사겠네.”

“이것은 성인용으로는 다소 부족하니 어린이용으로 만들어 가져오면 모두 다 구입해 주겠네.”

가격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찌되었든 상관없었다.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바이올린이 상품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점이 너무 기뻤다.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이제는 바이올린에만 매달려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바이올린 장인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도쿄에서 기소까지는 편도 8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너무나 기뻐서 어떻게 집에 오는 줄도 몰랐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껑충껑충 뛰며 기뻐서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서로 얼싸안고 방안을 빙빙 돌며 춤을 추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시노자키 선생은 당시에 일본 바이올린계의 3대 거장 중의 한 분이었다. 시노자키 선생은 우리나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선생과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洪蘭坡) 선생과도 도쿄음악대학의 동기생이었다. 특히 홍난파 선생과는 함께 하숙을 하고 아사쿠사(淺草)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시노자키 선생이 바이올린을 구입해 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내심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지난 뒤 한통의 엽서가 날아들었다. 토호학원의 시노자키 선생이 보낸 이 한 장의 엽서는 창현을 바이올린 장인의 길로 초대하는 초대장이자 동시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많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노자키 선생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고, 그리고 만드는 대로 모두 다 구입해 주었다.

창현은 1961년 10월 시노자키 선생의 권유로 도쿄에서 가까운 마치다(町田)시 가나모리(金森)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월세 5,000엔짜리 창고에 살림집을 마련하였다. 거기에서도 열심히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그러나 손으로 만드는 바이올린의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손이 빠른 장인도 1주일에 한 대를 만드는 것이 한계였다. 이때 샐러리맨의 초봉이 5만 엔이었던 시절에 일주일에 한 대씩 만들어 팔아도 한 달 수입이 고작 1만 2천 엔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수입으로는 사실 식비를 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잠을 줄여가며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바이올린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나중에는 1주일에 여섯 대까지도 만들어낼 정도였다. 그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바이올린을 만든 적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없었다. 생활비를 위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수의 바이올린을 만들어 낸 것이었지만, 이 일이 결과적으로 바이올린 제작 실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무수히 들었던 말이 있었다.

“어쨌든 많은 숫자를 소화해라. 그러면 자연히 보이게 된다.”

기술은 머리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그리고 손가락의 감각으로 깨우치는 것이었다. 결국 얼마만큼의 경험이 있는가 하는 것이 기술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을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매일 새벽 두세 시까지 땀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이렇게 바이올린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느끼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것이었다.

시노자키 선생은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스미 사부로鷲見三郞 선생이나 스즈키 교쿄鈴木恭子 선생도 소개를 해 주었다. 덕분에 바이올린 가격도 3천 엔에서 4천 엔으로 올라 생활이 나아져 갔다. 마치다로 이사를 온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아이 창호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자 비로소 가정다운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시노자키 선생의 근무처인 도후가쿠인대학 근처에 월세 3천엔짜리 도영주택(都營住宅)으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거의 매일 2-3시까지 진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진창현은 이때가 가장 고통스러웠으면서도 가장 즐거웠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3천엔짜리로 동경예대에 합격하다

1965년 3월 어느 날 예상 밖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그가 제작한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東京藝大)에 합격한 학생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동경예대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명문 예술대학으로, 거기에 시험을 치르려는 학생들은 대개 유명 메이커의 고가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그런 상황에서 진창현의 바이올린으로 시험을 친 학생이 합격했다는 것은, 그의 바이올린의 음질이 유명 메이커 바이올린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 셈이었다. 훗날 3천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도쿄예술대학의 학생이 된 이 사람(시라이)은 언젠가 문득 라벨을 보고 진창현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다음 일부러 인사를 하기위해 찾아 왔었단다. 그때 창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30년쯤 지난 뒤에, 진창현은 다시 그 사람을 만나 그 바이올린을 되사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바이올린 몸체 안에 붙어있는 라벨을 f홀 구멍으로 들여다보자 1962년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진창현의 초기 작품이었다. 창현은 그 고생했던 시절의 그리움이 밀려들어 그 바이올린을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그 사람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만약 바이올린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제게 되파시겠습니까?”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이건 팔 수 없습니다. 제게도 기념이 되는 바이올린이니까요.”

