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식.정보.시사.역사.과학.건강 等

석촌서호와 삼전도의 굴욕, 삼전굴욕비 - 위키백과 & 조영희글 및 국방자료

by 설렘심목 2014. 1. 26.

이하 위키백과 펌글 

 

개요
[편집]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와 받침돌 조각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뛰어난 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치욕비(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불리며,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조정의 명으로 조선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고 무게는 32t이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2],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3]

내용[편집]

  •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나라 황제에 반대했다.
  • 청나라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꾸짖, 자신의 죄를 생각 나게 주었다.
  •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 석음을 맹성하고 훌륭한 청나라 황제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했다.
  • 우리 조선이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한 청나라에 반대했다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이 비석을 짓기로한다.

화의 내용[편집]

  • 조선은 청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는 것을.
  •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명과의 교역을 금지 명나라에서 보낸 誥命과 명나라에서 주어진 조선 왕의 표시기를 청나라에 넘겨.
  • 왕의 장자와 차남 및 장관의 자녀를 인질로 보내는 것.
  •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 할 때에는, 요구 된 기일까지 지체없이 지원군을 파견한다.
  • 내외 (청나라)의 제 臣과 혼인을 맺어 친분을 굳게한다.
  • 성곽의 증축이나 수리는 청나라 사전에 동의를 받아야한다.
  • 청나라 황제의 생일 인 만성 절 · 정 삭이다 설날 하루 · 동지와 경조의 사자는 명과의 이전 예에 따라 보내는 것.
  • 청나라가 압록강 하구에있는 섬을 공격 할 때에, 병선 오십 척을 보내는 것.
  • 청나라에서 도망자를 숨기지 말라.
  • 일본과의 교류를 용서.
  • 청나라에 황금 100 량 · 시로가네 1000 량과 20 여종의 물품 (20 여종의 물품과 구체적으로는 청나라에 매년 조선인 미녀, 소, 말, 돼지 등 각각 3000 등의 물품 수)을 매년 상납한다.

설립 취지와 배경[편집]

명칭[편집]

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 다이칭 구룬 이 엔두링게 한 이 궁그 에르데무이 베이(만주어: Samjeondo Monument-Manchu.png
  • 몽골어: Dayičing ulus-un Boɤda Qaɤan-u erdem bilig-i daɤurisɤaɤsan bei
  • 대청황제공덕비(중국어: 大清皇帝功德碑, 병음: Daqing Huangdi Gongde Bei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1913년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4] 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 [5]

2007년 2월에는 30대 남성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철거 370'이라고 적어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또한 '370'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꿇은 지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6]

경위[편집]

조선14세기 말의 건국 이래, 명나라사대하던 책봉국으로 있었지만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만주에서 여진족들이 건국한 후금이 부흥하고, 1627년에 조선을 침공(정묘호란)했지만 조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결국 청나라와 조선은 조공 관계를 맺고 화친했다.(정묘약조)

이후 삼전도비는 소중화사상을 가진 조선사대부들에게 치욕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기타[편집]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상태 (전면)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상태 (후면)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상태 사진 (왼쪽이 전면, 오른쪽이 후면.)

후에 송시열이경석이 삼전도비를 찬한 것을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제5주차 시사안보 - 삼전도의 굴욕을 기억하라!2014.01.24 13:07 입력        

 

               

        굴욕의 역사가 담긴 삼전도비(사적 101호, 서울 송파구 소재)

 

■ 조선의 임금, 이민족 왕 앞에 이마 찧다.


 『“일 배요!” 조선 왕이 아홉 개의 층으로 된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중략)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청나라의 사령이 다시 소리쳤다. “이 배요!” 조선 왕이 한 계단씩 오르며 칸(汗, 청 태종)에게 절을 할 때마다 강화에서 끌려온 사대부 부인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조선 왕은 칸 앞에 꿇어앉았다.』
 

 이 글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내용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가 청나라 황제 태종에게 굴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삼배구고두는 세 번 절하면서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청나라의 항복 의식이다. 이때 인조의 이마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청 태종의 귀에 들려야 했으며, 예를 마친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굴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삼전도비

 당시 조선은 극심한 당파싸움으로 조정이 분열되었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동북아 정세변화의 흐름도 읽지 못하는, 한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아픔을 겪은 지 불과 50년도 채 안 되어 병자호란으로 인해 또다시 민족공멸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조선은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뼈를 깎는 반성을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군대는 기마부대를 포함 13만 명 수준이었으나, 조선의 군대는 6000여 명에 불과했다.
 

 조선은 청나라 군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인조 임금과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결국 인조는 전쟁 발발 45일 만인 1637년 1월 30일 한강 연안의 삼전도(三田渡,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조선은 청나라에 사대(事大)의 예를 표해야 했으며, 청나라는 항복의 조건으로 조선의 왕자들을 인질로 잡아갔고 처녀 수만 명을 강제로 끌고 가 노예와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2년 뒤인 1639년 굴욕적인 항복을 한 자리에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삼전도비가 설치됐다. 비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며, 청 태종의 공적을 새겨넣기 위한 의도로 세워진 것이다. 비에 새겨 넣을 비문(碑文)의 내용까지 청나라의 검토를 받아야 했다. 인조가 당대 문장가들에게 비문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결국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이 인조의 지시를 받들어 비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당시 이경석은 지인들에게 “글 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굴욕감을 토로했다고 한다. 추후 이경석은 ‘너무나 충성스럽게 묘사된’ 비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질타와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삼전도비의 기구한 운명은 계속되었다. 조선 말기 고종은 치욕의 산물이라며 강물 속으로 쓰러뜨렸으며, 일제가 1913년에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다시 찾아내 보물로 지정하였다. 이어 광복이 되자 다시 주민들이 부끄러운 역사라며 땅 속에 파묻었지만, 1963년 대홍수가 나면서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문교부가 ‘치욕의 역사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판단에 따라 삼전도비를 사적 101호로 등록하여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 강력한 힘과 의지만이 국가를 지킨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침략을 당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반성하고 대비책을 세우는 것에는 소홀하였다. 삼전도의 비극은 그러한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며, 방심하면 언제든지 굴욕의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적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국방력과 함께 기필코 지켜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모든 장병들은 국가안보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전불사의 전투의지로 무장한 강한 전사로 거듭나야 한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석촌서호와 삼전도의 굴욕| 조영희의 한강이야기

조영희 | 조회 2688 |추천 0 | 2012.07.08. 22:08

그 옛날 삼전도(三田渡)자리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이다.

삼전도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나루터다.
한강의 본류는 구의동 앞으로 바뀌면서 송파진과 삼전도에는 석촌호가 들어섰다.

왕은 이웃 헌릉과 선정릉으로 갈 때는 이 나루를 이용했다.

1637년 1월 30일 한강 상류 삼전도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이제까지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에게 조선의 왕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그해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7시) 무렵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눈쌓인 서문을 빠져나와 눈에 구르기를 수없이 하며

기다리는 청나라의 말을 타고 청 태종의 지휘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국왕의 의례복인 면복도 입지 못하고 청나라 구복, 남색 융복(戎服)을 차려입은 초라한 행색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은 통곡하였다.