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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시선, 불안한 공존… 한국에 무슬림 20만, -한국일보

by 설렘심목 2015. 1. 26.

불편한 시선, 불안한 공존… 한국에 무슬림 20만

23일 오후 서울 한남동 이슬람중앙성원에서 무슬림들이 신발을 모두 벗은 채 합동예배를 하고 있다. 평소 때 1,000여명보다 적은 600여명이 참석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k.co.kr

18세의 한국인 김모군이 이슬람국가(IS)에 자진 가담했다는 터키 언론보도가 국내에 처음 알려진 지난 17일 오후. 한국인보다 더 놀란 이들은 20만 명에 달하는 국내 이슬람교도, 무슬림이었다. 국내 체류하는 무슬림이 사건에 연루라도 됐다면 그 파장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색안경을 끼고 경계하는 시선을 한두 번은 경험한 때문이다. 그런데 무슬림들의 대응은 이전과는 달랐다. 다음날인 18일 오전 서울 이태원에선 초록 깃발을 든 무슬림 400여명이 거리행진을 벌였다. 파키스탄 출신이 주축인 모임 다왓떼이슬라미 회원들이 든 피켓에는 ‘나는 무함마드를 사랑합니다’가 아랍말과 영어로 적혀 있었다. ‘험담과의 전쟁을 계속하겠습니다’는 한글도 보였다. 무함마드 탄신을 기념한 거리행진은 프랑스 파리테러에 따른 반(反)무슬림 여론에 우려를 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느 때라면 민감한 시기의 단체행동은 사실 금기였다. 실제로 무슬림 사회 내부에서 시점이 나쁘다며 취소를 권고했으나 주최 측이 행사를 강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무슬림 A씨는 파리테러나 김군 사건과 한국의 무슬림이 무관하다는 점을 홍보하는 것도 이번 행진을 밀어붙인 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사회 시선은 이런 기대와는 엇박자였다. 무슬림이 집단으로 서울 거리에서 의사를 표출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고, 그런 이들에게 한국사회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진을 지켜본 한 인사는 “무슬림들이 우리를 자극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낸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중동문제 전문가 P씨는 “자신들의 불안한 입장을 반전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왔지만 오히려 한국인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고 평했다. 거리행진이 끝난 18일 오후 예배 때 이런 반응이 알려지자 서울 한남동의 이슬람중앙성원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의 이슬람포비아를 자극한 것이 된 때문이다. 이런 기류가 이어진 23일 중앙성원 예배에는 평소의 절반 수준인 600여 무슬림만이 참석했고, 외교관 차량들도 적었다. 무슬림들은 추운 날씨 탓이라고 했지만, 분위기는 이전 같지 않았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목소리를 내려 하지만 무슬림 대부분은 최근 사건으로 위축된 모습이다. 21일 오전 경기 안산시 원곡동. 39개국에서 온 3만5,000여 외국인이 거주하는 국내 다문화 1번지다. 안산성원을 비롯 500m 거리에 3개 성원이 자리하고 종파, 출신국 별로 작은 기도소가 운영될 만큼 무슬림 움직임이 활발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겉으로는 조용한 모습이었지만 성원들이나 거리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신도 한두 명만이 예배를 보고 있었고, 한국인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나 외출을 자제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반면에 무슬림에 대한 주민들이 시선은 어느 때보다 불편해 보였다. 인력파견업체를 운영하는 강모(52)씨는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까지 수백 여명이 몰려온다”며 “최근 들어서 ‘혹시나’하는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이슬람교도들이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슬람 중앙성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k.co.kr