그 어려운 시절에 바이올린을 만드느라 고생하던 일이 잠시 생각이 났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은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판이 조금이라도 두꺼워지면 바이올린의 생명인 음의 울림이 나빠진다. 음을 좋게 하기 위해서 판을 얇고 가볍게 하면 이번에는 강도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이것은 바이올린의 수명과 직결된다. 이 모순 사이의 어느 한 점을 선택하느냐가 바로 장인의 탁월한 능력인 것이다. 바이올린은 운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노력과 집념 그리고 실험과 시행착오가 거듭 쌓여 토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바이올린을 만드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이요 수많은 난관을 부딪쳐 이겨 내야 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이런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역시 바이올린 제작은 어려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어.”

그러나 창현은 끈기 있게 이 일에만 매달렸다. 매일 매일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만든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는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마침내는 자신이 제작한 악기를 판매점에 당당하게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 특별히 주문하는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자꾸만 늘어가더니, 마침내 이곳저곳의 악기점에서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 주문을 해 오기 시작했다. 동경에서 바이올린 제작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여 온지 6년 만에 비로소 자리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그사이에 아이가 둘이 더 태어났고 창현의 나이 서른여덟이 되었다. 그의 실력은 나날이 향상되어 시노자키 선생마저도 놀랄 정도였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엄청난 차이야.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제작하는 것인가?”

그래도 그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앞에 가로 막고 있는 장벽을 깨트려버리려고 노력했다. 대학생활 때 이토카와 교수가 말한 “잃어버린 기술(Lost Art)”은 어둠 속에서 바늘을 찾듯 독자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창현은 어떻게든 한 발짝씩 다가가기 위해서 끝임 없이 자료를 찾아 나섰다. 혹시 외국서적에는 그 소개내용이 있지 않을까 하여 외국 서점까지 다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150년 전에 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 책은 ‘헤론 알렌Heron Allen’이라는 사람이 쓴 “바이올린 제작의 어제와 오늘-Violin making as it was, and is”이라는 책이었다. 그러나 바이블 같은 그 책에도 해답은 없었다.

18세기 이태리의 천재적인 거장들은 위대한 명기를 남겼지만 이것은 단순히 이태리인들의 예술적인 기량과 감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소재들이 흘러 들어왔고 그것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창현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재를 찾아 수많은 여행을 다녔다. 끊임없이 칠의 색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시행착오의 반복이었다. 바이올린의 니스로 이용되는 색소 중에서도 황색과 적색은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네팔, 베네수엘라, 르완다, 콩고, 에티오피아, 멕시코나 페루의 인디오 마을과 아마존의 정글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색소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오징어 먹물, 어린 아이의 변, 지렁이 까지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왜 그런 연구와 실험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답했다.

“실험의 모토는 감각 기능을 최대한 키우자는 것 이었어요. 눈과 귀, 손과 코로 물질을 탐구하고 그것도 안 되면 혀를 썼습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꾸 반복하다 보면 오감(五感)이 예민하게 발달합니다.”

좋은 바이올린은 콘서트홀의 맨 뒷줄까지도 소리가 분명하게 전달된다. 어떻게 하면 그런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을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밤을 새웠다. 그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술자의 기술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때까지 갈고 닦아야 완성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베일 속에 감추어진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제작의 비결은 찾을 수가 없다. 그 명기는 스트라디바리가 제자에게도, 친자식에게도 제작 기술을 전수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최고를 자랑하며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 되고 난 후, 1968년 10월에 진창현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25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 열네 살 때 어머니의 품을 떠나 25년 만에 39살의 나이로 어머니 품에 돌아와 안기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한국 땅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지난 세월 창현의 가슴에 사무쳤던 그리움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경주 불국사에 갔을 때 어머니를 등에 업고 계단을 올랐다. 어머니는 등에 업혀서 지금 이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기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1970년 오사카만국박람회가 개최될 때와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에 어머니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나름대로 효도를 하였다. 창현은 어머니에게 무엇이든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받고 싶은 것은 묘지와 수의 두 가지뿐이었다.

창현은 어머니의 소원대로 묘지와 수의를 사드리고 금반지도 하나 사서 손가락에 끼워드렸다. 이제 당신에게도 아들이 있다고 당당히 남들에게 보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면서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때마다 자꾸 눈물이 나왔다.

