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식.정보.시사.역사.과학.건강 等

[스크랩] ◆<必讀>압축성장, 그 애환의 시대

by 설렘심목 2016. 2. 10.

b-7

 

압축성장, 그 애환의 시대

1939년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그러나

세계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인 ‘냉전시대’ 로 돌입했다.

 

 

소련의 사회주의 불럭이 동구를 잠식,

위성국가를 세우고 있을때

자유진영을 지키기 위한

미국의 필사적인 노력도 시작됐다.

 

 

마샬플렌을 제외하고도

미국은 대전후의 신생국가 137개국을

전폭 지원했다.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쏟아부은 돈과 노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한,미동맹 이전,

미국이 대한민국을

그들의

보상과 보람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세계

최빈국중 하나에서 OECD회원국이 되었고,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물론,

정치 시스템 에서도

의회민주주의의 국가가 되었다.

 

 

세계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성공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고,

 

 

한편으로는

압축성장’ 의 모델 케이스로 인정했다.

 

 

8.15 광복이후,

1948년 8월 15일 건국을 기준한다면

불과 67년 사이,

단지

두 세대만에 성공한 국가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진

제7차까지의 ‘경제계획5개년계획’

그 핵심이었다.

 

 

압축성장은,

실로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으며

지금의 70, 80대 세대는

그 한복판에서 쉬지않고

피와 땀을

흘리며 이 과업을 이루어냈다.

 

 

특히

67년부터 84년까지의

2,3,4차 5개년 경제계획은

산업화의 빛나는 성공을 이루어낸

금자탑같은 시기였다.

 

 

그만큼 고생과 고통이 따랐고,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악한,

흡사

탄광의 막장같은 환경에서

모두가 묵묵히 일만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였으며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는

강력한 정치적

구심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날 나는,

경제기획원(당시의 EPB) 투자3과에서

가지고 간

서류를 접수시키지 못한채

복도에 있는

문을 열고 비상계단으로 나가

한손에 서류봉투를 쥔채

멀리

창밖을 내다보며 오래동안 서 있었다.

 

 

공장의

시설물 도입을 위한 ‘차관승인 신청서’

그 내용을 보완하고 또 보완 했지만

다시 퇴자를 맞은 것이다.

나는

계단에 힘없이 주저앉아

만감이 교차하는 생각을 했다.

 

 

담당업무부서의 과장으로서

오래동안 최선을 다 했지만

이제 그 한계에 선 것이며

이대로는

회사에 돌아갈수 없다는 점도

분명했다.

 

 

최선의 방법은

사표를 내는 것이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 올랐고

스스로의 부족을 한탄하기도 했다.

참으로 처참한 심정이었다.

 

 

바로그때,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문을열고 비상계단에 들어선 ‘담당’

(주사보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상이군인이었다.)

이 나를 발견했다.

 

 

-아니,

아직까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갈데가 없어서 여기 앉아 있는겁니다.

 

 

그는

한참동안 나를 지켜보더니

눈짓으로 따라 오라고했다.

 

 

자기책상옆에

나를 앉힌 그는 오래동안 생각을 한후

종이에 뭔가를 적어서 내게줬다.

-잘 읽어보고 다시 서류를 만들어 봐.

 

 

그때는,

그게 어떤 사업이든

수입대체효과’ 가 분명한게 관건이었다.

워낙

외화가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담당은 그점을 지적했으며

특히

통계수치에서

디테일한 설득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회사로 돌아온

나는 부장에게 간략히 보고하고

업무1과 1계를 중심으로

나까지 다섯명이 이 일에 달라붙었다.

 

 

우리는

3일동안 집에가지 않았으며

온갖데이터와 시장조사는 물론,

통금 때문에 근처 여관에서 자면서

꼼꼼하게 서류를 만들었다.

 

 

다시만든

서류를 읽어본 담당은

처음으로 ‘두고가라’ 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 진다.

흡사

죽을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억이다.

 

 

그후

나와 업무1계장은 그 담당의 생일이 되면

금강구두상품권 2매를 개인적으로 구입,

그를 만나 설렁탕을 먹었고

내외분이

새 구두를 맞춰신으라고 했다.

우리는 매년 그렇게 했다.

 

 

 

그후 공장건설을 위해

건설부를 드나들면서 고전할때도

그 담당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는 훌륭한 공무원 이었다.

좋은 관료없이

압축성장도 없다는 얘기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 가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주한일본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비즈니스의 경우

대개는

당일로 비자를 발급했다.