▦한국사회에서 입지 커진 무슬림

국내 체류하는 해외이주 무슬림은 14만3,500명으로, 전체 외국인(175만6,000명) 10명 중 1명 꼴이다. 불법체류 무슬림(2만1,000여명)과 한국인 무슬림 3만5,000명을 포함하면 국내 무슬림은 모두 20만 명에 달한다. 문화부가 이슬람교를 아직 ‘기타종교’로 분류할 만큼 타종교에 비해서는 적은 숫자이다. 그러나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가 조직된 1965년 3,700명에서 50년 만에 54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외국인 밀집지역인 안산이 있는 경기에 가장 많은 3만3,300여명(30.5%)이 거주하고, 경남(14.4%) 서울(8.9%) 인천(6.6%) 등 공단을 중심으로 퍼져 있다. 이슬람 성원(聖院)은 서울중앙성원을 비롯해 전국에 15개가 운영되고 있고, 크고 작은 기도소는 60여개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의 무슬림은 대체로 보수적이거나 극단적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더구나 한국이 종교활동에 아무런 제약을 하지 않는데다 한류 열풍 덕에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이 그리 높지는 않은 편이다. 한국생활 불만요인에 대한 한 조사에서 무슬림들은 직장 내 갈등과 향수병, 음식 등을 꼽았으나, 종교 문제는 거의 제기하지 않았다. KAIST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국내 기업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출신 무하마드(32)는 “한국에 4년째 있으면서 인종차별은 있을지언정 종교를 가지고 차별당한 적은 없다”며 “종교를 존중해주는 나라에서 무슬림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슬림 증가와 함께 이슬람 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파고 들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최근 발간한 무슬림 관광객 유치 안내서에 따르면 무슬림 친화 레스토랑이 서울 63곳을 비롯 전국에 140곳이 형성돼 있다. 롯데ㆍ신라ㆍ하얏트 등 전국 32개 호텔에서는 무슬림 관광객을 위한 기도용 카펫과 나침반, 할랄 메뉴, 기도방향 표시 등을 서비스하고 서울대병원 등 대형병원들은 무슬림 환자를 위한 기도실과 할랄식(食)을 제공한다. 우리나라를 찾는 이슬람권 관광객만도 62만4,000명(2013년 기준)에 달한다. 무슬림 자녀 비중이 높은 경기 안산 학교들은 급식 때 무슬림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를 뺀 식단을 마련한다. 아랍어는 2004년 이래 대학수학능력시험 제2외국어 영역의 선택과목으로 지정돼 있고 매년 15% 이상 학생들이 선택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또 한국인과 외국 무슬림 간 결혼이 늘면서 자녀들이 코슬림(Koslim)이란 별칭으로 불릴 만큼 늘어나고 있다. 장세원 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는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무슬림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 보니 이슬람 문화가 쉽게 전파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슬람교도들이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슬람 중앙성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k.co.kr

▦목소리 내는 무슬림, ‘우리는 IS와는 다르다’

한국에서 입지를 다져가는 무슬림이 최근 IS 관련 국제테러와 김군의 IS가담 정황 등이 알려지면서 새삼 주목 받는 게 사실이다. 접촉 기회가 늘어나면서 무슬림과 한국사회가 새롭게 겪는 갈등도 동시에 불거지고 있다. 한국에서 무슬림은 부정적 이미지로 낙인돼 있다. 2001년 9ㆍ11테러 이후 서방의 부정적 시각이 담긴 사건위주의 뉴스가 그대로 전달되는 것도 큰 이유다. IS같은 무장단체의 극단성을 전체 이슬람 사회의 특징으로 치환해 편견을 만드는 것이다.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한국은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에 대한 호기심만 있는 상태”라며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 미디어가 전쟁이나 테러 등의 갈등을 조명하는 보도를 접하게 되면 부정적인 편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무하마드도 “이슬람 테러가 발생하면 미디어는 항상 종교를 부각시킨다”며 “팔레스타인 사태만 해도 미디어는 유대인들의 실상에 대해 침묵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에 20년째 거주하며 컴퓨터부품 수출사업을 하는 파키스탄 출신 무스타파(47ㆍ가명)는 “전세계 무슬림 인구가 16억이다. 평화를 추구하라는 교리를 따르는 이들이 대다수지만 극히 일부 지하디스트(성전주의자)들이 잘못된 생각으로 테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꾸란에는 ‘선량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류 전체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적혀있다고 소개했다. 이태원에서 만난 무슬림 B씨는 “테러범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무슬림이 상당수”라며 테러리스트와 무슬림을 일반화는 것에 주의를 당부했다. 명지대 아랍어학과를 졸업한 안지혜(29)씨는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무슬림 친구들은 생활에서의 몇 가지 규약을 지키는 것 빼고는 특이점이 전혀 없다”며 “지금의 묘한 긴장감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해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에 대한 얕은 이해가 충돌을 빚어낼 수 있다는 점은 최근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이달 10일 아이돌 그룹 B1A4의 말레이시아 팬미팅에서 히잡을 쓴 무슬림 소녀팬 3명이 한국가수들과 신체접촉을 해 체포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낯선 남성과 접촉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해 빚어진 사건이었다. 소녀들보다 B1A4에 대한 비난이 한국 비판으로 번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무슬림들은 지적했다.

