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무게를 신화에서 과학으로 이동시키다
서구 철학의 역사를 보면 신화의 세계가 자연철학의 세계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신화를 기원전 8세기경의 호머와 헤시오드가 글로 기록한 이후라고 한다. 우리가 신화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에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이 세계란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신들이 서로 다투고 화합하면서 굴러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사랑의 신때문에 일어나고 부엌신을 화나게 하면 음식이 상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신화가 글로 기록되기 시작하자 그 신화적 세계관의 전체모습이 들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안에 있던 모순들이며 설득력없는 면들이 분명해졌을 것이고 그것이 보다 오늘날의 과학에 가까운 세계관을 출현시켰을 것이다.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는 성경에 관련해서도 있다. 성경이 라틴어처럼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운 말로 씌여지고 모든 성경이 집대성되어 출판되지 않았던 시절에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은 뭐든지 성경에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무식한 농부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출판이 보편화되고 독일어같은 일반언어로 성경이 번역출판되자 기독교는 혁신을 피할 수 없었다. 마틴루터는 1517년에 95개 반박문을 써서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는데 이 글은 두주만에 유럽전역에 퍼졌다. 이는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쓰고 읽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독점되는 시대에 진실은 숨겨지고 거짓된 이야기, 일종의 근거없는 신화 그리고 부패가 판을 치게 된다.
여전히 남아 있는 개인적 신화의 세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아마도 아 예전에 미개하던 시절의 이야기구만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실은 현대인들의 다수, 특히 한국인들의 다수는 자신이 어느정도 문자가 출현한 시대 이전, 인쇄술이 보편화된 시대 이전을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스스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전문화로 인해 지식이 칸칸이 나눠지는 것은 사실 요즘은 더 심해졌다. 오늘날 번역의 문제만 해도 넘치게 많이 있다. 우리나라 한글판 성경책도 현대인이 모르는 말로 써있는 경우가 많다. 지식은 넘치는 것같으면서도 독점되어 어려운 전문용어의 벽뒤에서 신화를 만들어 낸다. 지식과 사고는 칸칸이 나뉘어져서는 과학은 과학자의 일이되고 철학은 철학자의 일이되고 문학은 문학가의 일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칸칸의 세계가 허구의 신화, 허구의 권위로 뒤덮히게 된다. 엉터리 언론이 사람들을 어떤 환상의 세계에 있게 할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오늘날도 신화와 허구는 계속 되고 있고 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읽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은 드물고 하물며 쓰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그렇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화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사실 내가 보기엔 많은 사람들은 과학에 시대에 살기때문에 자신이 그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할 뿐 실질적으로는 신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게는 안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알고보면 그분이 알에서 깨어나셨데라던가, 그분의 어머니가 처녀였다잖아라고 말하면 ‘역시! 그럴줄 알았어.’라고 말할 준비가 된 것같은 분들도 있다.
진짜 옛날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신화는 대개는 개인적 차원의 신화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이러저리 엉성하게 이어서 세상은 이런 곳이라는 믿음을 만들어 내고, 자신이 스스로 만든 그 개인적인 신화의 세계를 살아간다. 나는 그것을 사고의 벽이라고 부르는데 어디엔가 이것은 원래 이렇다, 이것은 진리다, 이것은 확실하다라고 단정짓고 벽을 세운다. 그리고 그 벽 너머의 세계, 거기에 존재하는 진실과 인간은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는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미워하고 멀리해야 마땅한 사람에게 열렬히 빠져들며, 애써 노력해서 이룩한 것을 아무 가치없는 것과 바꾸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벽을 확실하게 있다고 느끼고 존재하지 않는 유령을 두려워한다. 귀중한 것을 도둑맞는다.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어느새 이웃이 죽어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뜬 장님이 된다.
신화의 세계를 벗어나는 법: 읽고, 써라
그 신화의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우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기와 쓰기, 특히 쓰기를 하지 않고 그 개인의 신화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읽기는 중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충분치 않은데 결국 남이 쓴 글이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이 쓴 글만을 읽는 것으로는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디서 앞뒤가 안맞는 것인지 느끼기 어렵다. 모처럼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말을 들었다고 해도 우리의 머릿속에 그런 말은 별거아니다, 그런 건 다 알고 있다, 그걸 믿어서는 안된다는 확신이굳게 자리잡고 있다면 별다른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그런 글과 말은 무시될 것이다.