창현이 고국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시국이 어수선하여 북한의 무장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마을 여기저기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어둠 속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의 이복형과 그 아들이 창현을 간첩혐의로 신고를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밤을 세워가며 취조를 받고도 무사히 풀려나긴 했지만, 창현이 25년 만에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찾아온 조국인데, 그를 그렇게 대접하고 쓸쓸하게 돌려보낸 고국의 현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때 마음고생이 너무 컸던 창현은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창현은 더욱더 바이올린에만 매달렸다. 일본에서는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한국에서는 간첩 용의자로 대접받은 그가 기댈 곳은 오로지 바이올린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를 인간으로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바이올린 하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오로지 ‘바이올린 메이커 진창현’이 되어야 했다.

한·일 간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시노자키 선생과 음대 동창생인 안익태(安益泰) 선생은 스페인에서 일본으로 연주회 지휘를 하러 올 때 마다 망가진 현악기들을 창현에게 맡겼고, 창현은 그것을 정성을 들여 고쳤다. 그래서 그때 안 선생과 많은 교분을 쌓고 있었다. 창현이 훗날 고향 어머니를 만나니 ‘넌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을 하길래 외국에서 온 지체 높은 양반이 나에게 그렇게 큰돈을 쥐어주느냐?’고 말씀하시더란다. 안 선생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그렇게 창현을 도와주셨다고 한다. 당시엔 한일 간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라 한국으로 송금하기 힘든 실정이라 몇 번 부탁을 드렸었는데, 알고 보니 안 선생은 서울에 들를 때마다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본점)로 창현의 모친을 불러 사례를 했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그의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가 점차 올라가고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1974년에는 미국에서 발행된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는 제목으로 그의 바이올린 제작활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일본판과 한국판으로도 번역되어 나왔다. 이를 계기로 그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바이올린의 가격도 점점 올라가 한 대에 50만 엔이라는 가격이 붙게 되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350만 엔을 주고 구입한 바이올린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자기의 바이올린이 합주를 하면 왠지 모르게 다른 악기의 소리에 묻혀 버린다고 하면서 창현의 바이올린과 비교해 연주를 해보더니 그 자리에서 150만에 구입해 가기도 했었다.

대부분 콩쿠르에 나갈 정도의 학생들은 테크닉에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악기의 질이다. 심사위원이 아닌 사람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연주가 우수한지 아닌지를 즉시 알 수 있다. 바이올린 한 대가 그 정도의 차이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좀 더 좋은 악기를 찾는다. 하지만 좋은 바이올린 일수록 가격이 비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부모들에게 바이올린 교사들은 ‘진 선생한테 가서 조성을 받아보십시오.’라고 충고를 해줬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창현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어떤 사람은 음색이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창현은 약간의 조정만으로 바이올린의 소리를 세배의 가격이 붙는 바이올린의 소리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날로 창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열심히 제작에만 매달려야 했다. 창현이 일에만 매달려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이상하게 가슴이 무거워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다가와서 말했다.

“여보, 마음 단단히 하고 들으세요.”

“아가씨한테서 지금 연락이 왔는데, 어머님이 조금 전에 운명하셨대요.”

창현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서 부산으로 갔다. 어머니는 전에 창현이 사드린 수의를 입고 주무시는 듯이 누워 계셨다. 어머니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여동생이 옆에서 오열했다.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창현은 어릴 때처럼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릴 적에 맡았던 어머니의 향기가 났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논둑길을 달려 소달구지를 쫓아오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뒤로하고 떠나온 그 길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창현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손에 쥐어주셨던 작은 칼을 어머니의 관속에 넣어드렸다.

그리고 창현은 어머니 귀에 속삭였다.

“제가 언젠가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게 될 날까지 이번에는 어머니가 가지고 계세요.”

어머니는 1976년, 향년 77세에 그렇게 돌아가셨다. 이때 창현의 나이 47세였다. 아들을 떠나보내 놓고 평생을 가슴 태우며 고생한 어머니는 정작 아들이 무엇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들어보지도 못하신 채 눈을 감으신 것이다. 그래서 창현은 그것이 한이 되어 그가 만든 바이올린가지고 어머니 묘에라도 가서 보여드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봉선화’라는 노래를 켜드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3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가지고 어머니 묘를 찾을 수 있었다. 누이동생과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참석한 그 자리에서 창현은 아들과 함께 바이올린으로 ‘봉선화’를 어머니에게 연주해 드렸다.