 

 

그런데

수입원료의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

내일

전무가 출국하게 되었는데

그날따라

영사가 회의참석차 출타,

비자발급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비행기 예약도 끝났고,

내일 동경에서의

회의스케쥴도 확정된 상태에서

비자발급이 안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입술이 타 들어갔고,

넋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을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오늘 비자를 못 받으면

목이 열 개라도 견딜수 없으니

손을 써 달라고 했다.

그때

내 표정은

죽기아니면 살기였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영사가 있는곳으로 갔고,

서류를 펴 들고 영사에게 설명했으며

현장에서 결재를 받았다.

 

 

빛깔도 선명한 비자스템프가 찍힌

전무의 여권을

받아든 나는 다리의 맥이 풀렸다.

 

 

그후 나는

구하기 힘든 진짜꿀 한병을 가지고

그 직원을 찾아가 인사했다.

 

 

나는 지금도

일본대사관 앞을 지날때면

그때의 악몽을 다시꾸곤한다.

정말

어려운일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일본출장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안고 돌아온 전무는,

동생과

결혼할 제수씨가 너무 마음에 들어

아주 색깔이 아름다운

고급 옷감한벌을 사가지고 들어오다

세관에 압수당했다.

 

 

국내 섬유산업보호를 위해

취해진 엄격한 조치였다.

 

 

 

전무는

세관업무에 능통한 나를 다시불러

그 압수당한

옷감을 찾아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비자에 이어

두 번째 난관을 만난 셈이다.

 

 

그 옷감의 통관은 절대 불가였다.

누구보다

내가 그점을 더 잘 알고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김포세관에 근무하고 있는

선배를 찾아갔다.

 

 

그는 학교 브라스밴드에서

내게

슬라이트럼본, 유포니움, 후렌치 혼,

튜바를 가르쳐준 형님같은 분이다.

저간의

사정을 다 들은 선배는 단화하게 물었다.

 

 

-절대로 팔건 아니지.

  몇 번이고

그점을 다짐한 선배는

자기의 상사와 오래동안 상의했고,

며칠이 지나

그 옷감을 봉투에 담아 내손에 쥐어줬다.

 

 

우리 전무가 이 일을

친구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자랑했고,

얼마후,

그 친구회사의 총무과장이 나를 찾아와

자기도 같은 케이스에 걸렸으니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런일 없었는데요.

 

 

30만평 대지에,

공장건물 5만평을 짓고

기계를 설치하는데 꼭 3년이 걸렸다.

초 고속의 치열한 전투였다.

 

 

작은 도시에서

10개의 여관을 장기임대했고,

수십대의 버스를 운행한 것을 물론,

하루세끼

모두 공장식당에서 먹어야 했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안전모와 작업복,

군화보다 무거운 안전화,

우리는 그 악몽같은 3년을

포로수용소시절’ 이라고 불렀다.

 

 

월차도, 년차도, 휴가도 없었고,

기계설치를 위해

공장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신발도 벗지못한채

잠 자는건 다바사였다.

 

 

압출공장

기계설치를 위해 입국한 소련인들은

밤낮없이 보드카를 들이켰고,

 

 

특수강 라인을 담담한

영국, 독일인들은 칼 퇴근을 했으며,

 

 

혼산탱크 기술자인

프랑스인은 반은 놀면서 일했다.

 

 

그래도

우리와 같이 가마니에서 자 준건

일본기술자들 뿐 이었다.

그점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아침 일찍

출근한 청소담당 아줌마들은

우리들에게 담뇨를 덮어주면서

-모두가

제집에서는 귀한 아들들일텐데

여기선

갈데없는 거지들이지‘ 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우리의 몰골은

갈데없는 거지꼴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렇게,

그 혹독한 환경에서

가장 값비싼 청춘을 바쳤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내 친구들은

그곳을 ‘휴전회담막사’ 라고 불렀다.

 

하루에

수백명의 근로자를 ‘면접’하는 건물이

휴전회담당시의

막사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근로자 선발을 위한 면접은,

정확한 기술수준,

경력, 시급, 비교평가를 해야하는

고도의 정밀작업이었다.

각분야

전문간부사원들과 함께

최종결론은

인사부장인 내가 내려야 했다.

 

 

거기엔

청탁이나 압력도 많았다.

물론

들어준건 단 한건도 없었다.

 

 

인사부 안에는 노무과가 있고,

나는 그 어려운 업무를 통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것도 근로자들이며

돌아서면

가장 무서운것도 근로자들임‘을

이미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더 신중을 기해야 했으며

특히

임금인 ‘시급’ 결정에서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냉정해야 했다.

그건

회사의 손익과 직결돼는 문제이기도 했다.