18일 무슬림 400여명이 서울 이태원 거리를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무슬림의 첫 서울도심 거리행진은 김모군의 IS가담 보도와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k.co.kr

박관규기자 ace@hk.co.kr /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앞 한 점포에 히잡 쓴 마네킹이 진열되어 있다.

 

● 이슬람 에티켓

무슬림의 하루는 기도에서 기도로 끝난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다섯 번 하는데 깨끗한 장소에서 얼굴을 씻고 메카방향을 향해 기도한다. 우리나라에서 메카방향은 서북서 285.8도로, 서쪽을 바라보고 약간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된다. 기도는 양손 엄지를 귓불 가까이 올리고 ‘알라후 아크바라(하나님은 위대하다)’를 외는 것으로 시작해 5개 절차로 진행한다. 이슬람을 아는데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IBM 문화다. 인샤알라(신의 뜻대로) 부크라(내일) 마알리쉬(괜찮아)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인샤알라는 하나님이 길을 정해 놓았다는 운명론이다. 사람 힘으로 일을 좌우할 수 없다는 모호하고 부정적인 말로 쓰인다. 부크라는 약속이나 계획을 미룰 때 사용한다. 내일이란 뜻이나 그 의미는 내주, 다음 달, 내년인 경우가 많아 ‘지금 해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마알리쉬는 남을 위로하거나 자신 잘못을 사과할 때도 사용한다. 약속시간에 아무리 늦어도 마알리쉬 이외 사과는 없는 게 보통이다.

인사는 오른손으로 하고 친척 친구 간에 오른쪽부터 시작해 왼쪽으로 어긋나게 포옹을 한다. 가까운 사이라면 오른쪽 뺨을 맞추거나 오른쪽 뺨에 입술을 댄 뒤 왼쪽에 맞춘다. 반가우면 두 번 이상 뺨 맞대기 인사를 한다. 식사, 악수를 오른손으로 하고 손톱 자르기, 칫솔질도 오른쪽부터 할 정도로 오른손 문화가 보편화 되어 있다. 눈썹을 치켜 세우고 머리를 위로 약간 올리면 부정적 표시다. 이름 앞에는 호칭을 쓰는데 교수 변호사는 우스타드, 박사는 둑투르, 대통령이나 총리는 싸힙 알 파카마, 왕이나 영왕에게는 잘랄라를 붙인다. 이슬람 요일은 토요일부터 목요일까지가 평일이다. 그래서 아랍권 대사관은 금토일 3개 요일을 쉬는 경우가 많다. 관공서 업무는 아침7시30분 시작해 오후1,2시 마감한다. 상점들은 더운 오후 1,2시에 문을 닫았다가 저녁에 다시 연다. 기획취재팀

● 간단한 아랍 인사말

앗살람 알라이쿰(안녕하십니까?)
마르하반(안녕)
타샤라프나(만나서 영광입니다)
카이팔 할(어떻게 지내세요)
이스미 000(내 이름은 OOO입니다)
푸르사 사이다(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민 아이나 안타(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아나 민 쿠리야(나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마앗 살라마(안녕히 가세요)
슈크란(감사합니다)


 