“어머니, 들리세요? 어머니께서 늘 좋아하시던 ‘울밑에 선 봉선화야’라는 노래예요. 여기 어머니의 아들과 손자가 연주하고 있어요.”

제작자 콩쿠르에서 5관왕에 오르다

마침내 진창현의 명성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1976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최고 행사인 ‘제2회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 대회에까지 초대되었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제작자와 최고의 장인들이 초대되는데, 이 세계 최고의 콩구르 행사에서 그는 6개 부문 중 무려 5개 부분을 석권하여 금메달 5개를 목에 걸었다.

이제 그가 만드는 바이올린의 가격은 수천만 원부터 수억 원에 이른다. 그 가치는 마치 문화재 수준이다. 그의 사후인 지금은 얼마나 더 가치가 뛰었을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이는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 당시의 가치보다 현재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돌이켜보면, 그를 세계적인 장인으로 이끌었던 것은 사방으로 가로막힌 암담한 상황에서 우연히 강연회에서 듣게 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그의 도전정신을 일깨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한 길이 그로서는 가능한 길이 되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바이올린 제작자의 길, 80평생을 살면서 그는 바이올린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상식적으로 포기해야 마땅한 상황에서도 주먹구구식으로 바이올린을 만들어 나갔다. 그처럼 정교한 악기를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스승이 없다. 더없이 힘들었던 외로운 길이었지만,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과정이 가져다준 동기부여는 그의 열정을 금강석과 같은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승화시켰다.

마침내는 그에게 냉소적이고 비정하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월계관을 씌우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세상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왔지만, 그 통로에 들어선다고 해서 누구나 끝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인생이 일종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이런 모험을 싫어하고 계산적인 사고방식으로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떤 길도 다 불확실하게 보이 고, 꿈과 정열까지도 상실하게 될지 모릅니다. 인생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에만 너무 집착하면, 앞길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손을 못 댄 채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기술자의 길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 각해 낼 수 있을 때까지 갈고 닦아야 완성됩니다. 그리고 누구나 시행착오를 거친다고 해서 좋은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인이 되느냐, 못 되느냐의 가장 큰 관건은 끝까지 해보겠다는 집념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도 집념이 없이는 장인이 되지 못하고 손재주에 그 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념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타고난 직 관도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아이디어 같은 것 말입니다.”

“성공이라는 용어는 철학적인 단어라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 서, 소기의 목적을 성취했을 때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장르에서 는 절대적 성취라는 것은 없고 상대적 성취라는 것은 있습니다. 저에게 성공은 완벽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완성했을 때입니다.”

“저는 성공을 향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장인은 물질적 생활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장인은 재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저에게 행복은 제가 고생하여 창출한 기술로 많은 연주자들에게 혜택을 줌으로써 감사와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이후 진창현의 수천만 원짜리 바이올린은 5년 치의 예약분이 밀려 있을 정도로 세계 유명 연주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일본에서 그는 재일교포 사회를 넘어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입지적인 위치의 바이올린 거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사회에서 갖은 역경과 차별을 겪고 성공하여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었다는 한 조선인의 이야기는 렇게 단순한 감동을 넘어 한국인으로서 뜨거운 자부심이 느끼게 하고 있다. 진짜 진창현의 이야기는 인간승리의 대표적인 휴먼드라마로서 이제는 전설이 되었다.

세계 최고의 명장인 ‘마스터 메이커’가 되다.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종목 중 5개 종목에서 금메달 수상한 이후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 제작자”(無監査 : 더 이상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하는 최고의 제작자에게 주는 명예)라는 특별인정을 받음으로서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 제작자 콩쿠르에서 금메달 3개 이상을 수상한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칭호)라는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전 세계에 5명밖에 안 되는 무감사 제작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후 1998년에는 일본 문화진흥회로부터 국제예술문화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 12월에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진창현의 일대기가 연재되면서 일본 사회의 화재인물로 등장하였다. 2003년 4월에는 “천상의 현”이란 제목의 만화로 연재되었으며, 지난 2004년 11월 진창현의 일대기를 다룬 한 단편 드라마가 일본 열도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이 드라마는 다름 아닌 후지TV 개국 4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3시간짜리 특집극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峽を渡るバイオリン)”이라는 휴먼드라마였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인 쿠사나기 츠요시草彅剛가 주연으로 한 이 드라마의 원작은 당시 실존 인물인 진창현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글로 옮긴 논픽션드라마였다. 특히, 이 드라마가 한국의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 3관왕을 수상한 것은 다양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로 성장한 실존하는 재일 한국인의 생애가 말 그대로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였기 때문이었다.

