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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영화

영화 '명량'에 대한 명랑하지 않은 생각 - 미래한국 한정석편집위원

by 설렘심목 2014. 9. 11.

‘명량’에 대한 명랑하지 않은 생각
2014년 08월 19일 (화) 16:41:43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empal.com

영화 ‘명량’이 관객수 1200만을 돌파했다. 역대 사극 중 최고 흥행작이라는 기록을 만들면서 명량은 사회적 신드롬이 돼 버렸다.

명량의 쾌거(?)에 대해 논할 때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일본에 대한, 더 정확히는 ‘왜놈’에 대한 반일감정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과의 불편한 외교관계를 배경으로 명량은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기록을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명량’이 한국 영화사에서 과연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비평가들은 더 말하기 어려워졌다.

 

영화에서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는 관객은 ‘무죄’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에 대해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비평가는 ‘유죄’다. 그렇기에 관객과 비평가 사이에는 항상 긴장과 원한이 존재한다.

이제까지 명량에 대한 이러저러한 비평들이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것은 영화를 대하는 비평이라 할 수 없다. 언론 문화부 기자들의 관람기적인 코멘트는 그저 제작사나 관객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 머물기 쉽다. 관객이 환호할 때 침묵해야 하는 비평가들은 그래서 괴롭다.

 

영화 ‘명량’에 대해 그 영화적 가치를 말해보라 하면 영화 비평을 공부하고 평론가로도 등단했던 필자 역시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다. 비평가들은 한 편의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심이 있다. 영화는 그러한 ‘어떻게’를 통해 자신의 미학적 진화를 성취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명량을 그 무슨 예술영화로 보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도 같다. 하지만 모든 영화는 근본적으로 예술작품이다. 울고 짜는 통속성의 영화도 일종의 예술작품이다. 다만 그 성취에 있어 특별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영화 ‘명량’이 영화적 기법으로 얻어낸 것이 없기에 할 수 없이 비평가는 영화의 내면이 아니라 스크린의 바깥쪽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진다. 가장 하기 싫은 작업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명량’에 대한, 누군가는 해야 할 이야기

 

‘명량’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질문이었다.

‘영화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왜 이런 영화에 열렬하게 반응할까.

 

그런 질문은 영화가 근본적으로 제의적 기능을 가진 신화라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그렇다. 모든 서사는 그 자체로 신화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명량’은 아득한 선사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동굴 속에 그려 넣은 벽화나 바위에 새긴 거대한 ‘성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들이 인류 최초의 ‘스크린’이었다.

 

그 스크린의 영상 속에서 인류는 위대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재현하고 반복해 왔다. 그 반복들이 차이를 만들면서 독창적 서사는 여러 형태의 버전으로 분화한다. 그리고 나면 도대체 무엇이 원전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영화 ‘명량’은 역사(歷史)라는 부정확한 기억들이 수많은 반복과 차이를 통해 만들어 낸 허구다. 비평가들은 그 허구가 ‘똑똑하게 터무니없을 때’ 환호하고 대중들은 분노한다. 비평가는 오리지널에서 시치미를 뗀 그 복제품(simulacra)의 얼굴에서 즐거운 위조와 날조의 분칠을 발견한다. 그것이 미학적 성취이자 예술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선사시대 바위에 그려진 거대한 성기 암각화가 오늘날 우리가 포르노라고 규정하는 사진과 똑같다면 어떻겠는가.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오지 않겠는가? 형식에서 과장과 왜곡과 침묵과 날조는 예술의 혼(魂)이다. 문제는 그것이 오리지널의 의미를, 그 시대의 문법으로 변환(encoding)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들의 장난과 뛰어난 예술을 구별할 수가 없다.

 

‘정신승리’가 영화의 기능인가?

 

그런 점에서 선사 암각화의 거대한 성기는 예술이지만 시종일관 근엄하고 장엄한 이순신, 고정관념(stereotype)에 충실한 왜놈, 사실적인 느낌의 해전이 등장하는 영화 ‘명량’은 ‘장난’이 된다.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 실제 명량해전에 대해 알아본 바는 이러하다. 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에 처음부터 나가지 않고 왕의 명령을 거부했던 것일까. 배 한 척으로도 그렇게 승리할 수 있는 영웅 이순신이라면 칠천량해전에서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차피 부정확한 기억으로 만든 신화라면 칠천량해전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싸워 이긴 것으로 하면 안 될까. 물론 그렇게 하면 ‘역사 날조’라는 비판이 따르겠지만 영화가 어떻게 역사를 날조할 수 있나. 이 생각을 따라가 보면 ‘영화가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도 사실은 웃기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순신의 ‘명량’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으려 할까.

 

사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 해봐야 ‘질 것 같은 싸움은 해서는 안 된다’와 ‘이순신 장군은 용감했다’일 뿐 아닌가. 굳이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왜놈들은 바보다’ 정도가 있겠지만 말이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함대의 국지적 승리였을 뿐이다. 이튿날 왜의 수군은 조선 판옥선보다 더 큰 아타카 배를 이끌고 재공격에 나서서 전라 우수영을 깨고 명량해협을 건너갔다. 이순신 함대는 그 싸움을 피했다. 이후의 역사는 한일 간에 각자 다른 해석으로 전개된다.

정신 승리를 주는 것이 영화의 기능이라면 ‘명량’은 걸작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