이슬람 때문에 언론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나?      이만석칼럼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의 만평에 무함마드를 모독한 내용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 잡지사의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를 포함한 기자 6명, 프랑스의 유명 시사만화가 4명, 경찰 2명 등 총 12명이 무슬림들에게 목숨을 잃는 테러가 발생해 세계를 경악케 했다. 샤를리 엡도는 시사 풍자 주간지로 유명하다. 대통령이건 교황이건 예술인이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천주교 등등 성역 없이 모든 분야를 망라한 강도 높은 풍자로 비난을 받기도 하고 속이 후련하다며 칭찬하기도 한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가 살아 있는 유럽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며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번 사건도 그런 사실을 입증해주는 증거자료들 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이슬람 전문가들 중의 한 사람인 한양대 이희수 교수는 이 사건에 대해서 “1400년 이슬람 역사의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던 무함마드가 누드화로 풍자되었다면 무슬림들은 영적인 살인을 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민 1세대들이야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차별을 참아냈지만 이미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랐음에도 국민 대접은커녕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자란 2,3세대들의 좌절과 분노는 엄청나다”고 말함으로 테러를 저지른 무슬림들을 일방적으로 두둔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과연 차별과 푸대접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유럽은 인권 수준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높아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공공연한 차별과 푸대접을 당한다면 즉시 신고하여 법정에 세울 수 있는 ‘증오 범죄법’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무슬림들을 혐오스럽게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소위 ‘이슬람포비아(이슬람공포증)’라는 정신병 환자로 치부하여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을 수밖에 없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 2,3세대가 국민대접도 못 받고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프랑스 사회를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무함마드를 풍자한 것은 영적인 살인이라고 느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적 살인을 저질렀으니 육적 살해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물론 필자의 의도는 샤를리 엡도를 일방적으로 두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테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난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 논리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잡지는 원래 사회의 모든 분야의 개인이나 집단을 풍자하는 것을 본연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즉 이슬람만을 의도적으로 집중 비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 개인, 집단을 풍자해왔는데 그 중에 이슬람이나 무함마드를 풍자한 것도 몇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난 받았던 다른 모든 개인이나 집단은 그 비난과 충고를 거울삼아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슬림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테러로 연결시킨 것과 소위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그 테러 행위를 두둔하는 것을 보면 이슬람의 교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제로 아랍권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헌신된 무슬림들은 샤를리 엡도의 잔인한 테러를 칭송하는 목소리 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실 이슬람에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은 무함마드가 보여준 행동 모범인 하디스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고 이슬람의 샤리아(율법)가 증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2012년에 “순진한 무슬림”이라는 동영상 때문에 리비아에서 일어났던 미국 대사 및 외교관 살해 사건을 들 수 있겠다. 이 영화를 누가 만들었는지도 분명치 않고 원래 아랍의 전사라는 영화였는데 이집트에서 아랍어로 더빙하면서 무함마드를 풍자한 영화로 둔갑했다는 말도 들린다. 이것을 계기로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폭력시위가 일어나면서 중동의 외국 대사관들이 당분간 업무를 중단하고 철수를 하는가 하면 급기야는 리비아에 근무하는 크리스토퍼 스티븐슨 미국대사를 포함한 미국외교관 4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자국 대사를 살해한 무슬림들에 대해서 한 마디 항의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한 무슬림들을 달래기 위해서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테러의 피해자인 그 대사는 그 동영상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동에서 뺨 맞고 서에서 화풀이하는 식의 명분 없는 테러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살만 루시디라는 영국 작가가 1988년에 쓴 악마의 시(Satanic verses)라는 소설이 이슬람을 풍자한 내용이라는 소식을 들은 이란의 종교 지도자 이맘 호메이니는 89년 2월 “그를 살해하는 사람에게는 미화150만 불을 상금으로 주겠다”는 파트와(종교 칙령)를 선포해 무슬림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소동을 피우자 영국 경찰은 그를 보호했고 그는 무슬림들의 살해 위협 때문에 이름을 바꾸고 잠적하여 지금까지 숨어서 살고 있다.
 
파키스탄의 두 아이의 엄마인 가정주부 ‘아시아 비비’씨는 2009년 9월 기독교인으로서 농장에서 일하다가 더워서 물통에 가서 시원한 물을 한 컵 먹고는 자기 옆에서 일하는 무슬림 여인에게 물을 한 컵 떠다 주었는데 “기독교인이 주는 물은 더러워서 못 먹는다”며 쏟아버렸다. 아시아 비비씨는 너무 마음이 상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무함마드는 해 준 것이 무엇이냐?”는 말을 했더니 무함마드를 모독했다는 혐의를 씌워 ‘신성모독’죄로 고발을 당해 ‘사형언도’를 받아 항소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 조차 사형언도를 받고, 대법원에 호소하면서 지금도 복역 중이다. 말 한 마디 때문에 사형 언도를 받은 그녀를 동정해 신성 모독법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한 펀잡 주의 주지사 살만 타시르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자신의 경호원에게 살해당했다.

