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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옛동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문창극, 그는 누구인가?

by 설렘심목 2014. 6. 19.

[언론사 옛 동료들 탐문취재] 문창극은 누구인가

97년 관훈토론 때 DJ와 악연 맺었다

[제1153호] | 14.06.18 09:13 / [일요신문]

 

안대희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 이후 청와대는 깊은 고민을 거듭했다.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은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 깜짝 인선이었다. 헌정 이래 최초의 정통 언론인 출신 인사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것. 하지만 난관 하나를 넘어서니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10일 인선 직후부터 혹독한 여론 검증이 시작됐다. 무엇보다 그의 ‘글·말’이 발목을 잡았다. 언론인 시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망자에 대한 비난성 칼럼과 그의 역사관이 반영된 교회 내 강연이 문제된 것. 인물의 과거 행적을 차근하게 짚어가 보면 현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일요신문>은 오랜 기간 문 후보자와 함께한 옛 동료들을 접촉해 그의 지난 삶을 추적해봤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소감을 말하고 있다. 문 후보자의 주변인들은 그에 대해 박 대통령에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불협화음을 염려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한다면 두 가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최초의 정통 언론인 출신에 최초의 충북 출신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의 고향은 충북 청주가 아니다. 그의 본래 출생지는 북한 평안도다. 5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문 후보자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48년 피난길에 올라 청주에 정착했다.

김현일 <시사저널> 대기자(전 중앙일보 논설위원)는 문 후보자 정치관의 배경을 두고 그의 성장 환경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문 후보자와 동향으로 청주중과 서울대, <중앙일보> 후배다.

“원래 6·25 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른 이북 지역의 기독교인 상당수는 이념적으로 극우 보수 성향이 강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는 믿지 못할 존재다. 문 후보자는 청주에 정착해서도 양관(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의 주거지로 충북지역 기독교 문화의 요람) 근처에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 배경 탓에 그 역시 극우 보수 성향이 강하고 레드 알레르기(공산주의 혐오증)가 있었던 것은 맞다.”

<일요신문>이 접촉한 그의 옛 동료들은 모두 그를 ‘극우’보다는 ‘원칙주의자’로 명명했다. 사실 ‘극단성’과 ‘원칙성’은 한 맥 아니던가.

문 후보자가 <중앙일보> 정치부장으로 재직했을 당시 편집국장을 맡았던 고흥길 전 특임장관은 “내가 지켜본 문창극은 후배이자 동료지만 신문기자로서는 본받을 점이 많았다”며 “강직하고 소신 있었다. 무엇보다 누구와도 연결돼 있거나 신세를 진적이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일선 기자 생활 당시 다양한 일화로 나타난다.

문 후보자는 정치부 기자의 첫 발을 야당에서 시작했다. 당시부터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동교동계’와는 거리를 두었고 ‘장로’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상도동계’와는 비교적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함께 야당을 출입했던 김현일 대기자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사실 이러한 문 후보자의 원칙론은 꼭 야당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문 후보자는 군사정권에 대한 감정 또한 좋지 않았다. 군인이 언론을 탄압하고 설치는 꼴을 보지 못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 시절, 정부 인사와의 식사 자리에서 감정이 북받쳐 ‘더러운 밥 안 먹는다’고 소리치고 뛰쳐나간 적도 있다. 또 자신의 출신지 정치인들과 엮이는 것도 싫어했다. 예전 충북지역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정종택, 김종호 전 의원으로부터 몇 차례나 식사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매번 거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운데서 이를 전해야 하는 나로서는 아주 고역이었다.”

이러한 성격 탓에 사내 선·후배 관계에 있어서는 다소 끈끈하진 못했던 것으로 회자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중앙일보> 기자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문 후보자의 꼭 10년 후배다.

“원칙을 워낙 따지는 분이었다. 말도 별로 없었다. 논설위원실에서 그저 조용히 글만 쓰는 분이었다. 장난을 잘 치거나 동료와 잘 어울리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문제가 있으면 후배들을 불러 모아 따끔하게 혼내는 선배였다. 잔정은 많았지만 사실 무섭고 어려웠다. 이는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다.”

문 후보자의 지명 소식 이후 그의 주변 반응은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평가였다. 하지만 두 원칙론자가 부딪힐 경우, ‘선’이 다르면 ‘합’이 이뤄질 수 없는 법. 이 후배는 오히려 대통령 국정운영의 파트너가 될 문 후보자를 두고 ‘직언’을 넘어 갈등 양상을 걱정했다.