사실 좋은 말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어떤 글이나 책의 의미란 상당부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문맥 혹은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 하는데에 달려 있다. 우리는 유치원생용 동화나 초등학생용 교과서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면 유명한 고전을 줄줄 외우고 주변 지식까지 외우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같은 책도 내가 어떤가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그래서 한번 읽은 책도 세월이 지나 다시 읽으면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연스레 자기가 쓴 글을 읽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내가 쓴 글을 읽어본다는 것은 어떤 명작을 읽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배운 사람이라고 자부하려면 글쓰기를 해야 한다. 스스로 글쓰기에 힘쓰고 그를 통해서 자기를 살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사람들은 읽기와 쓰기 특히 쓰기를 멀리한다. 실질적으로 교육과정 어디에도 글쓰기는 없다시피 하다. 글쓰기가 있다고 해봐야 대학입시를 위한 글쓰기가 조금 있을뿐인데 그런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겠지만 목적이 분명히 외부에 있는 만큼 자신의 개인적 믿음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즉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전에 채점하는 사람이 원하는 답, 선생님이 원하는 답이 뭘까에 집중하게 된다. 이래서야 곤란하다.
글쓰기는 자신과의 대화다
진정한 글쓰기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고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어디에 제출하기 위해, 누구에게 좋은 평가를 받거나 팔아먹기 위해 하는 수단이 된 글쓰기는 한계가 있다. 그런 글쓰기를 잘하면서도 남을 비꼬는 일에만 집중하고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직업적으로 남들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정리해서 떠들어 대는 것을 하는 사람도, 그래서 스스로 지식인으로 자부하고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실은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자기와 대화해 본적이 없는 사람, 앵무새처럼 남의 이야기만 반복하는 사람은 그저 훌룡한 누군가가 말했다는 권위에 의존해서 말할뿐 자기가 말하는 것의 진짜 가치는 모르는 것이다. 혀가 없는 요리사나 마찬가지다. 자기가 없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을 근거로, 지식이 넘치는 세상에 산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이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너무나 훌룡한 가수가 있는 시대에 산다는 이유로 자신도 괜찮은 가수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없고 그래서 그 내부가 공허하기 짝이 없는데도, 그래서 그로 인해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그렇다는 것을 모른다.
과학의 시대 이전의 사람들은 신과 유령을 쉽게 봤다. 그들은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헛 것을 보고 있지는 않은가? 헛된 권위와 체면에 목을 매지 않는가? 우리는 날마다 뭔가는 원래 그렇다라는 말을 엄청나게 하면서 살지 않는가? 미개한 시대의 사람과는 다른가? 나는 책읽기는 한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그 책에서 남이 만들어 낸 유령을 가져온 것은 아닌가? 이렇다고 할 때 우리가 쓰기를 생활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로 까지 말해야 할지 모른다.
사실 그 이유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이겠지만 글쓰기가 좋다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글쓰기를 일상화하는 사람은 그렇게 작을까. 내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뭔가를 잘하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는 그것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쓰기를 너무 간단한 것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종종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여가를 보내는 사람을 부러워 한다. 전문가 수준의 수학문제를 풀거나 철인경기같은 것을 즐기는 사람도 부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피아노앞에 앉아봤더니 내 연주는 피아니스트하고는 너무 다르더라라던가 나가서 좀 뛰어봤더니 마라톤 세계기록과는 너무 격차가 크게 느껴져서 달리기는 포기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렇게 하자마자 자기의 손가락에서 프로 작가의 글과 같은 것, 고금의 고전이 될 글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한다.
글쓰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어렵다. 타고난 천재는 모르겠지만 나같은 보통사람이라면 몇일이나 몇달 배우고 써본다고 훨씬 좋아지지는 않는다. 명작을 쓴다던가 하는 것은 말도 안되고 다시 읽어보고 흠 읽을만하군 하고 스스로 보람을 느끼게 하는 글을 쓰게 되는 것도 금방 되지는 않는다. 글을 쓰려면 자기의 관점이라는 것을 가져야 하고 자기의 세계를 가져야 한다. 그 자기 세계를 키워야 한다. 자기의 세계를 가지려면 자기와 친구가 되고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동안 버려두고 대화하지 않던 내가 말한마디 건넨다고 속마음을 마구 털어놓을 리가 없다. 조용한 곳에서 분위기잡고 산책하면서 말을 걸어도 잘 들어보니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반복하기 일쑤다. 우리 안의 나는 야박하고 부끄럼을 많이 탄다. 자꾸 자꾸 대화하고 정성을 다해서 귀를 귀울여줘야 사실은 난 이렇다면서 겨우 마음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글쓰기는 어렵다. 해봤더니 노력해도 안되던데라고까지 생각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 신화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 보라. 우리가 제 아무리 노력해도 도통 읽을만한 것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실은 우리가 그만큼 내적으로 큰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해 보여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 없어보이는 병이다.