 

 

 

면접은

사람을 크게 지치게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철강공장에서는 3교대 때문에

반제품 인수인계 과정에서

분쟁이 잦았다.

 

 

불량률에 대한

기준과 생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때로는

폭력사태까지 벌어진다.

널려있는게

쇠조각이니 부상자가 생기는것도 다반사다.

 

 

사장이라 해도 그 패싸움은 못 말린다.

그 싸움을

멈출수 있는건 나 밖에 없다.

 

 

일단,

나한테 명찰을 뜯기면 끝나는것이고

크게 봐줘도

다음 승급, 승진에서는 제외다.

그러니

인사부장은 언제나

그들에게는

제일 무서운 호랑이인 것이다.

 

 

철강공장은

언제나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한번은

용해로에서 녹인

쇳물을 담아 운반하는 잉코트케이스가

기울어져

뜨거운 쇳물이 쏟아진 일이 있다.

 

 

그때

현장에 있던 근로자들은

죽기아니면 살기로 도망하게 되는데,

사실은

쇳물보다는 급히 뛰어가다

각종 구조물에

부딛쳐 다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크고작은

인명사고가 없는날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한번은

그렇게 다친 근로자 한명이

부상이 심해 현장에서 숨졌다.

 

 

다음날 아침,

시골마을에서 올라운 유가족들은

경비원들의 저지를 뚫고

정문옆 스테인레스 고철 야적장에서

후라이판과

주전자을 찾아들고 사무실에 난입했다.

 

 

80여명의 직원들은

다 도망치고 나 혼자 남았다.

 

 

그들은

있는힘을 다해 내게 분풀이 했고,

내 이미에서

피가 흘렀을때야 흥분이 가라 앉았다.

 

 

나는 그들을

내 책상 옆에있는 응접세트에 앉게했고

먼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후

혹시

다른 아들이 있는지를 물었다.

 

 

군 복무중인

작은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아들이 제대하면

형을 대신해서 반드시

우리회사에

취직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나이많은 어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의 피를 닦아줬으며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나는 이미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있었다.

돌이켜 보면

정말 힘든 시기였다.

 

 

나는 한달에도 몇 번씩

경찰서와

검찰청사를 드나들어야 했다.

공장 종업원이 기천명 이었으니

사고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술먹고 폭력을 휘두르면

무조건

구속 되었으며 심하면 기소될수 있었다.

 

 

경찰선에서

훈방되는 경우는 쉬운편 이지만,

검찰에 송치되면 일은 아주 힘들어진다.

 

 

그때

나는 할수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곤 했다.

 

 

술먹고 사고친건 무조건 큰 잘못이고

벌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M16총열을 뽑아내고,

수류탄 탄피는 물론 장갑차의 장갑판과

박격포의

포판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놈들이며,

 

 

특히

고도의 정밀기술을 요하는

포신의 진공주물은

이놈이 아니면

안된다고 호소 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검사들은

엄하게 훈계한후 기소유예처분했다.

더 까다롭고 힘든게

근로감독관의 호출이었다.

 

 

부당노동행위’ 가

고발되어 조사하는 것이다.

사장을 대신해서

온갖 핀잔을 들어야 했으며

손이 발이되도록 빌어야 했다.

 

 

모두가

자존심 상하고 힘든일 이었지만

더 큰 것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각오 없이는

견딜수 없는 곤욕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후회는 없다.

나만

그런 고생을 한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제품이 처녀수출 되던날,

간부사원들은

임원들과 함께 부두에 나갔다.

 

 

우리 모두는 선적하기 위해

쌓여있는 제품 상자에 손을 얹고

정말

뜨거운 사나이들의 눈물을 흘렸다.

 

 

그간의

온갖 고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건

우리의 청춘을 바친 결정체 였다.

별을보고 출근,

별을보면서 퇴근한데 대한

뜨거운 보상이었다.

 

 

정말

우리 모두는 미친 듯이 일만 했었다.

그리고 1974년 봄,

나는

막 운전면허를 취득한 아내에게

하얀색의

일제 브리사를 사서 선물했다.

 

 

아내는

그 차를 ‘나의 백조’ 라고 불렀다.

 

 

이제 80노인이 된 나는,

13층의

우리집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다.

 

 

젊은 부부가 애 둘을 데리고 나와

자기들 차에 태우고

외출하기 위해 출발한다.

 

 

나는

그들의 풍요로움을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한다.

 

 

정말

우리들은 압축성장을 해 낸 것이다.

 

 

물을 마실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라

- 중국격언.

 

 

by/yorowon


 

출처 : 우대받는 세대
글쓴이 : 地坪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