2014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유 언론인 라이프 바다위(Raif Badawi)씨는 인터넷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사우디 종교경찰을 비난하는가 하면 정부를 비난한 댓글들을 지우지 않은 혐의로 10년 징역에 1천대의 채찍 형에 벌금 1백만 리얄(한화 약 2억8천만원)을 선고 받았다. 채찍은 20~50주에 걸쳐서 50대씩 나눠서 맞는다.(Daily News 2014.5.8.)

이 외에도 이슬람의 여성인권 유린을 고발하는 굴종(Submission)이라는 동영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데오 반 고흐 감독이 백주에 대로변에서 참수 살해당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고집하던 사람들이 무슬림들에게 테러를 당한 예를 들자면 셀 수도 없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함마드가 보여 준 행동모범 때문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자신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120세의 노인 아부 아팍(Abu Afak)을 살해한 것을 보고 그 행위를 비난한 메디나에 사는 ‘아스마 빈트 마르완’이라는 여인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잠들어 있는 그 여인을 죽이고 돌아와 보고한 무슬림 병사에게 “너는 알라와 그 선지자를 기쁘게 하였도다”라고 칭찬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슬람 역사의 기록이다.

이런 무함마드의 행동은 모든 충성스런 무슬림들이 마땅히 따라 해야 할 행동 모범이며 율법의 기준이 되었다. 무함마드가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본받아야 하는 무슬림들은 그를 비난하거나 모독하는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잔인하게 테러를 가함으로써 자신이 헌신된 무슬림임을 입증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꾸란에 의하면 그런 사람이 진짜 무슬림이기 때문에(꾸란49:15) 헌신된 무슬림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무슬림들은 명분만 있으면 테러를 해도 좋다는 허가증은 누가 발급해 준 것인가? 이슬람에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율법이 없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성경말씀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살인하지 말라’(신5:17)는 말이 아니다. 꾸란에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꾸란17:33)고 한다. 이 말은 죽일만한 이유가 있으면 죽이라는 말이다. 꾸란에 보면 “어디서 발견하든지 죽이라”는 말이 많이 발견된다.(꾸란4:89, 꾸란4:91, 꾸란9:5 등) 이 말은 범죄한 사람들을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서 사형시키라는 말이 아니라 아무나 어디서 발견하든지 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을 배신하는 자, 혹은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자, 무슬림을 개종시키려는 자, 무슬림을 박해하는 자등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죽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롬12:19) 너희는 용서하고(눅6:37)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하셨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는 심판권을 무슬림들에게 양도했다. 너희 칼로 죽였으나 너희가 죽인 것이 아니라 알라께서 죽이신 것이라(꾸란8:17)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실천하여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야한다는 목적으로 알카에다 혹은 탈레반이나 IS 같은 그룹들이 형성되기도 하고 이 그룹들은 국가적인 재정지원이나 NGO단체들의 지원은 물론 개인적인 후원을 받기도 하며 무고한 이웃들에게 테러를 가한다. 물론 우리들의 기준으로 보면 ‘테러’지만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알라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두가 본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이슬람 전사요 지하드 용사’들이다.

그러나 특별히 어떤 테러 단체와 연관이 없더라도 꾸란에 심취되면 얌전하던 사람이 갑자기 테러범으로 돌변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은 더 이상 쓸데없는 염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세계는 이슬람 때문에 언론의 자유를 반납하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순진한 인권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은 테러범들을 비난하다가 자신이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러는지 아니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품고 도와주는 것이 여러 가지로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그러는지 혹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거짓 홍보에 속아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오히려 테러범들을 두둔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을 보게 된다.

무슬림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다만 악한 가르침에 속아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불쌍한 형제자매들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미워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주며(잠10:12)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다.(요일4:18)

까닭 없이 타종교나 타문화를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비난받을 만한 잔인한 테러를 끊임없이 저질러 놓고 이에 대해서 비난하는 투로 풍자했다는 이유로 잔인한 보복성 테러를 가한다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말살시키려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이제 세계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며 할 말을 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이슬람이 두려워 매일 테러를 당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