문 후보자의 원칙적 성향의 기반엔 기독교적 보수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현재 온누리교회 시무장로로 있다. 옛 <중앙일보>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문 후보자는 평소 술을 자제하며, 종교생활 탓에 골프도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일한 취미가 마라톤과 등산일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그의 기독교적 보수주의 성향이 더욱 굳어지게 된 계기에는 아픈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현재 그는 <중앙일보> 사내 커플로 만난 채관숙 전 TBC 아나운서 사이에 3녀를 두고 있다. 그런데 3녀에 앞서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들은 어린 나이에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뜬 것으로 전해진다. 문 후보자가 일선 기자 시절 겪은 일이다. 이로 인해 그는 더욱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 어쩌면 그의 보수적 이념관이 확고해진 계기이기도 하다.

앞서 밝혔듯, 기자시절 초창기부터 야권과는 상극을 이룬 그지만,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지난 1997년 대통령선거 때다. 문 후보자의 10년 선배인 성병욱 전 <중앙일보> 주필은 넌지시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1997년 대선 당시 관훈클럽 토론이 있었다. 사실 그 당시 후보자들은 패널들에게 ‘살살 좀 해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해왔다. 당시 패널로 참석한 문 후보자에게도 분명 이러한 후보자들의 부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 후보자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당시 유력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끝까지 몰아붙였다. 아마도 이에 김 전 대통령 측 입장에선 상당히 거슬렸을 것이다. 문 후보자가 야권으로부터 찍힌 것은 이때가 결정적이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야권 집권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1997년 대선 당시 정치부장 겸 부국장을 맡고 있던 문 후보자는 유력한 차기 편집국장 후보자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낙마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1999년 돌연 미주 총국으로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게 된 것. 당시 정치권에선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인사 개입 논란이 일었다.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1년이 돼서다.

현재 문 후보자의 사퇴를 가장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야권 인사 중 한 명은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다. 문 후보자와 박 의원 사이엔 예전 안 좋은 루머로 얽혀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98년 3월, 김 대통령의 ‘입’으로 통했던 박 의원이 <중앙일보> 편집국으로 쳐들어와 술잔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는 루머였다. 이때 정치부장이었던 문 후보자와도 부딪혔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단순히 물컵을 떨어뜨려 생긴 일이라고 해명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고 노무현 대통령(2009년 5월 <중앙일보>)과 고 김대중 대통령(2009년 9월 <중앙일보>)에 대한 비난성 칼럼 이전부터 야권과의 악연이 있었던 셈이다. 문 후보자는 이러한 야권과의 악연, 그리고 역사관으로 인해 발목이 잡혀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꺼낸 회심의 카드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기춘 실장과 인연 / 노태우 정권 때부터 ‘끈끈’

워낙 깜짝 인사였다. 이 때문에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에 대한 국무총리 지명을 두고 그 배경에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문 후보자 발탁 배후에 김기춘 비서실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박은숙 기자


더군다나 문 후보자의 과거 ‘글·말’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당장 낙마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청와대와 여당 역시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분위기다.

문제는 고심을 거듭했다는 청와대의 인선 시스템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문 후보자의 인사에 누구의 입김이 가장 크게 작용했는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역시 ‘실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문 후보자와 김 비서실장의 관계가 알려진 것 이상 끈끈하기 때문이다.

문 후보자의 옛 <중앙일보> 동료들에 따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지난 노태우 정권 때까지 거슬러간다. 1991년부터 이듬해까지 김 비서실장은 법무장관으로 있었다. 이 당시 문 후보자가 청와대를 출입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국무회의 등 여러 일정으로 청와대를 드나들던 김 비서실장과 문 후보자는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는 후문이다.

지난해에는 재단으로 전환된 ‘박정희기념사업회’의 이사장으로 김 비서실장이 취임하면서 초대 이사 명단에 문 후보자가 오르기도 했다. 재단 전환 첫 해, 고심을 거듭한 이사 인선에 문 후보자가 선택됐다는 것만 보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정치권에선 지난 5월 있었던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에 문 후보자가 지원한 것을 두고도 얘기가 쏟아지고 있다. 기자와 만난 문 후보자의 지인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이 문 후보자를 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문 후보자 역시 이사장 취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결국 낙마했다. 김 비서실장 이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김병호 전 의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낙마 당시 문 후보자는 상당히 당황했고 부끄러워했다. 어쩌면 박 대통령의 복심에 훗날 더 큰 쓰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와대의 이번 인사로 인해 비난의 화살은 ‘입김’으로 지목되고 있는 실세 김 비서실장에게 집중되고 있다. 지난 11일 청와대 인사 개편에서 수석들은 전면 개편됐지만, 김기춘 실장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이에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