글로 기록되는 순간 그 글은 우리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준다. 병이 너무 깊어서, 도무지 앞뒤가 안되는 신화를 믿고 살아가기에, 그것을 써내려가려고 해보니까 글이 엉망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글을 써보고 글이 써지지 않을 수록 오히려 글쓰기에 힘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를 보는 글쓰기는 달리기 연습같은 것이고, 치료제와 같은 것이다. 몸과 마음이 좋지 않을 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인데 잘되지 않는다고 금방 포기해 버린다면 병은 영영 더 깊어만 질 것이다. 병이 빨리 치료되지 않는다고 아예 약먹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글쓰기는 말하기와 당연히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글은 안 쓰면서 지인들과 낄낄대며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사는 건지 모르는 벌거벗은 임금님일 수 있다. 자기 입에서 나가는 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자기가 지금 뭘 입었는지도 모르면서 바깥을 걸어다니는 사람은 매우 용감한 것 아닐까? 자기와 대화해 보지 않고서,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는지도 잘 모르면서, 마구 뭔가를 뱉어내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이 뭘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은 혹시 무척 재수없는 인간이 아닐까? 책임질 수없는 약속과 근거없는 말을 마구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그 결과가 우리에게 몰려온다면 그 것은 어떻게 감당하는가. 혹시 우리인생이 지금 부질없이 바쁘고 고되다면 그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글쓰기가 문화운동으로 발전해야 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는가를 설명하고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나는 전에 몇번인가 글쓰기의 중요성이라던가 블로그 글쓰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 개인적인 소망때문이다. 나는 좀 더 살만한 세상에 살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거듭하여 글쓰기를 권하는 것이다.
살만한 세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어떤 정치적 파벌과 싸움을 벌이고, 부정부패를 몰아내고, 책을 읽고, 강연에 참가하여 배우기를 게으르게 하지 말고, 좋은 언론을 통해 정론이 세상에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모두 옳은 것이지만 사실 이미 해왔던 것이고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새로운 게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강조되지 못한 것으로써 수동적으로 읽는다던가 듣는다던가 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스스로 참여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의 소비자만 될 것이 아니라 생산자가 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다. 자기의 인생을 글로 남길 필요가 있다.
나는 글쓰기가 문화운동으로 만들어져서 모든 한국사람들이 글쓰기를 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기를 보는 글쓰기를 생활화하지 않는 사람은 배운 사람이라고 자부 할 수 없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글쓰기가 보편화된 사회란 바로 자기성찰이 보편화된 사회다. 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은 것이다. 당장 한국전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배운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라는 이해가 있는, 그런 문화가 있는 마을에서 살아가고 싶다.
요즘 세상에서는 공유경제라던가 마을만들기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본주의를 반성한다던가 유지가능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한다. 비극적 사고나 높은 자살률같은 것이 우리에게 반성과 혁신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대안적 시스템을 찾아 헤맨다. 우리가 뭘하던 미래에도 슬픈 일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와 대화하는 글쓰기를 하는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는 그런 슬픈 일이 적게 일어날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동적으로 읽기만 하는 사람보다 적극적으로 쓰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시스템이전에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글을 쓰는 문화는 이 세상을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고 나아가 결정적 역할을 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빼고서는 알맹이가 빠진, 즉 인간이 빠진 개혁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차원에서 신화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먼저 그 개인의 신화를 기록하고 써야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한 호머가 되고 헤시오드가 되어야 한다. 그걸 팔아서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글을 쓰는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기가 쉬워질 것이고 돈에 중독된 것같은 현대한국의 모습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쓰기위해서는 읽고 생각해야 한다. 책도 많이 팔리고 사람들간의 대화도 많아지고 배우려는 노력도 많아질 것이다. 모여서 할 일이라고 남의 험담이나 자동차 아파트 크기 비교하는 것이 아니면 사교육 이야기밖에 없는 그런 일도 줄어들 것이다. 남들이 뭘한다고 하면 정신없이 따라가고 보는, 유행에 약한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다보면 훨씬 더 다양한 세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재미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따뜻한 정이 흐르는 인간적인 세상이 될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 남들보고 하라고 권하면서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고 당신이 글을 써야 할 이유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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