2008년 3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인 ‘COSMOS 영어2’(三友社)에 진창현 이야기가 한 챕터(Chapter)에 걸쳐 “The Mystery of Violin"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2002년 KBS 1TV 「한민족 리포트」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야-바이올린 장인 동경 진창현”으로 방영이 되었고, 2005년 SBS TV에서 「광복 60년 특집」 다큐드라마에서 “천상의 바이올린”으로 소개되었다. 2007년 4월 1일 SBS TV 「한수진의 선데이클릭」에서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로 방영되었고, 4월 9일에는 SBS TV 생방송 「화재의 인물 : Zoom -人」‘김미화의 U’에서 “천상의 선율 바이올린 명인 진창현”에 직접 출연하였다.

2008년 10월, 마침내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우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진창현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자녀 모두 악기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장남 진창호는 일본의 1급 현악기 제작자이고, 둘째 진창용은 현악기 활 제작자이면서 세계음악재료 1급 제작자이다. 셋째는 미국유학 후 미국에서 악기상을 운영하고 있고, 딸은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아무도 가지 않는 불가능한 길에 도전하여 큰 업적을 이룬 진창현, 그는 2012년 5월 13일 일본 도쿄 조후(調布)시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천상의 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가 떠난 2개월 후에는 그가 처음 바이올린을 만들었던 고장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마치의 신스이 공원에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로부터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는 병상 옆에 항상 태극기를 두는 등 최후의 순간까지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로 우뚝 선 비결을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했다.

“나를 그토록 서럽게 했던 일본사회의 차별과 모진 역경 때문이었다.”

그리고 2007년 3월에 출간한 ‘천상의 바이올린’이란 자서전 말미에 후대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아무리 결과가 보이지 않는 희망일지라도 정열을 가지고 진지하게 도전하여 끈기 있게 지속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길이 열린다.”

그는 늘 그렇게 끈기와 열정으로 바이올린만을 따라 다녔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 천상의 그 소리, 100% 그 신비의 소리에 거의 가깝게 도달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생애의 끝날까지 성공을 쫒아가는 즐거움으로 그는 살았다.  그칠 줄을 모르는 불굴의 집념은 불같은 욕망을 낳았고, 그 불타던 욕망은 마침내 화려한 성공을 낳은 것이다.

누가 명장을 꿈꾸는가? 진씨와 같은 집념과 끈기, 꿈과 욕망을 가지고 끝까지 도전하는자만이 영광의 월계관을 쓸수 있다는 이 전설같은 이야기가 미래를 꿈구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글을 시작하고 이제 마치고자 한다. 이글을 마치면서 한가지 바램은 그가 태어난 고향마을에 그의 자랑스런 생애를 추념하는 작은 기념비 하나라도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 진창현(陳昌鉉 : 1929. 10 - 2012. 5. 향년84세로 소천)

1929년 10월 25일(음력 9월 23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출생

1942년 아버지(진재기) 사망

1943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다

195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영문과 졸업

1957년 일본 기소 후쿠시마(木曾 福島)의 스즈키(鈴木) 바이올린 공장

근처 공사장에 오두막을 짓고 바이올린 독습 시작.

1958년 제1호 바이올린 제작 성공

1961년 3월 3일 32살에 11살 연하 처녀 이남이와 결혼

‘시노자키 히로쓰구’ 선생에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3천 엔에 판매

10월 도쿄의 마치다로 이사

1962년 장남(진창호) 출생

월세 3천엔짜리 도영주택(都營住宅)으로 이사

1964년 시노자키 선생의 소개로 안익태 선생을 상면

1565년산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소유

1966년 생애 처음으로 ‘스트라디바리우스’와 만남

에릭 프리드먼(Eric Freedman)의 1726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1965년 3월 진창현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 합격생 출현

1966년 차남(진창용) 출생

1968년 10월 25년 만에 한국의 고향을 방문

1970년 10월 자택근처에 공방을 마련

1971년 제1회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개인전(동경 시부야澁谷

우메하라梅原 화랑)

1972년 5월 27일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콘서트 마스터인

비아바(Biava)씨가 진창현의 197대째 바이올린으로

도쿄문화회관에서 연주

정경화와 그녀의 애기 169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Ex-Harrison’를 만남

1973년 제2회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개인전(동경 시부야澁谷

우메하라梅原 화랑)

1974년 미국 ‘다이제스트’지에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란 제목으로

진창현의 ‘바이올린 제작의 인생이야기’ 소개

(일본어판, 한국어판 발행)

이작 펄먼(Itzhak perlman : 세계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과 만남 -

‘스트라디바리우스 - 에쿠스 스패니쉬’ 소유

1975년 일본 현악지도자협회 회지 ‘악상’에 논문 “바이올린의 혼주” 발표

1976년 6월 어머니(천대선) 사망

12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종목 중 5개 종목에서 금메달 수상.

1978년 11월 29일 동아일보에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가 “한국인

진창현씨” 기사게재

1979년 일본 NHK 교육 TV에 출연

1984년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無監査)제작자”

특별인정 및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음

1986년 스즈키(鈴木)재능교육 전국지도자 하기 연수에서

“바이올린 성능과 연주의 효과와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

1990년 일본 음향학 학회지에 논문 “바이올린 제작에 있어서의 과거와

현제” 발표

1998년 일본 문화진흥회로부터 “국제예술문화상” 수상

1999년 JAPAN TIME 영자지 ‘Art and Artisans'에 인터뷰 기사 소개

NHK 라디오 제1방송에서 “일본 거장과의 대담 시리즈”에 출연

2000년 미국 신시네티의 ‘국제 바이오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경연대회장’에 “마스터 메이커의 참고작품”으로 바이올린과

비올라 특별전시

12월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 “진창현 일대기” 연재

2001년 일본 방송협회 종합 TV의 “작은 여행”에 출연

11월 쵸후(調布)시 “시민문화상” 수상

2002년 1월 한국 KBS 1TV - 한민족 리포트 “울밑에 선 봉선화야”

“바이올린 장인 동경 진창현” 방영

7월 “세계의 명장 진창현”자서전 한국판 출간

(혜림 커뮤니케이션 출판)

2003년 4월 일본 만화 “천상의 현” 이란 제목으로 야마모토(코믹작가 )

에 의해 연재

2004년 11월 일본 후지TV 개국 45주년 기념 3시간 특집극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 방영

11월 27일 기소후쿠시마에 바이올린(기소 1호)를 기증

2005년 7월 15일 나를 이겨야 미래가 있다(리즈앤북 출판)

“세계의 바이올린 명장 진창현” 소개

8월 15일 한국 SBS TV - 광복 60년 특집 다큐드라마

“천상의 바이올린” 방영

2006년 한국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컬렉션’에 진창현의 2001년 작

바이올린1호(광주호)를 기증하고, 이후 바이올린2호(대구호),

비올라(한라호), 첼로(백두호) 각 1대씩을 추가 기증

2007년 3월 “천상의 바이올린” 한국판 출간 (에이지21 출판)

4월 1일 한국 SBS TV 한수진의 선데이 클릭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방영

4월 9일 한국 SBS TV 김미화의 U “천상의 선율 바이올린 명인

진창현”에 출연

2008년 3월 일본 고교 2학년 영어교과서 코스모스 2호에

“더 미스테리 오브 바이올린 The Mysteries of Violin”으로 게재

10월 2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 무궁화장”을 수상.

12월 월간지 ‘신동아’와 센가와 ‘진공방’에서 ‘진창현과의 인터뷰’

게재

2012년 5월 8일 서울신문과 ‘마지막 병상 인터뷰’ 게재

5월13일 도쿄 조후(調布)시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향년 83세로 사망

7월 21일 일본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마치의 신스이 공원에

“기념비” 제막  

☞ 글쓴이 : 문옥배 / 현. 한국공예산업연구소 전문위원

※위의 내용은 진창현의 저서“세계의 명장 진창현”과“천상의 바이올린”

등에서 발췌 하여 엮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